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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39화 (39/119)

39화

내 사랑하는 웹소설 <시천귀>는 로맨스 없는 판무 카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때문인지 저렇게 잘난 해리스는 에이드리안과 애증으로 엮이는 것 말고는 러브라인이 전무했다.

‘후, 로판 남주가 되기에 이렇게 포텐셜이 끝내주는 캐릭턴데.’

그리고 솔직히…… 내가 두 사람은 ‘찐’이며 신성한 우정의 이름을 남용하는 로맨스라 주장하긴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 사이에 그렇고 그런 BL스러운 기류가 존재한 적은 없었다.

‘아깝게도, 말이지.’

에이드리안은 세계관 최강 가이드라서 약간의 스킨쉽만으로도 이능력자들을 완전히 치유하고 진정시키고 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게 없으면서도 관계성이 장난 아니니까 나 같은 덕후가 미치는 거지만…….’

가끔 손가락이라도 닿으면 미치고 팔짝 뛰었지, 후후…….

그것도 가이딩한다고 간신히 손 얹는 건데 싫어하는 마음 꾹 참고 접촉한다는 점에서 덕후 마음을 더욱 불태웠다.

‘아무튼, 저 끝내주는 해리스가 모솔로 평생을 살아갈 운명이라니!’

그야말로 국가적 인재의 손실이었고 세계관적 낭비였다. 디스토피아 배경이라 그런가?

‘뭐, 해리스 자신도 스킨쉽을 극도로 싫어한 것도 있겠지.’

특히 다른 가이드는 접근조차도 극혐하고, 에이드리안마저도 약간의 접촉만 허용할 뿐이었다.

그 혐관적 모먼트가 어찌나 끝내줬는지……. 감동과 안타까움의 눈물을 훔치던 난 멈칫했다.

‘잠깐, 혹시 그래서 나간 거야?’

해리스 자신이 광폭화로 잠시 정신 나갔을 때, 나한테 가이딩을 요구하며 스킨쉽했던 게…….

“부, 불편해서?”

몸이나 마음이?

나는 너무 당황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니, 나만 좋았다고?’

난 단호하게 부인했다.

“그럴 리가 없어.”

왜냐하면 그건 즐기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키스기 때문이다. 처음 해본 주제에 아는 척한다고?

‘아니, 해보면 알아. 그건 즐기는 자의 키스였어!’

확실하다. 처음 해보지만, 아무튼 내 말이 정답이다. 정답일 텐데!

‘그럼, 왜 저렇게 갑작스럽게 나간 거야?’

죽기 전 잘생긴 남자를 실물로 보고, 그 절세 미남과 키스해 보는 것은 내 버킷 리스트였다.

‘죽고 나서 달성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위시 리스트를 달성하고 가이딩도 해냈다는 흐뭇함과 첫 키스까지 했다는 약간의 쑥스러움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뭐가 문제였지……?’

두뇌가 빠르게 내가 깨어난 뒤 해리스의 반응을 리와인드하고 분석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난 해리스가, 고의인지 실수인지 침대의 받침대를 걷어찼다는 것을.

‘아니, 해리스가 실수할 리가 없잖아.’

그 신체 능력 우월하신 S급 이능력자께서, 자기 발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움직였다고?

‘그럴 리가.’

거기다 약간 절뚝이는 건 또 뭔가. 그만큼 기분 상한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야만 하겠다는 건가.

<시천귀>에서도 해리스는 빡치면 물건을 부수고, 다친 것을 방치하곤 했다.

내 최애지만 성격이 참 더럽군. 빡치게도 지금 이 상황과 일치한다는 게 문제다.

“……나쁜 놈!”

나는 너 구하겠다고 그 위험천만한 던전 가로질러서 달려갔는데! 내가 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강요했으면서!

‘해리스, 그 자식이 싫을 게 대체 뭐가 있……!’

생각해보니 하나 있긴 했다. 멍하니 입술을 더듬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야, 양치를 안 해서?”

* * *

“후…….”

레디안 백작의 손녀, 아미아 레디안은 문 앞에서 멈췄다.

각오하고 온 일인데도 심장이 떨려왔다.

‘이대로는 안 돼.’

레디안 백작 가문은 대대로 고드윈 공작을 모셔왔다. 지척에서 공작과 후계자를 보좌하는 것은 그들의 사명이자 영광이었다.

그러니 아버지인 레디안 소백작이 새롭게 나타난 해리스 고드윈 소공작을 모시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각하께서 명하신 일일 테니까.’

그리고 하나뿐인 언니, 유디트가 그에게 충성하는 것도 납득할 수 있었으니까.

‘언노운 던전에서 구해 주셨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디안 가문 전체가 해리스 고드윈에게 운명을 거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버지, 유디트가 말하기를 저흰 이제 해리스 님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다더군요.’

‘그래, 나도 느낌이 좋다.’

느낌? 느끼임?!

‘아버지나 언니는 그렇다 쳐도, 할아버지는 또 무슨 생각이야!’

장난하냐고!

언니 유디트가 기사단에 입단하게 되면서 레디안 가문의 차차기 후계자는 막내인 아미아 자신이 되었다.

차차기 후계자로서, 아미아는 결코 레디안 백작 가문의 운명을 이렇게 허술하게 결정할 순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똑똑- 마음을 다잡은 아미아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목욕 시중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깨끗한 대리석 바닥에 백작 영애에게 걸맞지 않은 하녀복이 반사되었다.

