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아~ 이거 난감하네.’
곁에 앉아 있기만 해도 전해지는 오라가 나를 콕콕 쑤셔오는 듯했다. 이 불편한 공기가 정말이지 숨 막혔다.
숲을 가로지르는 마차 안.
난 덜컹거리는 진동에 몸을 맡기다 말했다.
“큼, 곧 던전 앞에 도착한다네요. 이번 언노운 던전은 특정한 입구가 있다기보단 안개가 자욱해서…….”
“나도 알아.”
“아, 예.”
불퉁한 목소리. 띠꺼운 태도. 불만 가득한. 당장에라도 화를 쏟아낼 것 같은 표정.
‘참아줘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해리스 정도의 이능력자가 내뱉는 분노는 일반적인 사람들에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버겁다.
보통이라면 곁에 붙어 있지 못하고 도망쳐 버리겠지.
‘땡큐, 공포 저항.’
아직 도망가지 않은 나도 썩 마음 좋진 않았다.
“해리스 님, 아무리 그러셔도 전 절대 이번 던전행에 빠질 수 없어요.”
“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니까. 일단은 플랜 B를 위한 대책 마련이 첫째요, 둘째는…….
“해리스 님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너나 잘해.”
끝끝내 잘 참고 있던 해리스가 으르렁거렸다.
“지금 네가 날 걱정할 때야?”
“응? 걱정해야죠, 이제 전 해리스 님의 반려 가이드잖아요.”
“…….”
물론 해리스는 S급 이능력자. 작중에서 초월자라 불릴 정도의 손꼽히는 강자다.
‘하지만 그건 2년 뒤의 이야기잖아~!’
그것도 에이드리안의 도움을 받아 강력해진 <시천귀>에서의 모먼트다.
한마디로 에이드리안도 없고 2년이나 빨리 나온 해리스는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걱정이야, 걱정.”
“……너나 잘해.”
내 중얼거림에 날카롭던 해리스의 눈매가 걱정스럽다는 듯 허물어졌다.
“누가 누굴 걱정한다고.”
좋은 쪽은 아니었다. 내 정신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다는, 그런 류의 걱정.
‘아니, 이보쇼.’
내가 푼 예지가 얼만데, 그걸로 탈옥까지 했으면서 사람 그렇게 불신 가득한 눈으로 보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
‘하긴, 해리스는 아직도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예언자’라는 말은 안 믿으니까.’
정말로 내 말을 믿었다면, 해리스는 물었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왔다는 다른 세계는 어디인지, 그리고 내가 알고 있다는 자신의 미래는 무엇이며, 앞으로의 예지는 무엇이 남았는지…….
‘하지만 해리스는 오늘까지도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
괜한 말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듯이. 혹은 내 모든 말을 정신병 과다 망상이라고 치부하는 것처럼.
‘뭐, 별수 없지.’
천하의 에이드리안마저도 2년은 구르고 나서야 믿음을 얻어냈다.
나야 뭐, 이제 한 달 반은 넘었나? 아직 한참 남았군.
‘쳇, 내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게 얼만데.’
물론 플랜A ‘해리스 공작 만들어서 황제의 해주석 훔치기’를 위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잘 생각해라, 제이드.”
해리스는 으르렁거림을 참듯 내뱉었다.
“내 반려 가이드가 되기로 했으면 던전 같은 위험한 곳에 발 들이밀어야 할지, 안전한 곳에 처박혀 내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야 할지.”
“에이~ 제가 해리스 님 곁 아니면 어디가 안전하겠어요?”
나는 찡긋 윙크를 날렸다. 해리스는 미간을 굳히더니 시선을 돌렸다.
아니, 이보쇼.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내가 애교를 부리면 넘어가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떼잉, 호감도 올리기 쉽지 않네.’
* * *
‘이해가 안 돼.’
덜컹거리는 짐마차, 숲의 어두운 초록빛 그림자 아래에 화사한 분홍색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하얀 얼굴에 빛 조각이 스쳤다.
커다랗고 새파란 눈동자, 길고 촘촘한 속눈썹, 뼈대부터 가늘어 작고 가냘프게 보이는 몸.
그 누가 알까. 저 소녀가 귀하게 자란 공주님이 아니라, 일회용 목숨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의복과 공간이 달라졌을 뿐인데 어느덧 이렇게 바뀌었다.
그럼 정말로 귀한 공주님처럼 안락하게 지내면 될 것 아닌가.
‘왜 사서 위험을 자초하냐고.’
제 목숨 아낄 줄 모르는 건가?
해리스의 붉은 눈이 제이드가 품에 안은 장총과 탄띠에 닿았다. 가냘픈 몸에 안긴 무기는 부자연스러웠다.
“아, 제이드 님.”
제이드 곁에 앉은 하녀 하나가 그녀의 귀에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그러나 날카로워진 해리스의 청각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머리, 흐트러지셨어요. 다시 묶어드릴까요?”
“아, 그럼 좋지. 고마웡.”
태평하게 웃던 제이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녀의 무릎에다 머리를 내려놓았다.
“……!”
관심 없다는 듯, 시선조차 주지 않던 해리스의 손이 작게 움찔했다.
머리, 얼굴, 그리고 목.
모두 대단히 연약한 부위다. 치명상을 안길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하녀가 꺼내든 작은 빗도, 머리핀도, 잘만 힘을 준다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안구를 공격하고 시야가 막힌 뒤 목을 찌르면 되니까.
경험담이었다.
