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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37화 (37/119)

37화

던전이 파괴되었다.

빠르게 도착한 선대 공작의 지원은 부상자와 사망자를 분류해 마차에 실었고, 던전의 부산물들도 정리했다.

“여기, 네이트! 이것들 옮겨!”

“네!”

가급적 부상의 정도가 약한 아넬라 일행도 부산물 정리팀에 합류한 상태였다.

애초에 그들이 던전행에 참가한 공식적인 이유가 던전의 부산물을 얻는 것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우리가 손댈 것이 아니다. 단장님께 전달 드려.”

“네, 이모. 그리고 이 약초는요?”

“그건 우리가 챙기면 될 거다. 사전에 합의한 일이야.”

그렇게 급을 분류하며 나누는 와중이었다.

“안녕.”

듀크가 찾아온 것은.

“……!”

언제 나타난 건지, 아넬라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뻣뻣이 굳어졌다.

회색의 머리카락. 존재감이 옅지만 한 번 인식하면 훈훈한 인상의 미청년이 빙긋 웃어 보였다.

“아넬라, 잘 지냈나 봐?”

하필이면 지금의 아넬라가 그림자 쪽에 자리해 더더욱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행이네. 우리 할 이야기가 있지?”

거기다 듀크 아인델타는 긴말하기 성가시다는 듯 곧장 목부터 잡고 시작했다.

“제……, 제이드예요!”

“뭐?”

“처음, ‘검은 인어의 눈물’이 가품이라는 것을 알아챈 게 바로 제이드라는 소녀라고요!”

겁먹은 아넬라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이드란 소녀가 어떻게 생겼는지부터 그녀가 고드윈 성의 새 이능력자, 해리스 고드윈의 반려 가이드라는 것까지.

“……해리스 고드윈?”

“네, 네! 선대 공작님의 친손자이자 현 공작의 아들이요, 그, 돌아가신 예언자 황녀의 유일한 자식!”

아넬라는 멈추지 않고 계속 불었다.

그 제이드 때문에 자신도 이 언노운 던전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과 자신에게 특정 던전 약초들을 채집하게 시켰다는 것.

그리고…….

“대, 대신 로스두 상단이 파산하는 걸 막아주겠다 약속해 주셨습니다!”

“흐음.”

과연 듀크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반응에 힘입어 아넬라는 제이드 곁에서 지켜보며 알게 된 점들을 주르륵 늘어놓았다.

살고 싶었으니까.

지금 자신의 목숨은 그녀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닌, 자신에게 명운을 건 모두의 목숨도 포함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네이트, 돌로레스, 페레스, 페드로…….’

그들은 갑작스러운 두로스의 실각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지해 주었다. 던전까지 함께해 줄 정도로.

자신이 죽더라도 저들만큼은 살려야 했다. 최소한 네이트만이라도……!

“그렇단 말이지.”

듀크는 아넬라의 보고를 가만히 듣기만 할 뿐, 무어라 크게 끼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넬라는 목을 누르던 손의 힘이 살짝 약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믿는 거야.’

전부 다는 아니라도, 최소한 크게 거슬리는 거짓이 없다고 여긴 거겠지.

그리고 그건 진실이었다. 아넬라는 지금껏 한마디의 거짓말도 늘어놓지 않았으니까.

‘역시…….’

아넬라의 머릿속에 누군가 스쳐 간 순간이었다.

“푸하하!”

듀크 아인델타가 웃음을 터뜨린 것은.

그 순간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짓던 아넬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한 말 중 웃을 만한 거리는 없었는데……?

“아, 미안, 미안. 비웃으려던 건 아니야.”

듀크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아넬라는 새삼 이 청년이 존재감이 희미하지만, 그가 미소를 지으면 무척이나 보기 좋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그의 저런 웃음을 목격한 건, 전 상단주 두로스를 살해했을 때였다…….

“……!”

아넬라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 공포스러워 차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순간.

“그냥, 신기해서. 그 가이드…… 아니, 이름에 제이드라 했지.”

“네, 네…….”

듀크는 친한 사람을 입에 담듯 다정하게 제이드, 하고 이름을 불렀다.

“제이드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까지 애써서 너를 살려주려는 걸까? 생각해보니 재미있어져서 말야.”

“!!”

아넬라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 말대로였다. 여태까지 그녀가 한 모든 말은 제이드를 배신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녀의 명대로였기 때문이다.

‘전부 말해.’

이전, 아넬라가 제이드에게 매달리자 나온 답변이었다.

‘당신이 본 나에 대해서, 듀크 아인델타가 찾아오면 전부 솔직하게 말해. 절대 거짓말하지 말고.’

그리고 저것이 제이드의 답이었다.

‘대놓고 자길 감시하라고?’

예상외의 답에 아넬라는 얼이 빠졌다.

사실 그녀가 제이드에게 살려달라 애걸한 건, 정말로 제이드에게 기대해서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제이드보다, 그녀를 반려 가이드로 삼았다는 해리스 고드윈 때문이었다.

암흑처럼 어두운 머리카락, 붉은 눈은 가장 깨끗한 피를 짜서 담은 듯 선명했고, 눈 밑 그늘과 붉은 입술은 퇴폐적인 아름다움까지 느껴졌다.

몹시도 아름답고, 그 이상으로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는 청년.

아넬라는 첫눈에 알 수 있었다.

