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무시하며 제이드는 채집하는 아넬라 무리에게 말했다.
“아넬라, 나 지금 해리스 님께 가 봐야 할 거 같아!”
“갑자기? 어딜…….”
가려고, 하고 물으려던 아넬라는 순간 흠칫했다. 나머지 인원도 마찬가지였다.
쿵-!!
숲의 저편, 높이 보이는 성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대충 알겠습니다, 페드로!”
설명을 들은 아넬라는 페드로를 붙여주었다.
제이드는 자연스레 업히며(병 말기엔 다리를 쓸 수 없어 업히는 게 익숙했다) 물었다.
“나 무겁지 않아?”
“네? 아, 아뇨. 완전 가벼우신데…….”
대략 열여섯 내외로 보이는 소년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의 발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어 숲의 지형이 훅훅 지나갔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제이드는 싱긋 웃었지만, 속은 불안했다.
제한 시간은 1시간. 설명하고 이동하느라 벌써 20분 가까이 지난 상황.
‘제발…… 제발 광폭화만 아니어라.’
차라리 폭주를 해!
제이드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폭주나 광폭화나 그게 그거 아닌가 싶겠지만, <시천귀> 설정에선 좀 달랐다.
특히 해리스는 이능 특성상…….
“……어?”
제이드는 흠칫했다. 페드로가 멈춘 것도 그때였다. 제이드가 놀라 몸을 흠칫 떨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 이건…….”
페드로가 신음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앞에 사람들이 잔뜩 쓰러져 있었다.
질척질척한 진흙 덩어리로 엉망이 된 채.
“쿨럭.”
아, 그리고 살아 있었다.
죽었으면 ‘해리스가 또?!’ 했을 텐데, 생존자가 많아 제이드도 놀란 상태였다.
“페드로, 내릴게.”
제이드는 쑥 내려와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고 쓰러진 사람들, 창백한 얼굴들, 정신이 든 사람들은 진흙 같은 걸 토해내고 있었다.
더럽혀진 플레이트 아머와 무기들. 그사이에 선명히 박힌 고드윈 공작 가의 문양…….
“선대 고드윈 공작 각하께서 보낸 기사단?”
“……!”
쿨럭, 컥.
마구 기침하던 중년 여인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진흙투성이긴 했지만 풀 플레이트 아머에 검까지 쥐고 있는 덩치 큰 여자는 누가 봐도 기사였다.
“누- 쿨럭, 누구십니까? 설마 각하께서 저희를 구제하시겠다고…….”
하지만 제이드는 고드윈 공작이 보낸 사람이냐고 묻기엔 적절해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몽실몽실 허리까지 늘어지고, 하얗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얼굴이 자신을 마주했다.
눈동자는 청량하게 푸르렀고 입술은 앵두처럼 도톰하고 붉었다. 호리호리한 몸과 가느다란 팔다리는…….
‘……요정?’
무의식적으로 멸족한 전설의 존재를 떠올릴 정도로 소녀는 어여뻤다.
사실 제이드도 던전을 구르느라 제법 꾀죄죄한 상태였지만, 그건 진흙투성이인 상대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이 흉악한 던전과 연이 없게 생겼단 말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이렇게 멀쩡히 눈앞에 있다는 건…….
‘……마수인가!’
중년의 기사, 파르나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려던 차였다.
“맞아요, 이렇게 살아 만나 뵈어 다행이에요!”
안도하듯 환하게 웃는 얼굴.
“…….”
파르나가 멈칫한 사이, 제이드는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해리스가 그래도 아군은 안 죽였구나.’
해리스가 정말로 광폭화에 빠지게 되면 눈에 뵈는 거 없이 다 죽인다.
폭주 때처럼 고통스럽고 아파서 통제가 안 되는 게 아니라, 아예 이능에 잡아먹힌 상태라서 인지도 못 한다.
살아 있는 사람, 그것도 고드윈의 사람을 보니 불안하던 마음이 살짝 진정되었다.
“……그러니까, 각하의 손자분께서 저희를 구하러 오셨단 말입니까? 아가씨는 손자님의 가이드고요?”
제이드의 설명을 들은 파르나가 말했다.
“네, 해리스 님은 강력한 이능력자-”
“그래, 그래서였군요!”
파르나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제이드는 파르나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래서, 식인 식물은 간신히 처치했습니다. 그러나 일행 중 하나가 사망하여…….”
퀘스트 달성 실패.
그 대가로 생존한 기사단은 숨도 내쉴 틈 없이 던전의 핵심, ‘시간이 멎은 성’에 떨어졌다.
“……!”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다음 퀘스트가 물 흐르듯 이어졌고.
“실패했습니다.”
파르나는 얼굴의 진흙을 거칠게 닦아내며 말했다.
성은 자고로 방어의 요새이며, 해자가 있게 마련이다. 고요히 멎어 있던 강은 왜인지 고드윈 기사단이 떨어지자 늪으로 차올랐다.
성으로 들어가려면 해자를 넘어서야 하는데, 성벽의 병사들이 길을 내어 줄 리가 없으니, 늪을 지나야 했다.
그러나 늪을 지나려 시도하기도 전에…….
“늪 마수가 나왔군요.”
“네, 심지어 늪지대 주변에 독 안개가 가득 퍼지더군요.”
애초에 기사단은 식인 식물 다넬쿠스를 상대하느라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무거운 무구를 가진 기사들에게 최악의 상성인 늪지대. 거기에 독까지.
기사단은 전멸했다. 그것이 파르나가 늪에 삼켜지기 전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늪 마수가 괴성을 지르더군요. 정신 차려보니 저희는 모두 허공에 떠 있었습니다.”
