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별것도 아니라니! 제이드, 네가 굶었-!”
“해리스 님도 굶은 적이 허다하시면서 새삼스럽게!”
“…….”
해리스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아무렴 감옥에 수년간 갇혀 있었는데, 삼시 세끼 다 잘 먹었겠냐고.’
그 망할 고성 사용인 놈들이 날짜 하나하나 째깍째깍 잘 챙겨서 제대로 물자를 공급해 줬겠느냔 말이다.
‘툭하면 굶고 끼니 거르는 게 일상이었지.’
그건 <시천귀>의 초반 파트에서 언급되는 일이다.
1인이 먹을 식사마저 제대로 공급해 주지 않아 굶는 게 허다하던 해리스.
내려준 물자마저도 쓰레기 수준의 하급품일 때가 많아, 해리스는 구속구에 손목 발목이 너덜너덜해지는 걸 감내해서라도 사용인들에게 손수 항의(?)를 표하곤 했다.
‘그렇게 된통 당하면 그때는 제대로 물자를 내려보내 주곤 했지.’
다행히 내가 먹은 빵은 먹을 만하고 우유도 안 상한 거였던 걸로 보아 해리스가 항의(?)를 표한 직후의 물자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 문제로 에이드리안도 고난을 겪게 된다. 1인에게도 적합하지 않은 식사가 2인을 감당하겠는가?
‘그래서 에이드리안도 제대로 끼니를 먹지 못하고 굶주리고, 그런 에이드리안에게 먼저 먹을 것을 해리스가 건네주던 순간이 바로 관계의 첫걸음이었지…….’
새삼 내가 사랑하던 브로맨스의 모먼트가 떠오르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흐흡…… 너희는 찐이야.’
자기 먹을 것도 없어 굶주리는데 나눠주는 사이? 그게 우정이면 나는 친구 없어. 신성한 우정의 이름 남용하지 말고 빨리 사랑 인정해라.
“……제이드?”
왜인지 나를 보는 해리스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할 말은 많은데 턱 막혀 버리기라도 한 듯 해리스는 입을 달막거렸다.
문득 깨달았다. 난 그 감동적인 순간을 1열 직관하기는커녕 시작도 전에 쓸어버린 당사자라는 것을!
‘아, 신이시여.’
정녕 제가 제 손으로 최애 주식을 난파시켜 버렸단 말입니까?
급격히 쓸려오는 후회에 눈가는 더욱 젖어갔다. 브로맨스에서 브로조차도 안 남게 생겼다니…….
“……그러니 이런 사소한 걸로 열 내지 마세요.”
지금 그게 문제야? 내 최애 파트가 죄다 날아가 버렸다는 게 문제지.
내 목소리가 슬픔에 젖어 들어갔다.
“…….”
“…….”
양옆에서 표정이 변한 것도 같고, 분위기가 엄청나게 가라앉은 것도 같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내 주식이 난파되다 못해 좌초되었다는데 그게 대순가!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에이드리안 깨우고 만다.’
에이드리안과 해리스는 <진짜>니까 다르게 마주쳐도 반드시 원래의 질척질척하고 애증 가득한 관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응, 확실해. 장담한다. 덕후 인생 21년을 걸지!
“굶는 게, 사소한 일이라고……?”
선대 공작의 목소리가 떨리듯 물어왔다. 나는 촉촉한 눈가를 손등으로 누르며 쿨쩍였다.
“최소한, 킁! 저희에겐 흔한 일입니다.”
서로 다른 이유로 말이다.
나로 말하자면 전생(?)에 희귀병 환자였다 보니 식사 제한은 기본이었고, 각종 검사를 받느라 위를 비우는 것도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엔 음식을 섭취하지도 못했고.’
링거의 영양제로 연명하던 생명. 산소호흡기가 떨어지면 자가 호흡도 불가능한 인생.
‘뭐, 해리스는 나와 전혀 다른 이유로 굶어도 상관없는 몸이 되었던 거지만.’