다행히 불발되었지만, 어린 시절의 그 날 이후로 해리스는 일정 거리 내에 누군가 다가오는 것 자체에 민감해졌다.
그렇다 한들 딱히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누구도 그에게 다가서려 하지 않았다는 것도 있지만, 그 뒤엔 지하 감옥에 죄수처럼 갇히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 어떻게 할까요~?”
“음, 메이 마음대로 해. 네 안목을 믿어.”
제이드는 눈을 감고 웅얼거렸고, 메이라 불린 하녀는 작게 웃더니 결 좋은 연분홍 곱슬머리를 빗었다.
숲의 그림자 사이로 내려앉은 빛의 조각이 기다랗게 늘어진 벚꽃잎 색의 실타래에 닿았다.
위험에 빠지기 전, 평화롭고 느긋한 광경일 터다. 그러나 해리스는 반사적으로 등골에 긴장이 섰다.
‘믿어?’
믿긴 뭘 믿어. 믿을 게 따로 있지, 안 지 며칠이나 됐다고 낯선 사람을 믿어!
날카롭게 솟아오른 해리스의 신경은 하녀의 머리 손질이 끝난 뒤에야 진정했다.
“다 됐어?”
“네, 보실래요? 거울이…….”
“아냐, 됐어. 메이가 알아서 예쁘게 잘해줬겠지.”
꺄꺄 웃는 맑은 목소리가 고요한 숲에 퍼진다. 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말이지, 이상했다.
저토록 약한 부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남에게 맡길 수 있는 제이드도, 그런 제이드에게 깔깔 웃으며 다정히 구는 하녀들도.
모든 건 선대 공작과 집무실에서의 일 이후부터였다.
‘송구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선대 공작에게 어떻게 책을 당한 건지, 새파래진 얼굴의 하녀들은 제이드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바닥에 내려찍으며 사죄했다. 그대로 목이라도 메어 죽을 기세였다.
‘알았으면 뒤져야지.’
썩 꺼지고 알아서 뒈지라고 말하려는데.
‘켁, 괜찮으니 어서 일어나요!’
정작 저들에게 굶겨진 제이드가 펄쩍 뛰는 게 아닌가.
‘아닙니다. 저희가 잘못을…….’
‘아니, 설사 잘못이 있어도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야!’
괜찮긴 뭐가 괜찮아! 뭐가 이렇게까지 할 일이 아닌데!
버럭 소리칠 뻔한 것을 해리스는 겨우 막았다.
제이드가 명령했는데 자신이 바로 앞에서 부정하는 건, 제이드의 위신이 상할 일이었으니.
‘……이미 선대 공작에게 처벌은 받은 뒤겠지.’
제이드가 용서한들 다들 쫓겨날 테고, 그것만으로 본성에는 충분한 경고가 될 것이다.
그를 생각해 겨우 참았는데.
‘우왕, 머리 이렇게 하니까 예쁘다.’
‘그쵸? 그냥 풀어헤치는 것도 예쁘지만 이렇게 땋아서 반묶음을 하는 것도…….’
‘거기에 머리띠는 이거 어때요?’
‘오오, 그거 하자, 그거!’
뭘 어떻게 한 건지 제이드는 저들의 불명예 퇴직을 막았고, 정신 차렸을 땐 저렇게 친밀해진 뒤였다.
해리스는 이마를 짚었다.
‘저 바보가…….’
람서스 제국은 신분제가 엄격했다. 자신의 가이드라 한들, 노예 출신이라는 게 들통나면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고 본성에서 내쫓길 수도 있었다.
그를 막기 위해, 해리스는 선대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요구했었다.
‘제 가이드에게 적절한 신분을 원합니다.’
해리스는 자신의 아비를 비롯한 일가친척 모두에게 원한이 있었다. 친할아버지인 선대 공작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핵심 관계자는 아니지.’
그래서 해리스는 양보하기로 했다. 제이드의 치유를 도와주었으니, 신분 문제만 처리하고 떠나기로.
하지만.
‘허락할 수 없다.’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그 뒤 가짜 ‘검은 인어의 눈물’ 사태가 터져 버렸을 때, 해리스가 알은체도 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었다.
X되든가 말든가.
그러나 제이드가 먼저 나서 버렸다.
그리고 잡것들은 제이드에게 도움을 받았음에 감사하긴커녕, 감히 자신의 주인에게 대가 따위를 운운했다며 적의 어린 눈빛을 쏘았다.
‘죽일까.’
살심(殺心)이 피어올랐지만, 제이드가 주도하는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억눌렀다.
선대 공작은 제이드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감히 사용인 따위가 제이드를 굶기다니!
‘진짜 해보자는 건가.’
감옥의 딱딱하고 퍽퍽한 빵에도 다람쥐처럼 함냐함냐 먹던 제이드를 생각하니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제이드가 자비롭게 용서해 줘버렸다.
‘……순한 것도 정도가 있지.’
아니, 그냥 아무 생각 없는 건가.
제이드에게 믿음이라곤 없던 해리스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른 세계에서 온 예언자’ 어쩌구 운운하는 걸 믿는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이런 세세한 부분에서 제이드는 상식이 부족했다.
‘어디 갇혀 지낸 건가?’
마찬가지로 갇혀 지냈던 자신보다도 모자라다니.
어쩔 수 없다. 자신의 가이드니, 뒷수습도 자신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누구 하나 또 불손하게 굴어봐라.’
산 채로 껍질을 벗겨 버리겠다. 죽여 달라고 빌지도 못하게 만들어주지.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