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난 무의식적으로 목에 걸어둔 에이드리안(돌멩이)을 꼭 쥐었다.
‘세계 최강 가이드 주인공님, 보고 있다면 내게 힘을 줘!’
당연하지만 답은 없었다. 안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휴…… 어쩌지.’
언제까지 에이드리안(돌멩이)의 파장 가이딩으로 속일 수만은 없을 텐데.
‘진정제가 필요해. 인간 진정제(가이드)가 없으면 포션이라도…….’
고민해 봤자 답 안 나오는 문제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까놓고 말해 뭔 일이 있어도 해리스는 살아남을 것 같다. 다만 엑스트라인 내 목숨이 불안하단 말이지.
‘이럴 때는 정보라도 있어야 대비를 할 텐데.’
2년 전, <시천귀> 본편의 2년 전의 언노운 던전이라면…….
‘어쩌면, 거긴가?’
해리스와 에이드리안이 탈옥하기 전, 다른 S급 이능력자가 오고 나서야 겨우 클리어되었다던 던전.
‘그거 해결한 게…… 분명 화염의 이능을 가진 놈이었지.’
눈이 커졌다.
만약 정말로 거기가 그 던전이라면…….
‘로또일 수도 있다!’
내가 굳이 해주석 찾아 해리스를 공작 위에 올리고, 황제 앞까지 않아도 에이드리안을 마법으로부터 풀어줄 수 있는 그 아이템이 드롭되는 던전!
‘진짜 그 던전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어.’
다만 정말 이 던전이 그 던전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잘 알고 있는데도 심장은 마구 날뛰었다.
‘침착하자, 침착……. 설사 내가 짐작하는 그 던전이 아니라도, 언노운 던전이면 얻을 게 많을 거야.’
그렇게 심호흡하며 흥분을 가라앉히던 와중이었다.
“……그래, 고맙다.”
“……!”
선대 공작이 감사의 말을 한 것은.
‘아니, 신분 차별 극심한 꼰대에게서 이런 순순한 감사의 인사를 듣다니!’
웬일이야. 드디어 해리스가 자기 친손자라는 게 기억났나?
“하마터면 큰 손해는 물론, 고드윈의 이름을 부끄럽게 만들 뻔했지.”
아, 아니구나. 던전이 아니라 ‘검은 인어의 눈물’ 말하는 거였네.
“아닙니다. 제 반려 가이드가 신경 써준 일이니, 그녀에게 감사를 표해 주십시오.”
놀란 나와 달리 해리스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네 가이드가 괜히 했겠느냐? 너를 위해 나선 것이지.”
“그렇다 한들 감사를 들을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나 또한 그 일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선대 공작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해리스에게 시선을 맞췄다.
“너의 일을, 모르고 있었다고 변명하지 않겠다.”
“…….”
“네가 나를 원망하고 복수하려 해도 이해할 수 있다.”
……자, 잠깐. 저건 차라리 안 하느니 못한 사과인데!
어떻게 보면 지금이라도 사과를 들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해리스는 아니야.’
그는 너무 오랫동안 홀로 갇혀 있었고, 외톨이의 감금 생활에선 용서와 이해보다는 증오와 원한만이 곱씹어지게 마련이다.
사과를 한다는 건 용서를 바란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해리스에게 용서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자신을 오래전에 버려, 필요에 따라 응대하기로 간신히 마음먹은 할아버지에겐 더더욱.
나는 황급히 옆눈으로 해리스를 보았다. 테이블 아래 해리스의 손이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겨우 이런 알량한 사과 따위를 들으려고 그 지옥에서 기어 나오지 않았어, 하고 말하는 것처럼.
핏줄이 튀어나온 주먹에서 해리스의 증오가 생생히 느껴지는 듯했다.
‘안 돼, 안 돼!’
우리 합의했잖아, 다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이러면 안 돼! 이제 와 폭력 깽판은 금지야!