아무튼, 그렇게 살다 보면 배고픔이나 식사에 대한 열망이 옅어지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나도 여태껏 굶은 걸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단 말이다. 그러니까 해리스도 내내 아무것도 안 먹은 거잖아?
“…….”
한참 말이 없던 선대 공작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묻었다.
“그 일에 대해선, 내가 사용인들을…….”
“아, 하녀 언니들이 고의로 저를 굶겼을 거라곤 저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생살여탈권까지 지닌 최고 상사가 부르니 정신없었던 거겠지. 나를 괴롭히고 말고 할 리가 뭐가 있겠는가? 내가 여기 와서 한 것도 없는데.
‘그리고 만에 하나 정말로 나를 미워해서 저지른 일이라 해도, 이렇게 쉽게 드러날 괴롭힘을 저지를 리가 없지.’
명색이 고드윈 공작 본성의 사용인들인데 말이다.
설사 고의라 한들,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나중에 먹으면 되잖아?
‘식사는 언제든 할 수 있지만, 후계권은 아무 때나 찾을 수 없다고!’
즉, 우린 용건 끝났단 말이다.
나는 해리스의 팔을 당기며 이만 퇴장하자 눈짓했다.
“넌, 정말…….”
할 말 많아 보이던 해리스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켰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더니 선대 공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각하의 대접, 잘 기억해두겠습니다.”
마지막까지 뒤끝은 남겨두고서, 해리스는 그대로 문밖으로 나갔다.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아니, 왜 이런 걸로 저렇게까지 화가 난 거야?’
혹시 뭐 그런 건가.
나를 무시하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종의 체면이 주인의 체면과 같다고 여기는 뭐 그런 신분제 사회의 특성 같은 거?
‘에효. 신분제 사회의 따까리로 살아남기 쉽지 않네.’
고용주의 생각을 읽기가 쉽지 않아.
나는 해리스를 대신해 대충 마무리했다.
“각하, 유념치 마십시오. 해리스 님도 분주히 돌아다니시느라 끼니를 거르셔서 신경이 예민해지신 모양…….”
“……정말이냐?”
“네, 아무렴요. 그러니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 습?!”
니다, 하고 말을 잇기도 전에 선대 공작의 솥뚜껑만 한 손바닥이 나를 붙들었다.
“굶주리는 것이 너희에겐 그토록 허다하고 익숙할 정도로…… 그렇게 힘겹게 살아왔단 말이냐?”
잘게 떨리는 자주색 눈동자.
엄격하던 얼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망연자실해져 있었다.
“…….”
처음, 해리스에게 사과 비스름한 것을 하던 표정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실한 얼굴.
떠오른 건, <시천귀>에서의 장면이었다.
해리스가 얼마나 괴롭고 힘겹게 살아왔는지 깨달은 선대 공작이, 에이드리안을 추궁하던 순간이.
「“그럼 무엇을 기대하셨습니까? 자기 친누이와 아비마저 배반하는 인간이, 자신이 손수 감옥에 처박은 아들에겐 어떻게 굴었을까요?”」
그리고 에이드리안은 가차 없이 쏘아붙인다.
2년간의 감옥 생활로 쌓인 정은 고사하더라도, 그 힘겹던 나날을 개꿀빠는 나태 생활로 취급하는 걸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사 무인도에 조난당했더라도 이보다는 나았을 겁니다. 최소한 거기선 사지가 자유롭고 하늘을 올려다볼 수라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비가 오면 물이 차오르고 더위에 시체가 썩어들어가는 감옥에서 죽지 않기 위해 버텨내는 것뿐이었지요. 언젠가 썩은 빵 쪼가리라도 떨어지길 기다리면서.”」
「“그래요, 저는 고작 2년을 함께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해리스 님은 일생이었지요.”」
「“그리고 그 기나긴 세월에서 그분을 돌아본 가족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
에이드리안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지하 감옥은 배수구가 작아 물이 잘 빠지지 않았고, 암석으로 만들어진 벽과 사방의 쇠창살은 더운 날은 찌듯이 덥고, 추운 날은 얼어버릴 듯 추웠으니.