검은 마력 같은 게 늪지대 전체를 공중으로 떠올렸다. 압사할 정도로 가득하던 늪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파르나가 투구를 벗어 시야를 확보하려 했을 땐 늪 마수의 목이 잘려 죽은 뒤였다.
“아무래도 그 늪 마수가 본디 해자에 살던 물고기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 성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해자가 썩고 물고기도 늪 마수로 타락해 버린 거겠지요.”
그리고 그 마수를 죽인 것은…….
“흑발의 키가 크고 기골이 단단한 청년이었습니다.”
해리스다.
이 안에, 해리스가 있다. 제이드는 막막히 성을 올려다보았다.
“확인한 건 뒷모습뿐이었고, 저희가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 전에 성으로 들어가 버리셔서…….”
“네, 아무래도 해리스 님인 거 같아요.”
“역시, 범상찮은 인물이라 짐작했습니다. 과연 고드윈의 혈족……!”
아무래도 선대 공작은 꽤 좋은 상사였는지 ‘고드윈’이라는 이름에 파르나는 의심 없이 내 말을 수용했다.
“어? 그런데 각하의 손자는 고성에 와병 중이라 들었는데…….”
“다 나으셨어요. 그리고 이제 각하의 인정을 받아 여러분을 구하러 오셨죠. 페드로!”
필요한 정보는 다 들었다. 제이드는 일어나 페드로에게 말했다.
“부상자가 많으니 아넬라에게 가서 치료를 도와달라고 해줘. 파르나, 당신은 부상자를 분류해 줘요.”
죽었다 깨어난 저들이 안타깝긴 하지만 벌써 29분이나 흘렀다!
퀘스트로 인해 모두의 목숨을 책임지게 된 제이드는 재빨리 말하고 와다다 성안으로 달려갔다.
“잠깐, 그 안은 위험해요!”
“아무리 가이드라도……!”
다급한 말림을 뒤에서 이어졌지만, 제이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큰일, 큰일이다.’
독 안개도 없고 늪지대도 사라졌다.
이는 해리스의 이능이 가진 특성 중 하나다.
공허(void).
「삼키고 삼켜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공허로다.」
이름부터 위험천만해 보이는 이 이능은 놀랍게도 살아 있는 마수다.
‘정확히는, 고대 마수.’
<시천귀>의 작중 배경은 람서스 제국.
그리고 판타지 세계의 제국은 자고로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최종 보스와 그를 해치운 용사들이 건국하게 마련이다.
거기서 ‘공허’의 역할은 바로 최종 보스였다.
온갖 마물을 죽이고 최종 보스에게 도달한 용사들이지만, 끝내 공허를 소멸시키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러나 용사들은 끝내 포기하지 않고, 결국 공허가 다시는 인세에 부활하지 못하도록 봉인하는 데 성공한다.
애초에 ‘공허’는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사악한 의도로 재림한 마수가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을 죽음으로 삼켜 버리는 것이 그 마수의 존재 가치였을 뿐.
무수히 많은 생명을 집어삼킨 공허가 봉인되었다 한들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다섯 용사 중 하나, 고드윈이 ‘공허’의 영원한 문지기가 되겠노라 선언하며 봉인된 터 위에 저택을 세웠다.
그에 감동한 다른 용사들도 언제든 위기를 대비하여 그 주변에 살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렇게 제국이 생겨 버렸다는 거지.’
공허가 묻힌 곳이 바로 수도랍니다, 여러분. 님들 마세권이에요.
아무튼, 대충 감 잡았겠지만 해리스가 1차 각성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울부짖던 감옥이 바로…… 그 공허가 봉인된 바로 위였다…….
‘그리고 약해진 봉인을 틈타, 공허가 해리스를 삼켰지.’
그러나 해리스는 <시천귀>의 선택받은 주연답게 공허에 삼켜져 죽지 않고, 되레 역으로 공허를 흡수해 버린다.
‘죽기 싫다는 생존 본능의 발악과 수백 년의 봉인으로 약해진 공허의 합작, 이라 했지.’
나약해진 공허는 해리스의 일부가 되어 미쳐 날뛰는 그의 마력과 각성 열을 삼켰다.
놀랍게도, 생명을 삼켜 죽음으로 이끄는 공허가 죽어가던 해리스를 살려준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아악-!’
하지만 어린 해리스의 육신은 공허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그 뒤 고드윈 저택에 폭발적 사고가 일어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쓰레기 노먼 고드윈이 우리 해리스를 고성의 지하 감옥에 감금하고 억제구를 채우기 전 스토리다.
‘우리 해리스, 정말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대단해…….’
정말 눈물 나게 슬프고 마음 아픈 이야기지만, 지금 포인트는 그게 아니라 해리스가 지금껏 자신의 이능 ‘공허’를 제대로 써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이다.
공허는 대단히, 매우, 아주 많이, 엄청나게 위험한 힘이다. 그리고 그런 힘은 대체로 컨트롤하기 어렵다.
‘그에 비하면, 여태껏 해리스가 쓰던 검은 마력은 사실 그의 이능이 가진 본질적인 힘에 발끝도 못 가지.’
그리고 지금, 제이드는 성 곳곳을 뛰어다니며 확인했다.
파괴와 죽음의 현장임에도 시체의 수가 적고, 검은 흔적이 흉포한 궤적을 그리며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을.
‘……해리스가 공허의 이능을 개방했어.’
시체를 봤다는 충격과 끔찍함은 그 사실에 압도되어 날아갔다.
사람이 재앙을 맞이하면 감정이 소거되어 무감각해진다던데, 딱 그런 기분…….
“……?!”
고개가 자연스레 돌아갔다. 어떠한 인력이 자신을 인도하듯 시선을 이끌었다.
“제이드.”
나른하게 녹아내린 목소리. 어느덧 붉은 두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이제 왔어?”
늦었잖아.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