미미하지만 자신 또한 이능력자였기에, 그가 얼마나 강력한 이능을 타고난 건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결코 전설적인 암살자 듀크 아인델타에 뒤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더 강력할지도 몰라.’

특히 그가 고드윈의 차기 소공작이 된다면 말이다.

그러나 해리스 고드윈은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과 신경은 오롯이 자신의 가이드라는 소녀, 제이드에게만 쏠려있었으니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본디 이능력자들이란 이능이 강력할수록 자신의 가이드에게 집착하게 마련이니까.

‘뭐, 난 잘 모르겠지만.’

제이드는 분명 동화 속 요정처럼 어여쁘고, 사랑스럽게 생겼지만 다른 가이드를 보았을 때와는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아마 내가 C급이라 그렇겠지. 그리고 만난 시점도 시점이니.’

듀크 아인델타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 상태였으니, 한가롭게 가이드에 관심 가질 여력이 없었다.

살길이 우선이다. 그런 마음으로 접근한 거였지만.

‘앞서 말했지만, 듀크 아인델타는 반드시 당신을 찾아올 거야.’

그때, 제이드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길게 늘어트린 옅은 분홍빛 곱슬머리는 역광의 그림자에 도리어 후광처럼 밝았다.

‘자신이 맡긴 임무를 제대로 했는지 확인하는 건 물론이고, 그 이상의 정보도 얻어내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그놈은 쾌락 살인마입니다! 제가 원하는 대로 다 행동하고 답해 줘도, 언제라도 절 죽일 수 있……!’

‘아니. 그놈은 그러지 않을 거야.’

역광에도 푸른 눈동자는 반짝였고, 가만히 있어도 미소 짓듯 휘어진 분홍빛 입술은 꽃잎처럼 도톰했다.

‘너를 살려두는 게 더 이득이라는 걸, 그 자신이 더 잘 알 테니까.’

누가 봐도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대단히 어여쁜 소녀였다.

그러나 그 순간 아넬라는 제이드에게 압도당했다. 연약하고 천진해 보이는 건 여전했지만, 어째서인지…….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는 상인의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던전행에 따라가게 된 것도 그날의 결정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듀크 아인델타가 접근해 올 때, 최대한의 정보를 제공해야 안전하지 않겠냐는 제이드의 설득도 있었지만.

“단순한 동정일까, 아니면 너에게서 어떠한 가치를 본 걸까?”

그리고 그 말대로였다. 듀크 아인델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어쨌거나, ‘제이드’는 너를 통해 나와 소통하고자 하는 모양이지.”

“……!”

본능적으로, 아넬라는 듀크 아인델타의 마음이 자신을 죽이는 선택지에서 살리는 선택지로 기울었음을 깨달았다.

“그럼 다음에 봐, 우리 유능한 상단주님.”

듀크 아인델타는 웃던 낯 그대로 아넬라를 놓아주었다.

“아, 대신 다음에는 실물을 가지고 오는 게 좋을 거야.”

놀랍게도 목에는 언제 잡혔냐는 듯 자국 하나 없었다.

“그때에도 내가 한낱 정보 따위로 만족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거든.”

듀크 아인델타의 손이 떨어지고, 키득거리는 웃음이 멀어졌다.

그러나 아넬라는 돌아보지 못했다. 어둠에 녹아든 그림자가 두려워, 빛조차 마주할 수 없었다.

* * *

고드윈령의 언노운 던전이 파괴되었다. 선대 공작이 보낸 소수의 인원으로.

“그놈일까요? 용병왕?”

“아니.”

지팡이를 쥔 사내가 말했다.

용병왕 알루카스가 파괴한 거라면, 이렇게 조용히 지나갈 일이 아니라 또다시 소식지에서 떠들썩하게 그를 찬양해 댈 것이다.

“천박한 이능력자 놈들이란 다 그렇지. 원숭이 재주 뽐내듯 어떻게든 자랑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게야.”

서늘한 목소리에는 경멸이 듬뿍 깃들어 있었다.

상대는 멋쩍게 웃으면서도 맞장구치지 못했다.

현재 황실이 용병왕을 널리 선전할 만큼, 이능력자들의 역할은 커지고 있었다.

그들의 진정제라는 ‘가이드’란 존재도 이제 제국민들에게 아주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모두, 이 세계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균열’과 ‘던전’이라는 재앙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엔 여전히 새롭고 낯선 세력을 경계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 대표주자가 눈앞의 사내였다.

그가 이능력자에게 가지는 멸시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툭, 지팡이를 짚은 사내는 어둠 속 자줏빛 눈동자를 빛냈다. 그의 시선은 고드윈령의 상세 지도를 향하고 있었다.

그가 일생의 반을 살아온, 그리고 버리고 온 고향.

그 고향에서 죽지 못하고 버티는 노인네가, 무슨 수로 언노운 던전을 제대로 된 이능력자 부대도 없이 해결했는가.

고드윈령의 중심을 보던 시선이 그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자신의 치부를 가두어 둔 공간. 괴물이 갇힌 성.

사내의 자줏빛 눈동자는 괴물의 생존과 감금 여부를 확인하는 마정석을 향했다.

반짝, 반짝-

살아 있고, 갇혀 있다. 그 신호를 확인하는 것은 일종의 편집증적인 강박이었다.

그랬기에.

“……그런가.”

사내는 알아차렸다.

빛이 이전보다 희미해지고, 깜박이는 간격도 길어졌다는 것을.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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