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분홍색 머리, 여자, 가이드.
그가 아넬라에게 한 말을 보면, 나라는 존재에 도달하는 건 시간문제다.
한마디로 난 지금 최강의 암살자이자 최악의 살인마에게 찍힌 상황이란 말이다.
‘심지어 데이트 신청까지 했어…….’
이게 살인 예고가 아니면 또 뭘까.
아아, 해리스의 가이드로 고용되고 나서 목숨의 위기는 넘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새로운 위협이 찾아오다니.
‘역시 이 빙의는 망했다.’
이쯤 되니 그런 생각도 든다.
차라리 해리스의 폭주에 휘말려 죽는 게 제일 안 아프게 끝장나는 방법이었을까?
‘아니,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
사지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게 어디야? 밥도 살균처리 하지 않고 섭취할 수 있어! 이제 맛집 투어도 가능한 몸이라고.
“미, 미친, 미친놈…….”
아넬라는 토하듯 중얼거렸다.
아, 일단 맛집 투어는 어려워진 상황이긴 하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나는 동병상련의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그의 다음 타겟으로 가장 유력한 대상은…… 아마 당신일 거예요, 아넬라.”
“네?!”
듀크 아인델타는 그와 면식이 있는 자부터 죽인다. 그게 그의 살인 법칙 중 하나다.
그리고 두 번째 법칙은,
“자신의 정체를 아는 사람.”
“……!”
“그는 당신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드러냈지요.”
겨우 전령으로 써먹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듀크는 가성비를 챙기는 남자거든.
암살자 주제에 가성비까지 따지다니…… 최강의 암살자부터 이따위니까 암살자 길드가 안 되는 거다.
“그는 반드시 그대를 다시 찾아올 겁니다.”
내 설명에 아넬라의 안색은 아예 거무죽죽해졌다.
보아하니 자신의 살인 현장을 본 사람을 최우선으로 죽이려 든다는 세 번째 법칙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될 듯했다.
두로스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해리스와 나는 빠르게 합의했다.
나는 그의 복수를 돕고, 그는 나를 위해 해주석을 구해 주는 것으로.
‘그러니 넌 이제부터 나의 반려 가이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저 오해를 풀 겨를이 없었다는 거다.
‘가이드도 아닌데, 반려 가이드?’
아무래도 가이드 거부증, 가이딩 불감증에 걸린 해리스는 내가 기절한 사이 이상한 착각을 굳혀 버린 모양이었다.
‘내가 가짜라는 건 진짜 가이드인 에이드리안이 나타나야지만 증명되겠지…….’
그래서 나는 설득을 포기하고 타협했다.
‘……일단은 그렇게 할게요.’
‘일단? 뭐가 일단이야.’
‘아, 아니. 일단 해리스 님이 차후 더 좋은, 진짜 반려 가이드를 만날 수도 있…….’
‘없으니까 집어치워.’
‘아니, 있다니깐!’
‘없다고!!’
아니,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마구 으르렁거리던 우리는 결국 하나의 목적 아래 운명 공동체로 거듭났다.
우선 고드윈 공작부터 박살 내자.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우리는 첫째로 선대 고드윈 공작을 공략하기로 했다.
‘해리스 애비놈은 끝까지 인정 못 받았지.’
그게 고드윈 공작의 발작 포인트다. 선대에게 인정받지 못한, 반쪽짜리 공작이라는 것.
다시 말해 해리스가 선대 공작에게 인정받아 후계자로 복권되는 것은 현 공작(쓰레기)에겐 치명타란 말씀!
‘그래서 다 털어놓긴 했지만……. 신뢰도가 문제야.’
내가 듀크 아인델타의 숨겨진 능력과 정체에 대해 낱낱이 고발해도, 선대 고드윈 공작은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극비의 사실을 나 같은 하찮은 부스러기 엑스트라가 알고 있다니,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상황일 테니까.
“……그래서.”
“아, 넵!”
선대 공작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어느덧 아넬라는 퇴실한 뒤였다.
