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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29화 (29/119)

29화

“해리스!”

내 이능력자 어딨어!

해리스를 찾느라 바빠서, 나는 아넬라가 인류애 정신을 발휘해 수풀 속에서 바들바들 떠는 나체의 여인에게 다가서는 걸 보지 못했다.

“흐흡……, 정말인가요?”

나체나 다름없는 꼴의 여인은 다가오는 아넬라를 발견하자 크게 안도하며 하얀 팔을 뻗었다.

“도와주세요, 제발…….”

그러나 천천히 아넬라를 올려다보는, 물기에 젖은 촉촉한 눈동자에는…….

“아넬라! 물러나-!”

흰자가 없었다.

“아악!”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아넬라는 어디선가 나온 넝쿨 줄기에 몸이 감겼다.

[캬아아악-!]

살려달라 울먹이던 여인의 입이 얼굴 절반을 가르듯 길고 시뻘겋게 찢어졌다.

힘없이 쓰러져 있던 것만 같던 몸뚱이는 뱀의 머리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흰 부분은 순식간에 머리 위로 솟아오르고, 커다랗게 찢어진 아구창에는 날카로운 이빨 수십 개가 가득 박혀 있었다.

‘마, 마수다!’

딱히 누가 설명 안 해줘도 알 수 있는 이 흉악한 비주얼! 네가 바로 던전의 문지기 마수구나!

이 상황만으로도 끔찍한데 문제는 더 있었다.

“으악, 으아악-!”

잡힌 것은 아넬라 하나만이 아니었다.

“사, 살려줘!”

“꺄아악……!”

그녀를 따라온 일행들도 모두 바닥을 뚫고 나온 나무 넝쿨에 잡혀 허공에 들어 올려진 상태였다.

‘미, 미친-!’

사방에서 내지르는 비명. 쨍쨍하던 하늘 위로 드리워지는 기다랗고 불길한 그림자들.

“해, 해리스 님……?”

지금이라도 나타나!

나는 이 미친 던전 속 내 유일한 동아줄을 간절히 불렀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눈앞에 당장에라도 나를 산 채로 뜯어 먹을 마수가 나타났으며, 불행히도 지금은 그 마수들을 쓸어버릴, 우리의 빛과 소금인 해리스가 사라졌다는 것을!

‘이런 젠장!’

설마 밸런스 조정한다고 해리스랑 우리를 떨궈놓은 건 아니겠지?!

공포로 굳어진 얼굴 위로 시스템의 알림이 나타났다.

[<식인 식물, ‘다넬쿠스’를 처치하시오>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조건: 파티원 전원 생존

-보상: 잠금 된 스탯 일부 해제 외 기타

-페널티: 사망

“뭐?”

퀘스트라니, 지금 나보고 이 사태를 해결하라고?

‘자, 잠깐만요. 이거 상대가 잘못된 거 아냐?’

이런 퀘스트 같은 건 해리스라든가 해리스, 그리고 해리스 같은 S급 이능력자한테나 시킬 일이잖아!

‘그걸 왜 나한테? 나 개쩌리 엑스트라거든!’

심지어 가이드(추정)라고! 계열, 아니 직종이 다르단 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더 패닉할 시간은 없었다.

[하아악……!]

쩌억- 커다란 아가리가 아넬라를 향해 벌어졌기 때문이다.

“꺄악! 으악! 꺼져, 이 괴물 새끼야!”

아넬라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몸통이 줄기에 결박된 상태라 소용이 없었다.

시뻘건 혀와 뾰족뾰족한 이빨로 가득한 대가리가 아넬라를 산 채로 삼키려는 듯 하강했다.

‘시☆!’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장 잡히는 물건을 마수에게 던졌다.

그때였다.

[스킬 ‘???’이 활성화됩니다.]

* * *

스킬?

‘나한테 스킬도 있었어?’

더 의문을 가지기도 전이었다,

퍽! 쨍그랑-!

마수의 머리통에 제이드가 던진 물건이 적중한 것은.

“예스!”

제이드는 주먹을 쥐었다.

