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내 아들, 해리스를 부탁하오.’
당시 엘레아스 황녀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혼이었다. 아이는 무슨 임신 여부조차 불확실한 상황.
그런데도 황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들이 ‘해리스’라는 이름을 받으리라는 것을.
엘레아스 황녀는 세 가지 소문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황녀를 처음 본 순간, 선대 공작은 소문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약속, 꼭 기억해 주길 바라오.’
당장에라도 귀에 울려 올 듯한, 우아하면서도 독특한 울림의 목소리.
기다란 흑발은 어둠을 베어 만든 늘어뜨린 듯 고혹적이었고, 하얀 피부는 달처럼 빛났다.
섬세한 이목구비는 신이 손수 조각한 석상처럼 아름다워, 넋 놓고 응시하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달의 여신이 헌신했다는 떠들썩한 소문이 과장은 아니었지.’
과연 대단한 절세미인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선대 공작의 기억에 선명히 남은 것은 황녀의 눈이었다.
기묘하게 빛나던 주홍빛 눈동자.
‘저런 눈을 가진 이는 오래 살지 못한다.’
늙은이의 직감이었다.
선대 공작의 예감대로 엘레아스 황녀는 단명했다.
엘레아스 황녀는 개국 공신 가문 출신의 황후, 플로엘라의 유일한 자식이었고 황제의 유일한 적통이었다.
플로엘라 황후와 선황제의 개인 가산까지 더해진 덕분에, 엘레아스 황녀는 시집가기도 전부터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거부로 유명했다.
그리고 황녀의 유언에 따라, 그 엄청난 부는 모두 어린 해리스에게 상속되었다.
선대 공작은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해리스 님이 아직 어린 것을 걱정하여, 황녀께서 임의 대리인을 지정하셨습니다.’
그 임의 대리인으로, 희대의 로맨스를 펼쳤던 남편이 아닌 결혼식에조차 참석하지 않은 시아버지를 정하기 전까진.
‘미친 건가?’
선대 공작은 당황하다 못해 황당했다.
그 대단한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을 두고, 그 로맨스를 막아서던 악역 시아버지한테 이런 요구를 해?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건 아들, 노먼이었다.
‘저는 부인의 뜻을 따릅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장례식의 날.
당장에라도 목을 매고 자살하고 싶다는 얼굴로, 노먼은 자신에게 고개를 숙였다.
노골적으로 남편을 배척하는 유서인데도 아무런 항의 없이 따른 것이다.
유산이고 뭐고 필요 없이 아내를 뒤따라가고 싶은 듯한 얼굴을 보며, 선대 공작은 깨달았다.
‘둘 다 정상이 아니야.’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더욱 통렬하게 말이다.
황녀와 아들, 두 사람의 관계는 기묘했다. 일반적인 부부 관계 특유의 농밀한 애정도, 계약 부부 특유의 건조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좀 더, 광기에 가까운…….’
선대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미친 것들은 본디 이해할 수 없다.
더 생각하기를 포기한 그는 어쩔 수 없이 임의 대리인의 자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모든 것을 그저 애물단지처럼 보관해 두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 많은 유산을 두고, 굳이 가시밭길을 택하다니.’
이제 겨우 지옥에서 풀려난 손주가 다시 던전행을 택했다.
무정한 할애비의 인정을 받아, 자신이 잃었던 후계권을 쟁탈하기 위하여.
“…….”
대체 그 아이는 누구를 닮은 걸까.
예언의 사제처럼 무감한 얼굴의 황녀인가, 그 사제를 광신도처럼 숭배하던 제 아들인가.
‘적어도 잘난 외모 하나만큼은 황녀를 쏙 빼닮았군.’
처음엔 기세에 놀라 잊었지만, 다시 마주했을 때 깨달았다. 해리스의 빼어난 용모는 친모의 영향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선대 공작의 심경을 더욱 복잡하게 했다.
‘어쩌면, 그 기묘하던 광기도…….’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이는 선대 공작이 마음이 복잡할 때의 무의식적인 습관이었다.
레디안 백작은 조용히 그 앞에 다과를 준비했다. 상념에 빠져있던 선대 공작은 그윽한 차의 향에 시선을 돌렸다.
엘레아스 황녀의 눈동자처럼 깊은 다홍빛 홍차. 그 곁의 라즈베리는 건방진 손주의 눈빛처럼 붉었다.
그리고…….
“마카롱?”
단내가 풍기는 분홍빛 마카롱. 단 것을 즐겨 하지 않는 선대 공작으로서는 생소한 다과였다.
자신의 입맛을 누구보다 잘 아는 보좌관이 이런 것을 가져오다니.
“웬 것이냐?”
레디안 백작은 선대 공작의 눈빛을 알면서도 모른 척 웃는 낯으로 말했다.
“최근 요리장이 디저트류에 열심이더군요. 제가 맛보아도 나쁘지 않아 각하께도 올려보았습니다.”
선대 공작은 단맛을 즐기지 않는다. 당연히 고드윈 본성의 요리사는 최고 고용주의 입맛에 맞춘 실력을 키워왔다.
그런 요리사가 갑작스레 디저트에 열을 올리다니.
‘그 아이 때문이군.’
제이드.
그 이름 뒤로 따라오는 것은 별처럼 반짝이는 파란 눈과 솜사탕같이 몽글몽글한 연분홍빛 머리카락.
배시시 웃는 사랑스러운 얼굴이 명랑한 목소리와 겹쳐졌다.
‘각하, 다녀올게요!’
던전을 향하는 새벽 마차를 타기 전.
문득 돌아본 제이드는 귀신같이 자신을 알아보고 손을 크게 저었다.
그리고 해리스까지 잡아당겨 인사하게 했다.