‘오래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애초에 감옥이니 당연하겠지만…….’
해리스가 S급 이능력자가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하고 죽었겠지. 에이드리안도 2년간 겨우겨우 버텨내지 않았는가.
‘물론 버티기만 한 건 아니고, 그동안 마나 수련을 통해 환골탈태하듯 강해졌지만.’
그렇다 한들 해리스가 겪어야 했던 세월이 보상받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원수 같은 아들의 자식이라 한들, 친손자를 버린 주제에 합리화하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에이드리안이 그러했듯이.’
진실을 알고 후회하고 괴로워해야 해.
“해리스 님께선……,”
내가 홀린 듯 입을 달싹이던 차였다.
꼬르륵-!
뱃고동 소리가 내 입을 멈춰 세운 건.
“…….”
나를 잡던 선대 공작의 손도 멈칫했다. 나는 머쓱히 웃으며 그의 손을 떼어냈다.
“큼! 해리스 님께선, 그분의 일을 이렇게 뒤에서 묻길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
정신 차리자.
나는 에이드리안처럼 2년 동안 해리스와의 우정을 쌓지도, 그의 신뢰를 얻어내지도 못했다.
제 입으로 나를 버리겠다고 말할 정도로.
‘아, 마상.’
히잉, 나는 눈물을 찔끔 삼켰다.
그 순간에는 필사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는데 새삼 마음이 아팠다. 눈가가 다시 촉촉해졌다.
물론 나는 해리스를 안다. 그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걸 알면서 좋아하고 있다.
‘하지만 일방적이지.’
해리스에게 나는 ‘어딘가 수상쩍고 불손한 가이드’일 뿐이다.
어쩔 수 없다. 최소한 2년은 같이 감옥에서 고생하는 최강의 가이드쯤 되어야 브로맨스도 찍는 거지, 나 같은 쭈구리 엑스트라는 그런 거 못 한다고.
‘나 따윈 해리스 눈에 차지도 않을 거야.’
주제넘게 주인공처럼 굴지 말자. 친한 척도 선을 지켜야지.
나는 젖은 눈을 가리듯 방긋 웃었다.
“가족의 일은 직접 물어 들으시는 게 좋잖아요?”
제발, 잊지 말아요. 해리스는 당신 손자야.
지금이라도 아껴줘.
“…….”
내 뜻이 전해졌을까? 노쇠한 공작은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그럼 각하,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위엄 있는 얼굴에 후회와 죄책감과 같은 감정들이 깃들었으나, 그를 마주할 대상은 내가 아니었기에.
“……뭐 하느라 이제 나와?”
집무실을 나오자마자 보인 건 문밖에 서 있던 해리스였다. 그 날카로운 눈매를 보자 새삼 실감했다.
우리가 상대의 아픈 과거와 치부를 밝혀도 좋을 정도의 관계?
절대 아니죠. 나한텐 한참 무리죠. 쪼렙은 알아서 짜져야죠. 가짜 가이드라는 거 밝혀져도 뒤지지 않는 게 최선이죠.
“……헷, 제가 해리스 님처럼 막 나갈 순 없잖아요? 뒷수습해야죠.”
“흥.”
해리스는 코웃음 치면서도 내 손을 당겨 걸었다.
‘그러니 나도 나만의 선택지를 찾아야 해.’
일단 반려 가이드로 고용되었으니, 가이딩 대체제도 찾아야 하고 말이다.
‘진정제 포션.’
나는 바깥에 대기하던 아넬라에게 눈짓했다.
‘플랜 B, 딱 기다려.’
그러느라 보지 못했다.
선대 공작의 집무실 안, 열린 문틈 사이로 회한에 찬 자줏빛 눈동자가 우리에게 떨어지지 않을 듯 달라붙고 있었다는 것을.
“…….”
그러나 노쇠한 공작은 끝끝내 우리를 붙잡지 못했고, 문은 그대로 소리 없이 닫혔다.
* * *
그리고 며칠 뒤, 우리는 언노운 던전 앞에 도착했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