던진 것은 아넬라에게 미리 준비해달라 요청한 화염병이었다. 화염병 깨지며 조각 사이사이로 액체가 흩뿌려졌다.

하지만.

‘앗차, 불을 붙이는 걸 깜빡했다!’

정작 화염병의 궁극적인 목적, ‘화염’을 놓친 기름 유리병 공격이 다였다.

“크아아!”

다행히 아넬라를 잡아먹으려던 마수는 유리병에 정통으로 맞은 걸로 모자라 부서진 조각들이 입 안을 마구 헤집자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허억, 헉…….”

그리고 하마터면 잡아먹힐 뻔한 아넬라는.

“죽어, 이 괴물 새끼!”

제이드가 만들어 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곧장 움직였다. 어디선가 마법 스크롤을 꺼내더니 마수의 아가리를 향해 찢은 것이다.

‘확실히 제 살길은 어떻게든 찾는 여자야.’

처음에도 그랬지. 한결같은 뚝심에 제이드는 감탄했다.

찌익- 화르륵!

찢긴 마법 스크롤에서 얼굴만 한 불꽃의 구가 생성되더니 곧바로 식인 식물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갔다.

불꽃의 구는 괴물 여인의 머리를 흠뻑 적신 액체, 기름의 영역에 닿자마자 널따랗게 번졌다.

[크아아악-!!]

한층 강렬해진 고통에 식물계 마수는 갈라진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쿵!

동시에 아넬라를 묶고 있던 넝쿨이 힘을 잃었고, 아넬라는 곧장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넬라!”

“제, 쿨럭, 제이드 님!”

바닥에 떨어진 아넬라는 새파래진 얼굴로 외쳤다.

“어서 도망치세요!”

마수에게 잡혀있느라 정신이 없던 아넬라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 눈에 보이는 것은 급작스럽게 나타난 강력한 마수와, 그런 마수에게서 자신들을 지켜주긴커녕 사라진 S급 이능력자. 그리고 제이드 하나였다.

‘그 썩을 새끼가……!’

죽을 뻔한 위기는 아넬라의 추리를 극단적으로 만들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이런 위험천만한 언노운 던전에 제이드같이 가냘픈 소녀를 데려온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아무리 가이드라도 너무하잖아.’

근데 이제는 버리고 가?! 그리도 애지중지하더니 다 구라였나!

당장 돌아가라는 해리스를 씹은 게 제이드라는 걸 모르는 상황에선 자연스러운 추리였다.

‘무, 물론 저 가이드 소녀가 나를 끌고 왔다는 점에서 만만찮은 애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당장 보이는 것은 연약해 보이는 소녀였다. 깜빡이지도 못한 채 커다래진 푸른 눈과 바들바들 떨리는 가녀린 몸…….

‘……극도의 공포 앞에 압도당해 버린 거야.’

산속 짐승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두려움을 느끼는 게 사람이다.

그런데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가이드가 던전의 식인 마수 앞에선 어떻겠는가!

‘미쳤어, 진짜 돌았다고!’

아넬라는 자리에 없는 새끼(해리스)를 속으로 욕했다.

“아넬라!”

게다가 아무래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화염병을 던진 것도 제이드 같았다.

‘저 얇은 팔로…….’

비록 최후의 마무리는 자신이 했다지만, 그래도 제이드가 화염병을 던져 여유를 벌어주지 않았다면 스크롤을 꺼내지도 못했겠지.

처음 보이는 여인에게도 나체라는 이유로 동정심을 보였던 아넬라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인류애 정신을 긁어모아 외쳤다.

“여, 여긴 위험합니다! 어서 혼자라도 도망-”

“빨리 내 뒤에 숨어, 얼릉!”

“-가세요, 네?”

뭐라고요? 하고 묻기도 전이었다. 아넬라는 제이드의 손에 들린 커다란 장총을 발견했다.

‘어?’

설마, 저 식인 마수를 라이플로 쏴 쓰러트리겠다고? 아넬라는 믿기 어려웠다.

그야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조합이니까!