남은 것은 두 고드윈과 나.
선대 공작의 자주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해왔다.
“그 암살자 놈의 목적은 무엇이냐.”
“……!”
듀크 아인델타의 화려한 정보에 매몰된 아넬라와 달리, 선대 공작은 침착했다.
“이능으로 가품을 만들어서까지 고드윈 공작 가문을 능멸하려 했던 이유가 무엇이냔 말이다.”
곧장 본론으로 치고 들어오다니.
‘노쇠했다 한들, 호랑이는 호랑이라는 건가.’
선대 공작의 서릿발 같은 눈이 나와 해리스에게 닿았다. 이 모든 게 사실상 너희 탓이 아니냐는 눈빛이었다.
‘정확하십니다. 역시 공작 짬밥을 하루 이틀 먹으신 분이 아니네요.’
지금 이 시점에, 이러한 방식으로 듀크가 나타난 것은 해리스의 탈옥과 무관할 수 없다.
‘분신이 부서졌으니, 엘리시어스가 알았을 거야.’
그것의 연쇄효과일지도 모른다.
원래 <시천귀>에서는 선대 고드윈 공작이 이런 사기를 당한다는 것도, ‘검은 인어의 눈물’이 로스두 상단에 풀린다는 것도 나오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해리스를 잡으러 온 거겠지…….’
하지만.
“글쎄요. 저토록 공들여 함정을 파다니…… 보통 암살자가 할 법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모른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큰 배후가 있을 법한데, 저로선 추측하기 힘들군요.”
증거 있어? 적은 해리스보단 님이 더 많잖아?
“…….”
내 오리발에 선대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좋다, 그건 그렇다 치자.”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내 손자로 인정받길 원한다 했지.”
대신 타겟을 바꾸었다.
“새삼 쓰잘데기없는 혈연의 정 따위를 원하는 것도 아닐 테니, 후계권의 회복을 노리는 것 아니냐.”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뭐…… 맞말이긴 한데. 그래도 조금 돌려서 말해주실 순 없나요?
“나와 네 애비놈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놈의 뺨을 후려치기 위해서라도 돕겠거니 짐작했을 거고.”
그렇게 조손의 관계를 개선의 여지도 없이 파탄 내도 좋은 거야?
“좋아, 그리 계산하는 것도 좋지.”
선대 공작은 싸늘히 웃었다.
“하지만 난 무능한 놈은 키우지 않는다.”
……파탄 내도 좋은 모양이다.
“너를 입증해라.”
해리스가 괜히 흑막이 된 게 아니었어. 가문 DNA부터 악당 재질이 충만하다.
“내가 너를 수단으로 써먹을 만한 존재인지, 아니면 그저 불쌍한 애새끼인지 증명해.”
지금 그게 친손자에게 할 말이야?
“좋습니다.”
……할 말인가 보다.
기가 질린 나와 달리 해리스는 무심했다.
“제게 뭘 바라십니까?”
오히려 억지로 비위 맞추지 않게 돼서 다행이라는 듯 붉은 눈에 이채가 돌았다.
“우습구나. 네놈이 내가 원하는 걸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하다니.”
“서론이 긴 걸 보니 난제가 있나 보군요. 됐으니 본론으로 넘어가십시오.”
“불손한 놈.”
“제가 배운 것 없이 자라서 그렇습니다. 덕분이지요.”
“배우고 자랐으면 뭐가 얼마나 달랐을까.”
“어르신들을 본으로 삼아 자랐을 테니, 기대하신 만큼은 되지 않겠습니까?”
끝없이 이어지는 패드립의 향연 속 나는 잠자코 영혼을 가출시켰다.
아아, 흑막 가문 살벌하다 살벌해……. 기 빨려 죽겠네. 조손 관계 개판이야, 개판.
‘육신도 같이 탈출하고 싶다…….’
그리고 정말로 도망쳐야겠다, 결심하기 직전.
“좋다, 기회를 주지.”
다행히 선대 공작이 그나마 어른다운 자세로 으르렁거리는 것을 멈추고 본론으로 돌아갔다.