나는 얼른 손을 뻗어 핏줄이 툭 튀어나온 해리스의 손등을 다독였다.
진정해라, 진정!
“……!”
해리스의 손등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건지 움찔했지만, 난 무시하고 계속 쓰다듬었다.
“그러니 네 가이드가…….”
“반려 가이드.”
“……네 반려 가이드가.”
인내심이 짧아진 걸 증명하듯 해리스는 곧장 토를 달았다.
잠시의 침묵 후, 선대 공작이 말을 이었다.
“고드윈 공작 가문을 위해 행동하도록 허락하고, 우리가 그것에 이득을 보도록 용인해주어 고맙다는 것이다.”
나를 인간 취급도 안 하던 꼰대 할아범치고는 상당히 진솔한 말이었다.
다만 내가 두드려 진정하던 해리스의 손등 위 핏줄은 선대 공작이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더욱 선명하게 돋아났다는 게 문제였다.
‘개빡쳤구나!’
해리스는 나와 약속했다.
그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 후계자의 자리를 되찾고 고드윈의 주인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저는.”
해리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이 쥐어짜인 듯 억지로 꺼낸 목소리였다.
“각하…… 그러니까 할아버님을.”
죽여버리고 싶습니다. 당신을 증오합니다.
붉은 입술은 증오를 억누르듯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공기가 어느덧 긴장으로 날카로워졌음을 인지했다.
그리고 선대 공작의 자줏빛 눈동자가 여전히 해리스를 관찰하듯 응시하고 있다는 것도.
‘……시험이야.’
몸에 소름이 돋았다.
맙소사, 이 사과마저도 저 망할 개꼰대 할배가 다시 해리스를 테스트하는 거였다니!
‘왠지 던전을 너무 빠르게 언급한다 싶더니만!’
방심한 순간 뒤통수 갈기려는 거였군요, 할배 공작님!
‘처음, 해리스랑 나랑 둘 다 불러놓은 것도 그래.’
해리스가 뭘 요청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이중 약속으로 사람 기분 더럽게 만든 것도 시험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언노운 던전도.
물론 해리스에게 맡길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이 선대 공작의 선택지는 아니다.
이미 다른 방안도 염두에 두고 있을 테니까. 실제로 <시천귀>에서도 그렇게 해결했고.
’대체 언제까지 시험할 셈이야?‘
해리스도 물론 나를 그렇게 경계하고 의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선대 공작 당신이 그러면 안 되지!
‘나는 생판 남이고 댁은 친할아버지잖아!’
아무리 고드윈 공작 가문의 유전자에 의심병이 박혀 있다 해도 이건 도를 넘었어!
“각하, 방금 말씀은……!”
고의적으로 낚시질하는 거 다 티가 나니까 그만해라.
-라고, 신분 서열이고 나발이고 쏘아붙이려던 순간이었다.
꼬르륵-!
나의 우렁찬 뱃고동 소리가 공간을 가득 울려온 것은.
“…….”
“…….”
“…….”
버거운 침묵이 공간에 내려앉았다.
휘잉-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발치에서 낙엽이 구르는 것 같았다. 심각하던 분위기는 미친 듯이 어색해진 뒤였다.
‘쪼, 쪽팔려.’
기세 좋게 나섰던 분노는 그 이상의 수치심으로 돌변했다.
해리스는 물론 선대 공작마저도 멍해진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어서 더 그랬다.
“죄, 죄송합니다, 배가 고파서.”
“……배가 고파? 왜지?”
멍하던 상태에서 먼저 빠져나온 건 해리스였다.
왜냐니,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그야 제가 오늘 일어나서부터 뭘 먹은 게 없어서……?”
“뭐?!”
소리는 해리스의 반대편에서 나왔다. 선대 공작은 험상궂을 만큼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식사를 챙기지 않았다니, 마지막 식사는 언제였느냐!”
