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그것도 그냥 검은 물감에 젖은 듯 까매진 게 아니었다. 하얀 피부 아래에 검은 물감과도 같은 것이 피부 아래에서 파도치듯 넘실거리며 밀려오고 있었다.
마치 생물처럼.
‘이, 이게…….’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을 때의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스킬이라고? 흡성…… 설마 흡성대법?!’
자고로 웹소 덕후는 한 장르만 먹진 않게 마련이다. 제이드도 무협에 아주 무지하진 않았다.
‘흡성대법(吸星大法)이면 그거잖아, 타인의 기(氣)를 흡수하는 기공!’
하지만 여기는 판타지 세계다. 장르가 다르잖아?
물론 두 세계를 넘나드는 작품도 드물지 않다. 통상적으로 무협에서 기(氣)라고 불리는 에너지가 판타지 세계에서는 마력으로 치환되곤 했…….
‘……그럼 내가 해리스의 마력을 흡수한 거라고?’
제이드는 충격에 입이 벌어졌다. 젖은 입술은 갈라진 과실처럼 탐스러웠다.
“…….”
해리스가 다시 그녀의 턱을 당겨온 것도 그때였다.
“자, 잠깐-!”
제이드는 다급히 손을 들어 해리스의 입술을 막았다.
밀접 접촉으로 몽롱해진 이성과 열기 어린 흥분은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
-고 생각하자마자 제이드는 펄쩍 뛰었다. 손바닥에 닿아온 감촉 때문이었다.
“해, 해, 해리스 님?!”
뜨겁고 습한 감각이 손바닥을 느릿하게 스치고 하얀 이가 손등을 살짝 깨물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해리스는 붉게 눈웃음쳤다.
“응, 제이드.”
거기에 나른한 목소리까지.
눈앞의 사내는 정신이 녹아내릴 정도로 퇴폐적이었다.
“나 불렀어?”
“네, 네에…….”
“왜?”
순식간에 함락당한 제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던 거 계속 이어 하세요’ 하고 말할 뻔하다 혀를 깨물었다.
“해, 해리스 님! 정신 차리세요!”
“나 정신 차렸어.”
“아니, 전혀 아니거든요?!”
내 손바닥 안 놔주고 계속 쪽쪽 거리고 있잖아!
‘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뽀뽀 귀신이셨다고!’
아니, 애초에 스킨쉽 자체를 별로 안 하지 않았나.
자신을 어디 데리고 갈 때 외엔 별로 닿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하아…….”
내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해리스가 열기 어린 숨을 내뱉었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은 당장에라도 나를 덮쳐올 듯 번뜩였다.
‘……맛이 갔어, 눈이 완전히 돌아갔다고!’
해리스가 갑자기 이렇게 돌아버리다니.
[스킬, ‘흡성대법’이 활성화됩니다.]
자신이 알아내서일까, 중간 ‘?’표가 ‘대’로 바뀌었다.
‘이거, 정말 가이딩이 맞나?’
가이드는 진정, 치유, 정화의 힘을 이능력자에게 발휘할 수 있다.
흡성대법은 그 셋 중 어디에도 속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광폭화 증세가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제한 시간: 5분 37초]
더는 시간이 없었다.
‘에잇! 될 대로 돼라!’
각오한 제이드는 해리스의 얼굴을 쥐었다. 그리고 그가 멈칫한 사이 먼저 입을 맞추었다.
“……!”
해리스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흥겹다는 듯 휘어졌다. 그렇게 입술이 얽히는 순간.
“……?!”
기묘한 달콤함이 쓴맛과 함께 해리스의 입 안에 퍼져갔다. 이게 뭐냐고 묻기도 전 해리스는 정신을 잃었다.
“켁! 무거워.”
무너지는 해리스의 몸을 받다 함께 쓰러질 뻔한 제이드는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휴……. 가져오길 잘했다.”
제이드는 해리스에게 입 맞추는 척 미리 따온 형광 색감의 열매를 넣었다.