저 가느다란 손목 좀 보아라. 라이플을 쏘기는커녕 쥐는 것조차 어려워 보이는데…….

“……아?”

아넬라는 입을 벌렸다.

당장 라이플을 떨굴 것 같던 가느다란 손목은 사격의 정석과도 같은 자세를 취하더니, 곧장 마수의 대가리를 향해 쏘았다.

타앙-!

호쾌한 격발음.

퍼억! 피와 살이 터져 오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보지 않아도 명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넬라는 잠시 멍해졌다.

‘아, 아냐. 그래도 저런 일반 총으로 마수를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해.’

마수는 핵이 파괴되면 소멸한다.

간단한 원리지만 일단 마수의 핵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을 마도구도 아닌 일반 라이플로 쏴서 단발에 파괴하는 건 아예 불가능에 가까웠다.

‘단번에 마수의 코어를 명중시켜도 박살 낼까 말까인데.’

그러니까 설사 제이드가 세상에 다시 없을 명사수라도, 저 한 방으로 마수를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

[크웨어어어-!]

이전과 확연히 다른, 귀를 찢을 듯 강렬하게 울리는 마수의 절규.

쿵-!!

순간 지진인가 싶을 정도로 커다란 진동.

자신을 산 채로 뜯어먹으려던 마수가 쓰러졌다.

“쿨럭, 컥-”

“사, 살았다. 살았어……!”

그와 동시에 넝쿨에 잡혀있던 자신의 일행들도.

“……?”

아넬라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제이드를 보았다. 아니, 원래는 불가능한데?

“하아, 하…….”

그리고 마수를 쓰러뜨린 당사자, 제이드는 헐떡이고 있었다.

[식인 식물, ‘다넬쿠스’를 처치했습니다!]

내가 진짜 해내다니. 제이드는 그 사실만으로도 몹시 놀랐지만, 가장 놀랐던 것은.

‘보였어.’

총구를 겨냥한 순간, 마수의 코어가 어디 있는지 보였다.

불에 타 녹아내리던 마수의 피부 속, 형광펜으로 칠한 것처럼 선명하게.

‘이게 그 스킬이라는 건가?’

자신의 백발백중 실력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살과 피부 아래에 위치한 코어를 인지하고, 그게 부서지는 순간까지 또렷하게 보이다니…….

“……햐.”

흥분으로 날뛴 심장이 갈비뼈를 거세게 때렸다. 내쉬는 호흡은 지나치게 뜨거워 목이 탔다.

“무섭다…….”

아넬라는 달아오른 얼굴로 헐떡이는 제이드를 안쓰럽게 보았다.

그래, 죽기 살기로 마수를 잡았으니 무척이나 무서웠겠…….

“귀엽고 깜찍한 이 절세 미모만으로도 모자라, 이런 미친 사격 솜씨까지 갖췄다니.”

“……?”

아넬라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이 몸의 가능성이 정말 무섭다, 무서워. 안 그래도 멋진데 이렇게 치명적인 매력까지 갖추면 어쩌자고~!”

“네?”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 제이드를 보며 아넬라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설마 이 상황에서 자아도취에 빠진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럴 리가.

아넬라가 제 귀를 의심하는 동안 제이드도 자기 눈을 의심했다.

[식인 식물 ‘다넬쿠스’ 처치 (1/20)]

‘20?’

치명적인 매력의 제이드는 잠시 정신이 로그아웃되는 경험을 했다.

“자, 잠시만. 설마 이 미친 마수가 19마리나 더 남았다는 거……?”

거짓말이지?

그러나 제이드가 물어보기도 전에 지면이 뚫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드드득-!

그에 화답하듯 사방에서 마수의 울음소리가 울려왔다.

[크어어!]

[쿠에에엑!]

방금 죽인 것과 똑같은, 거대한 식인 마수의 그림자들이 그들 위로 내려앉았다.

“…….”

“…….”

망연히 위를 올려다보며,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생각했다.

망했다.

* * *

입 안에 녹아버린 달콤함 뒤에는 씁쓸함이 남았다. 해리스는 혀로 입안을 핥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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