선대 공작이 지도를 펼쳐 손끝으로 어느 곳을 가리켰다.
“던전이다.”
“……!”
빠져나가려 했던 영혼이 재빨리 귀가했다.
던전은 <시천귀>의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설정이다.
정확히는 균열, 던전, 게이트라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이.
첫 번째로 나타나는 것은 균열이다.
하나의 세계는 자신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경계가 기본적으로 존재하는데, 균열은 그 경계에 금이 간 거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균열은 더욱 몸집을 키우기 위해 다른 세계의 것들을 불러오게 되지.’
그렇게 불려온 것이 마수들이며, 그다음은 던전, 마지막은 통로(게이트)다.
균열이 심화되어 생성된 던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패’하여 크기를 키우고, 마침내 이계의 것들이 들어올 통로 ‘게이트’를 짓게 된다.
‘그리고 게이트로 진화하기 전 던전을 해결하지 못하면…… 거긴 끝장이지.’
균열이나 던전은 몰라도, 게이트로 인한 퇴화는 복구할 수 없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이 시점엔 아직 본격적인 게이트 위험이 발생하진 않았다는 거다.
‘아직까진 던전이 제일 심각한 위기일 거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던전이 덜 위험하다는 뜻은 아니다.
“처음은 조용했다. 하지만 초기 진압에 실패한 던전은 인근 마을들을 집어삼켜 몸집을 키웠지.”
균열이 막 생성됐을 때 수습하지 못했다는 거구나.
“수습하기 위해 기사단과 용병들도 보냈지만…….”
돌아오지 못했군.
내내 망설임 없이 해리스를 몰아붙이던 선대 공작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던전의 내부가 어떠한지, 몇 급인지 말해줄 수는 없다.”
“……언노운 던전.”
저토록 매정한 이조차 순간 ‘가겠냐고’ 묻지 못하고 망설일 정도로 위험한 곳.
그 정도로 무시무시한 던전이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던전의 등급이 높을수록 부산물이 귀하게 마련이다.
그건 괜찮은데, 문제는…….
‘고드윈령에 언노운 던전? 이상한데.’
생각나는 게 없어. 나는 머릿속으로 <시천귀> 설정을 뒤적거렸다.
해리스와 에이드리안이 나온 것은 2년 뒤의 시점이다. 그리고 그때엔 이런 언노운 던전은 없었다.
“……그래서.”
언제 주저했냐는 듯 선대 공작의 얼굴은 무심의 포커페이스로 돌아와 있었다.
“하겠느냐?”
고드윈령, 장기간 부패한 던전, 선대 공작마저도 해결 못 하는, 아마 최상위 등급의 던전.
“그것을 해결한다면, 내 너를 차기 공작으로 인정하겠다. 네 아버지에게서 작위를 강탈하는 것에도 협조하지.”
선대 공작이 제시한 건, 그 위험만큼의 대가였다.
“하겠습니다.”
그 대가를 약속하기 전까지 기다리던 해리스는 드디어 답했다.
‘우리 해리스, 한번 목표를 잡으니 망설이지 않고 달려가는구나.’
역시 내 최애다. 멋지다. 이런 타입이 성공하는 법이지!
숨을 쉬듯이 덕심을 채우면서도 걱정이 들었다.
‘과연 해리스 혼자서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을까?’
뭐, 지원이 없진 않겠지만 실질적으로 던전을 파괴하는 것은 해리스의 몫이 될 것이다.
아, 물론 해리스는 <시천귀>가 공언한 대로 S급 이능력자다. 초월자라 해도 좋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란 말이지.
‘그치만 그건 지금으로부터 2년 뒤 측정한 결과고, 지금의 해리스는 다른 S급 이능력자들만큼 능수능란하지 못할 텐데.’
심지어 초반 부분 파트너, 천재 가이드 에이드리안도 없는 상황…….
‘……잠깐, 그럼 내가 가이딩해야 하는 거야?’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니, 난 짭인데?!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