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그건 그 괴물 새끼가 마침내 죽어가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지만, 사내는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살아온 사람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각하께서 첩자들을 더욱 각별히 족치고 계신다지…….”
그리하여 고드윈령의 정보가 이전처럼 빠르게 전달되고 있지 않았다.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서로 상대의 집안에 첩자를 넣어 감시하는 것이 일상이거늘.
“마탑에 연락을 취해라.”
이전과 다른 마도구의 신호. 이전과 다른 선대 공작의 반응.
“괴물 새끼가 무사히 갇혀 있는지.”
이것이 우연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대체 뭘 하느라 엉덩이 뭉개고 느릿느릿 상황 파악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있는지 책임을 물어.”
사내는 비릿하게 웃었다. 만약 그의 추측대로라면…….
“……그리고 내가 이전에 말한 것들을 불러라.”
가만둘 수 없구나, 나의 아들아.
“비어있던 후계자 자리를 채워야겠다.”
* * *
“후으…….”
해리스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박동이 지나치게 빨랐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화가 났군. 왜지?’
붉은 입술이 조소했다.
아마,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겠지.
억제구의 한계 없이 개방된 힘인데도, 드래곤이라는 압도적인 마수 앞에서 그는 제대로 이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제이드가 겁도 없이 나타났다.’
해리스는 눈을 꾹 감았다. 그 사실은 기억이 아닌 확신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능에 잠식당하던 자신이 어떻게 깨어났겠는가.
그러나 깨어나자마자 본 제이드가 쓰러지고, 품 안의 소녀가 다시 고열로 들끓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화가 나.”
해리스 가만히 제이드를 내려다보았다.
냉담한 얼굴과 반대로 시선은 지나치게 맹렬했다.
닿아오는 체온이 지나치게 뜨겁다는 걸 인식했을 땐, 정신없이 그녀를 안고 달려가던 상태였다.
다행이라 할지, 때마침 보인 고드윈의 기사단이 말을 가지고 있었고 해리스는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제일 먼저 보이는 말을 빼앗았다.
‘해, 해리스 님!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시다니, 각하께서…….’
‘닥치고 의사나 데려와!’
쾅, 부서지는 문. 입술을 짓씹으며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의사가 왔다.
‘트, 특별히 보이는 외상은 없습니다만, 한 달도 넘게 던전을 떠도느라 피로가 누적되었다거나…….’
‘한 달?’
체감상 하루나 길어도 이틀이었는데, 던전 바깥에선 벌써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니.
‘퀘스트가 <시간이 멎은 성>이라 그런 건가.’
쓸모없던 의사가 떠나고,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던 해리스의 이마가 툭 하고 제이드의 머리맡에 떨어졌다.
머리 위로 익숙한 어둠이 드리웠다.
지하 감옥.
그곳의 가장 높은 곳, 땅에 묻히다 말만 창문으론 아주 좁게나마 빛을 들여오곤 했다.
겨울에는 눈이, 가을에는 낙엽이, 여름에는 벌레와 나뭇잎이.
그리고 봄에는, 꽃잎이 가끔 떨어져 내려오기도 했다.
그때의 꽃잎과 같은 연분홍빛 곱슬머리가 배게 위로 흐트러졌다.
감옥에서처럼, 해리스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닿고 싶었다.
그 연약하고 자그마한 꽃잎에. 만지고 싶었다. 가지고 싶었다.
닿으면, 만지면, 가지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비슷한 것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지만.’
해리스는 차게 웃었다.
누가 그랬던가, 지옥에 있는 사람은 천국을 생각한다고, 상상이라도 지옥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정말이지 그랬다. 해리스는 끝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 빌어먹을 지옥 같은 감옥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울 거라고.
그가 본디 가져야 할 것을 모두 가지고, 죽여야 할 자들은 모두 죽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모두의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게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
그러니 그때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도.
고성의 모든 서적을 읽고, 쇠창살에 매달려 몸을 단련시키며 한참 전 과거를 더듬어 검술을 수련하면서.
계속해서 생각했다. 끊임없이 상상했다.
자유를 가진 뒤의 삶을, 복수를, 행복이나 미래와 같은 너무나 멀고 추상적인 단어들을.
탈옥한 뒤에는 모두 다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
그리고 어느 순간부턴, 그조차도 하지 않게 되었지. 그저 복수에만 한이 맺혔을 뿐.
해리스는 꽃잎의 강처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놀랍게도, 그는 이제야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탈옥하고도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는 눈을 감으면, 그리고 다시 깨어나면…… 이 모든 게 그의 상상일지도 모른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 왔던 거다.
“……손에, 닿지 않는 것 같아.”
해리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분명 자유를 얻었을 텐데, 해리스는 감옥에 갇혀 한때 상상하던 그 모든 건 여전히 멀어 보였다.
‘그래서 화가 났나?’
분노.
그가 무너지지 않게 단단히 지탱하고, 죽지 못하고 강제로라도 살아가게 만든 그 감정이, 이렇게 지옥 바깥으로 나와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도 꺼지지 않았다.