‘진정 포션의 핵심 재료니까, 진정 효과가 없진 않겠지.’
광폭화가 진정되면 다시 깨어날 것이다.
‘그럼 돌발 퀘스트는 달성한 건가?’
알림 창 속 시간은 멎은 상태였다. 그러나 가만히 깜빡일 뿐, 퀘스트가 달성됐다는 메시지가 떠오르진 않았다.
‘왜지?’
주변을 돌아보던 제이드는 그제야 공간이 어두컴컴하다 싶던 게, 사실은 해리스의 마력이 암막처럼 사방을 막아버린 거였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스킬, ‘흡성대법’은 사방으로 뻗어진 해리스의 마력까지 모조리 흡수하며 어둠을 허물고 있다는 것까지도.
제이드는 멍하니 손을 보았다. 마력 흡수가 거의 끝난 건지, 새까맣던 손이 점점 하얘지고 있었다.
그리고.
“허억!”
너무 많은 마력을 흡수해서일까,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심장이 옥죄이듯 숨이 막혔다.
어둠의 장막이 걷어지며 공간의 본모습이 드러난 건 그때였다.
아주 호화로운 침실이었다.
오래된 성, 돌벽의 외풍을 가리기 위한 태피스트리가 곳곳에 있었고 벽난로에는 불꽃이 넘실거렸다.
[크르륵……. 캬학!]
그리고 벽난로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 드래곤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왕이 서 있었다. 요람 곁에서, 손에 거대한 알을 쥔 채.
‘설마, 저거 드래곤의 알?’
제이드의 뇌리로 어떠한 이야기가 흘러들어 온 건 그때였다.
* * *
부유하고 평화로운 나라의 현명한 왕. 그녀의 유일한 고민은 갓 태어난 아들이 병약하다는 것이었다.
“그대의 유일한 자손은 왕이 되기 전에 죽으리라.”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들을 구하겠노라 백방 노력한 끝에 얻은 예언자의 답이었다.
절망하는 왕에게 예언자는 무어라 속삭이고, 절망하던 왕은…….
[카아아아-!]
예언자의 말대로, 드래곤의 알을 훔쳐 온다.
어미 드래곤은 불처럼 격노했고, 대마수의 분노는 왕국의 재앙으로 돌아왔다.
‘그래서구나.’
제이드는 흘러들어 오는 기억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숲에서의 식인 식물, 늪 마수, 그리고 성을 부수는 드래곤까지.
‘이 던전은 멸망한 왕국의 마지막 하루였던 거야.’
호화로운 침실, 요람 곁의 창문에선 멸망해 가는 나라의 모습이 보인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일까, 아니면 드래곤에 대한 복수심일까, 왕은 천천히 드래곤의 알을 머리 위로 들어 깨부수려는 듯 팔을 휘두른다.
그렇게 알이 바닥에 떨어지려는 순간.
[쿠웨어어……!]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드래곤이 비통히 울부짖었고.
“커헉!”
나는 신음했다.
‘이거 진짜 아프다……!’
본능적으로 드래곤의 알을 구하려 몸을 던졌는데, 하필이면 가슴에 맞아버렸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몸 상태가 메롱한데 드래곤 알의 직격타까지!’
제이드는 눈에 별이 돈다는 게 무슨 기분인지 알게 되었다.
[뭐 하는 짓이냐!]
알을 깨부수려던 왕은 고함을 질렀다. 일그러진 얼굴 속 살의가 생생했다.
하지만.
“님이야말로 뭐 하는 짓이에요?”
제이드는 무시했다.
‘결국, 자업자득이라는 거잖아.’
아이가 죽어가는 거? 마음 아픈 일이지. 그 아이의 입장으로서 부모의 마음이 어떨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아이를 해칠 건 뭐야?’
심지어 왕이면 그냥 부모도 아니다.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할 입장 아닌가.
왕에게 품은 드래곤의 분노는 정당하다. 왕국민 모두를 몰살시키는 것마저 합당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 드래곤도 저 꼴이 된 거겠지만.’