그렇다. 구 고드윈 세력의 2인자이자 고드윈령의 공주님이나 다름없는 아미아 레디안은 하녀로 분장한 것이다.

‘자고로 사람을 알려면 약점부터 파악해야 한다고 했지.’

그리고 해리스 고드윈의 약점은 그의 가이드라는 소녀, 제이드다. 과거가 불분명해 노예 출신이 아닐까 의심받는.

‘노예라니.’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

아무리 해리스 고드윈이 고독하고 힘겹게 자랐다 해도, 겨우 노예 따위에게 마음을 줄 정도로 어리석진 않을 것이다.

이성적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미아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미색이 뛰어나다는 말은 들었어.’

길게 늘어뜨린 연분홍색 머리카락. 짙푸른 눈동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가냘프고 자그마한 몸은 누가 봐도 동화 속 요정족처럼 어여쁘고 사랑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그조차 아미아에겐 반감의 요소였다.

신분이 미천한 계집이 미색 하나 뛰어나다고 고귀한 고드윈의 옆자리를 차지해?

‘제대로 된 귀족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만약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진실이라면, 아미아는 결코 해리스 고드윈에게 가문의 명운을 걸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동시에, 그만큼 제이드라는 소녀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사용인들은 그렇다 쳐. 할아버지는 물론이요, 선대 공작 각하마저도 후하게 평가하는 미색이라니…….’

얼마나 요망한 게냐. 아미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들어와.”

맑은 목소리마저 불순하게 들렸다. 아미아는 결연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좋아, 간다!’

그렇게 문을 연 순간.

“……?”

아미아가 본 것은 양 머리였다.

아니, 젖은 머리를 말리려는 것처럼 수건으로 양쪽을 말아 틀어놓는 것이었는데, 모습이 마치 양의 둥글게 말린 뿔 같았다.

“안녕.”

그 양 머리의 소녀가 인사했다.

크고 동그란 눈동자, 연분홍색 곱슬머리, 시야가 환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에 순간 압도당할 뻔했다.

한 손으로는 입에 칫솔을 넣고 치카치카 이를 닦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책을 펼쳐 쥐지만 않았어도.

“…….”

아미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백작 영애로서 목욕 시중을 들겠다고 각오했을 때 한 상상은 여럿이었지만, 지금 눈앞의 상황은 예상 범위 밖이었다.

‘뭐 하는 거야?’

왜 씻는 것을 자기가 하지?

아니, 자신이 할 수도 있지. 미천한 신분이라고 했으니까, 시중받는 게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어. 차라리 잘된 일이지.

‘근데 책은 뭐야?’

아미아가 할 말을 잃는 동안 상대는 입 안의 거품을 뱉고 가글까지 했다.

고르르-!

“…….”

주변의 시선이 어떻게 박히건, 소녀는 손바닥에 후- 하고 숨결을 불고 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후, 오늘도 문제없음.”

뭐가?

아미아가 정신 차렸을 땐 소녀의 손에 잡혀 욕실 바깥으로 나온 뒤였다.

“난 다 씻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 예…….”

이게 아닌데.

아미아는 시작부터 계획이 어긋나 기분이 찜찜했다.

그러나 이어진 풍경에는 아예 계획을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아, 아미아.”

“왔어요?”

“여기 앉아요!”

너희 뭐 하냐?

고드윈의 후계자가 머무는 동관,

그곳에서 두 번째로 좋은 방의 의자와 바닥에 하녀들이 널려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씩 책을 쥐고 있었다.

흐려지는 초점을 맞춰 책의 커버를 훑었다.

<타락한 기사님은 밤이면 밤마다3>

<그와 그녀 그리고 그>

<백작 부인은 왜 마구간 지기에게 스테이크를 주었나 1>

<내 노예가 이렇게 자랐을 리가 없어! 완결>

“…….”

다시 초점이 흐려졌다. 이게 뭐야?

아미아는 하녀들에게 위장 진입하겠다 미리 말해둔 상태였다.

비록 하녀들이 해리스의 가이드에게 충실하다 한들, 기존 고드윈 세력의 끈끈함을 넘어설 순 없었다.

그러니 정체가 탄로 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타락 기사 4권! 4권 어딨어?!”

“아직 덜 읽었으니 기다려.”

“메이, 빨리 내놔-!”

“기다리라고! 20페이지 남았다고!”

“내노예 외전 누구야.”

“나~”

이 개판은 뭐지? 정신이 혼미해진 아미아의 어깨를 두드린 건 제이드였다.

“너도 편히 앉아. 읽고 싶으면 읽고.”

“하, 하지만…….”

무어라 말하려던 아미아는 제이드가 조안나에게 <내 노예가 이렇게 자랐을 리가 없어> 외전을 건네주는 걸 보고 멍해졌다.

‘아니, 이 닦는 동안 보던 게 그거였어?’

해리스 고드윈은 선대 공작에게서 후계자로 인정받고 현재 바쁘게 권리를 이양받는 중이다.

그런데 그의 하나뿐인 가이드란 것은 하녀들과 이렇게 시시덕거리고 있다니.

‘뭐 이런 게…….’

기가 막혔다. 막히는데, 눈은 자신도 모르게 ‘내노예’ 1권을 향하고 있었다.

“하! 허! 기가 막혀서, 진짜……!”

물론 보려는 마음은 아니었다. 이딴 게 공작 성에 유통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경악스러웠을 뿐이다!

아미아는 이게 얼마나 불손한지 확인하기 위해 책을 펼쳤다.

“……와.”

아미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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