머릿속으로 헤아리던 난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하 감옥?”
“뭐? 그게 언제 적인데!”
당황한 목소리. 선대 고드윈 공작은 정말로 놀란 표정이었다.
“왜 지금껏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게야!”
“이, 일단 깨어났을 땐 각하께서 부르셨고…….”
내 말에 선대 공작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아니, 왜 이러세요, 공작님. 저 안 좋아하지 않으셨나요?
제가 굶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이러시는 겁니까.
-라고 대꾸하기엔 선대 공작의 얼굴은 너무 험악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그래, 분명 내가 너 씻고 나오면 미음이라도 가져다 놓으라 명해 놓았는데……!”
반대편의 해리스도 만만치 않았다.
‘미음? 아, 하긴. 내가 오래 일어나지 못했으니까 안 자극적이고 소화하기 쉬운 걸로 먹어야겠지.’
우리 해리스, 참 세세한 부분에서 다정한 성격이라니깐…….
최애의 섬세한 배려에 반사적으로 흐뭇한 표정을 그리던 난 해리스의 시선이 더욱 험악해지자 곧장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 굶은 건 나인데 빡친 건 저 두 사람인 이 상황은 대체 뭐야.
‘손님 대접 제대로 못 했다는 불쾌함? 손님 대접 제대로 못 받았다는 열패감?’
워, 워-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두 사람 다 진정하십셔. 나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 글쎄요. 저는 그런 거 못 받았는데…….”
“왜!”
“아, 아마 바빠서 아닐까요?”
“제깟 것들이 바빠 봤자지!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너를 굶겨?!”
왜지. 이상하게 말을 하면 할수록 진정과는 억만년 멀어지는 기분이다.
오히려 뿔난 수소들에게 벌건 깃발을 휘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제이드!”
“넵?!”
하지만 더 생각하기도 전에 다그쳐오는 얼굴들에 나는 정신없이 대답했다.
“아, 아무래도 각하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 서두르느라 실수로 빼먹-”
“실수?”
하, 조소하던 해리스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찍었다.
쾅-!
그 주먹질 한 방에 아마 대대로 고드윈 공작이 썼을 것이 분명한 고급 대리석 가구 위로 단숨에 쩌저적- 박살이 났다.
“…….”
나는 가만히 내 쪽까지 금이 간 테이블을 보았다.
이능을 쓴 것도 아닌데 저런 핵주먹이라니, 역시 S급의 순수 신체 무력치는 엄청나다.
‘난 한 대만 스쳐도 뒤지겠군, 허헣…….’
조빱 엑스트라 살려.
비록 날 죽이려 했던 해리스지만 새삼 그가 날 많이 봐주고 있었다는 게 실감 났다.
‘아마 내가 발닦개짓을 열심히 해서겠지.’
지하 감옥에서도 꺼내주고, 싸가지 할아버지도 대리 엿 먹였으니까.
‘앞으로도 정진해서 더욱 훌륭한 발닦개가 되어야지!’
자존심 같은 거 없어. 사는 게 제일 중요해. 그렇게 결심한 내가 스리슬쩍 몸을 뒤로 빼는 와중 해리스가 서늘히 중얼거렸다.
“이 성의 사용인들마저 나를 능멸하는 것이겠지.”
“엑, 꼭 그렇다기엔…….”
“안 그렇습니까, 각하?”
붉은 눈이 형형한 안광을 뿜어냈다. 핏줄이 도드라진 주먹은 당장에라도 할애비고 뭐고 갈겨 버릴 태세였다.
안 돼, 더 이상의 패륜은 STOP!
“벼, 별것도 아닌 걸로 흥분하지 마세요!”
“…….”
정작 어디서 패륜이냐며 호령하고도 남을 선대 공작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얼굴 아래 목덜미는 벌게져 있었다.
아니, 진짜 안 어울리게 왜 이러세요, 공작님!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