호화로운 침실의 한 구석, 무너진 벽면에 쓰러진 드래곤은 심장이 보일 정도로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저 드래곤은 곧 죽을 것이다.
‘아마 해리스가 막타 날리기 전에 광폭화되어서 겨우 몇 분 정도의 목숨을 구한 거겠지.’
선빵을 맞은 게 드래곤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인간보다 드래곤이 안타까웠다.
제이드는 알을 들어 드래곤에게 내밀었다.
“…….”
샛노란 파충류의 눈이 제이드를, 그리고 알을 향했다. 드래곤의 앞발은 간신히 알에 닿았지만,
[크워어……!]
그와 동시에 드래곤은 운명했다.
[시크릿 퀘스트 <드래곤의 원념을 위로하라>를 달성했습니다!]
“엥?”
그런 게 있었어?
그때였다.
[……죽어.]
칼을 쥔 왕이 읊조린 것은.
살의에 번뜩이는 눈동자가 제이드를 향한 순간이었다.
[죽어버- 커헉!]
왕의 심장이 뒤에서부터 꿰뚫렸다.
그리고 쓰러진 왕의 머리 위로 나타난 것은.
“……제이드!”
간신히 광폭화를 진정하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해리스.
왕까지 사망하며 끝난 던전은 점차 허물어졌고, 무언가를 달성했다느니 축하한다느니 온갖 상태창이 시야를 점령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이 미친 던전에서 등을 그렇게 무방비하게……!”
그런데도.
“해리스 님.”
제이드는 오롯이 무사한 해리스의 모습만이 기쁘고, 안심되었다.
‘내 싸가지 없고 성격도 까칠하며 걱정도 좋은 말로 안 하는 해리스가 돌아왔구나…….’
제이드는 웃으며 말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억지로 붙들던 정신의 끈을 놓았다.
“제이드?!”
상대가 어떤 얼굴로 자신을 보는지도 모른 채.
* * *
“……흐음.”
불꽃처럼 빨갛고 용암처럼 노란 눈. 까맣게 태운 피부와 이민족 특유의 머리를 야생적인 매력으로 소화하는 미남이 턱을 괴었다.
“아~ 젠장, 늦었네요.”
“…….”
“벌써 던전을 해결해 버릴 줄이야. 괜히 여기까지 왔네.”
투덜거리던 보좌는 적발 미남이 자신의 말은 듣지도 않자 어딘가를 뚫어지게 보는 걸 발견했다.
“뭘 그리 보십니까? 또 여자예요?”
“또가 뭐냐.”
“알루카스 님이 집중하는 거면 여자거나 예쁜 여자, 혹은 아주 예쁜 여자 이 셋 중에 하나잖아요.”
“시끄러워.”
“아니에요?”
용병왕, 알루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구름처럼 몽실몽실한 연분홍빛 머리카락. 가냘픈 몸. 자그마하고 어여쁜 얼굴.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였으나, 가뜩이나 미인에 특화된 시력은 신체가 강화되며 더더욱 정교해져 얼핏 이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언제요? 그보다 알루카스 님이 보지 못한 미인도 있습니까?”
“루켄, 아가리.”
“헙.”
용병왕 알루카스의 보좌, 루켄은 과장되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길게 침묵하지 못하고 다시 나불거렸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깝쇼?”
턱을 괴던 알루카스는 검은 머리칼의 청년이 소녀를 안고 사라지자 시선을 떼어냈다.
“직접 만나러 가야지.”
“네에?”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의뢰비만 건지고 돌아갈 순 없다.”
보좌는 입을 쩍 벌리며 놀랐다.
“아니, 알루카스 님. 전 보이지도 않던데 그렇게 예쁩니까? 아니면 가이드입니까?”
그들은 용병이었다. 시간이 돈인 사람들. 한 자리에 용건도 없이 뭉개고 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글쎄, 내 예상으론…….”
알루카스는 두꺼운 몸통과 상반된 소년미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둘 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