그 불꽃의 눈빛으로 제이드를 보던 해리스가 중얼거렸다.
“……가이딩 때문이야?”
네가 이렇게 아픈 건.
해리스의 입술이 달싹이다 멎었다. 어느 순간부터 ‘공허’에 잠식당했다는 것 정도는 그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의 기억은 검은 물감에 범벅이 된 것처럼 흐릿했다.
공백의 사이사이 떠오르는 건, 마비된 정신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는 달큰한 향, 따스한 온기. 탐하고 탐해도 부족하던…….
“제이드.”
해리스는 무심코 제이드의 입술을 보았다. 붉고 도톰한, 왜인지 살짝 부어오른 입술을 보자 귓가가 뜨거웠다.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내가 이능에 잠식당하는 걸 알고, 날 구하기 위해 달려온 거야?”
네가 그렇게 부인하고 할 줄 모른다던 가이딩으로?
“……거짓말쟁이.”
해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쿵, 쿵 뛰었다.
무언가, 그가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감정이 파도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
본능적인 경계심이 경고를 울렸다.
자신을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노예를. 반려 가이드가 아니라고 우기는 소녀를.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던 제이드를…….
‘믿으면 안 돼.’
해리스는 눈을 꾹 감았다.
오르내리는 목울대가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켰다.
눈가가 화끈거리고 호흡마저도 열감이 돌았다.
그때였다.
“……으응.”
식은땀을 흘리던 제이드가 작게 신음한 건.
흡, 본능적으로 숨을 참듯 소리죽인 해리스는 깨달았다.
이대로 제이드가 깨어나면, 별처럼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해 오면…….
“……해리스, 님.”
맑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저렇게 배시시 웃어버리면.
“왜 그런 얼굴이에요?”
그리고 자신에게 또, 손을 내밀어주면…….
“깨어났군.”
덜컹, 해리스가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쉬어라.”
다리가 가구에 부딪힌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는 황급히 돌아섰다.
‘믿을 수 없어.’
믿어선 안 돼.
경고음을 따라 해리스는 도망치듯 문밖으로 나섰다.
자신이 미약하게 절뚝이는 것도 모른 채 한참 걷던 그는 문득 얼굴에 손을 올렸다.
뜨거웠다.
* * *
“허, 뭐지?”
나는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막 깨어나자마자 보인 것은 해리스였다.
흐릿한 시야를 깜빡이던 난, ‘내가 기절했다 깨어나면 늘 해리스가 있네, 신기하당’ 같은 생각을 하며 ‘해리스 님, 얼굴 왜 그래요?’ 하고 물었다.
‘많이 피곤한가.’
피로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긴 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꾀죄죄해 보이긴커녕, 도리어 퇴폐미가 짙어지며 눈빛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날카로운 턱선과 곧은 콧대에 살짝 갈라지고 튼 붉은 입술까지.
‘진짜, 생긴 거 하나는 극락…….’
감격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래, 얼굴 하나만큼은 우리 해리스가 세계 제일이다.
‘이 집 안구 복지 잘해. 얼굴 맛집이야.’
그런데 내가 본격적으로 복지를 누리고 맛집 탐방하기도 전에!
“깨어났군.”
해리스가 벌떡 일어서더니, ‘그럼 쉬어라’ 하고선 갑자기 나가 버렸다.
“……자, 잠깐만요!”
어딜 도망가!
그러나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문이 쾅, 닫혔다.
“뭐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눈을 깜빡였다.
저기요? 님을 위해 죽도록 달려가서 가이딩해 준 사람한테 이게 무슨 태도야?
‘뭐, 주로 달리는 건 페드로가 했지만.’
그리고 가이딩도…… 진짜 가이딩이 맞는 건지 확신은 못 하겠지만…….
“아니, 그래도 진정됐잖아!”
스스로에게 관대한 난 빠르게 합리화했다.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결과다!
“결과…….”
나는 무심코 입술에 손을 얹었다. 아직도 살짝 부어오른 게 열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열감에서 이어진 것은…….
“……!”
엄청나게 뜨겁고, 격렬했던 입맞춤.
‘미친, 미친, 미친, 미친~!!’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갸아아악!”
‘아니, 이거 내 인생 통틀어 첫 키스라고……!!’
그리고 아주 끝내주는 키스였다.
너무 급작스럽고 숨을 못 쉬어서 그렇지, 솔직히 좋았다.
온몸에 열감이 끓어오르고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키스 경력이 없어서 비교할 순 없지만…… 최소한 내 인생 베스트 키스인 건 확실해.’
하아,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그 퇴폐미 넘치는 얼굴에, 나른하고 섹시한 목소리, 거기에 근육 쩌는 몸매로도 모자라 굿 키서이기까지 하다니……!
“와, 해리스. 다 가졌네, 다 가졌어.”
나는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누르며 중얼거렸다.
“장르 잘못 타고난 놈…….”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