‘해리스 님! 저희 배웅하시느라 지금까지 못 주무셨나 봐요!’
살다 보니 하루쯤 나이 들어서 잘 안 하던 새벽까지 철야할 일도 생기고, 그러다 보면 우연히 창문 바깥을 내려다볼 일도 생긴다. 눈에도 휴식이 필요하니까.
‘흥, 내가 배웅 따윌 왜 해?’
그저 시간과 공간의 타이밍이 잘못 맞아떨어진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데, 어쩌다 보니 걱정하듯 내려다보게 된 꼴이 되었다.
‘걱정 마세요~ 금방 돌아올게요!’
꾸벅, 마지못해 고개 숙이는 게 다인 해리스와 달리 제이드는 곰살맞게 인사말까지 하고 떠났다.
‘맹랑한 것.’
금방 돌아오긴 뭘 돌아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소식 하나 없는 것이.
선대 공작의 미간에 금이 갔다.
본래라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아서도 안 될 신분의 아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선대 공작은 시선을 허락하다 못해 독대까지 나누었다.
‘각하, 전 괜찮으니 용서해 주세요.’
‘우습군. 너 같은 하찮은 것이 베푸는 자비는 너를 짓밟게 할 뿐이다.’
자신의 말에 제이드는 ‘누가 혈연 아니랄까 봐 똑같은 소리 하네……’ 하고 꿍얼거리더니,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었다.
‘그럼 제가 짓밟히지 않고, 잘 지내는 꼴을 보여드리면 되는 거죠?’
‘그리고 정말로 해냈지.’
선대 공작은 픽 웃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감히 자신 앞에서도 제 할 말 다 하고 헤헤 웃는 애가 한낱 사용인을 못 상대하겠는가.
“단 걸 좋아하다니, 생긴 것다운 입맛이군.”
“생긴 것답다고요?”
“분홍과 파랑, 솜사탕이 생각나는 색감 아닌가. 그 하찮은 것은.”
그리 말하면서도 선대 공작은 마카롱에 손을 뻗었다.
“……윽.”
설탕을 퍼부은 듯한 끔찍한 단맛에 곧장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레디안 백작은 딱 좋은 온도의 홍차를 건네며 말했다.
“해리스 님의 가이드가 먹고 싶다 노래를 불렀다는데, 요리사가 최근에나 성공해 정작 먹어 보진 못했다더군요.”
이딴 것을 먹고 싶어 하다니.
씁쓸한 홍차로 입을 씻어 겨우 풀어졌던 선대 공작의 얼굴은 다시 찌푸렸다.
‘……그 정도로 힘겹게 살아왔다던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고귀한 적통 황녀와 고드윈 공작 사이에서 난 하나뿐인 적자다.
그토록 귀한 혈통인데, 어쨌거나 자신의 친손자인데.
‘그런 해리스가, 밥이 없어 굶었다니……!’
선대 공작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자신이 아무리 탐탁지 않게 여기는 손자라도, 어딜 감히 고드윈의 핏줄을 굶기는가!
‘비천한 것들이 감히.’
해리스가 고성의 사용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탈출했다는 보고에, 선대 공작은 그의 성정이 지나치게 잔혹하다 여겼었다.
후계자가 되지 못한 것은 그 잔악한 성품 때문일 거라고도.
하지만 지금은.
‘단숨에 죽여주다니, 참으로 자비롭군.’
자신이라면 떼로 가둬 굶겨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파리 날리는 시체가 되었을 때 모조리 불태워 뼛가루조차 남기지 않았겠지.
“요리사가 돌아오면 반드시 먹이겠다고…….”
“……그놈을 불러라.”
“예?”
“용병왕 말이다. 미리 의뢰하기로 했던 그놈.”
레디안 백작의 눈이 커졌다. 선대 공작은 얼굴을 가리듯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놈이 던전에 자신 있다 하니, 한 번 보내 봐.”
“……큼, 예.”
유능한 보좌관은 웃지 않으려 애쓰며 답했다.
“미리 연락을 취해 두었으니 금방 도착할 겁니다.”
선대 공작은 감히 보좌관이 허락도 없이 먼저 연락한 것에 분개해 언성을 높였다.
“그놈을 위해서가 아니다!”
쾅! 주먹으로 새로 바꾼 책상을 내려친 선대 공작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세간에 떠들썩한 그 용병왕 놈이 S급이라는 이름값을 하는지 확인하려는 것뿐이야!”
“네, 네. 알고 있습니다. 이능력자 세력의 현황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요.”
레디안 백작은 입 안의 살을 꾹 씹으며 물었다.
“혹시 모르니 그자에게 해리스 님의 인상착의를 전해도 될까요?”
던전의 해결 여부와 관계없이, 위험에 빠지면 최우선적으로 구해 내자는 뜻이다.
선대 공작은 한참이고 말을 하지 않다가, 나중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 그 아이도 같이 전해라.”
그리고 못마땅하다는 듯 덧붙이다 투덜거렸다.
“약해빠진 게 거기가 어디라고 끼어들어? 해리스, 그놈도 참…….”
레디안 백작은 대답하지 못했다. 부들거리는 입술이 당장에라도 터지려는 걸 참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선대 공작은 불만을 이어갔다.
“아무리 제 가이드라 오냐오냐해도 그렇지, 그런 데 가겠다 고집하는 것까지 들어주면 어쩌자는 게야?”
척 봐도 무기 하나 제대로 못 쥐고 엉엉 울게 생겼는데.
공작은 그렇게 투덜거리다 자신도 모르게 분홍색 마카롱을 집어 입에 넣었다.
으윽.
“……이건 더 잘 만들어 보라고 하고! 이렇게 달기만 해서 쓰겠느냐!”
백작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