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네, 가짜예요.’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해 오는 푸른 눈동자. 반짝이는 어린 가이드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신선했다.
그리고 약간의 신선함이 흥미로 변한 것은 감히 자신과 내기까지 하는 대담함 때문이었다.
자신이 입을 찢겠다고 말한 것은 절대 농담이 아니었다.
감히 자신 앞에서 개수작을 부린다면 제아무리 해리스의 약점이라도 가만히 둘 순 없으니까.
거기다 100억 마르크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소왕국의 반년 예산을 웃돌 금액. 그러나 철강의 고드윈이 내지 못할 금액은 아니었다.
‘그것이 고대의 성물인 ‘검은 인어의 눈물’이라면 더더욱.’
물론 그도 바로 100억 마르크를 주고 거래할 건 아니었다.
일단 두로스를 잡아둔 뒤 천천히 검증해 볼 계획이었다. 100억 마르크라는 돈을 내도 괜찮다는 판단을 내릴 때까지.
그러나 이렇게 곧바로 가품이라는 걸 증명해 내는 건 그로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저 가이드는 대체 어떻게 안 걸까.’
잠시 의문이 스쳤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저 가이드는 왜 알려주었을까?
해리스도 해리스지만, 저 가이드 또한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심지어 이번의 박대로 더더욱 감정이 상했을 것이다.
당연하다. 그러라고 벌인 일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나섰다면…….
“일단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 보아라.”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선대 고드윈 공작은 가만히 턱을 까딱였다. 말해 보라는 기색에 제이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물론 들어주는 건 들어주는 거고, 저 가이드가 바라는 소원을 정말로 구현하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약자에게 들어주는 권력자의 약속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마음에 내키면 들어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판을 엎어버리는 것.
그러니 약자는 소원을 빌 때도 신중해야 했다. 소원을 지킬 힘이 없다면.
물론 상대가 해리스의 가이드인 만큼 아주 약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 생각은 없었다.
“각하께서 저의 해리스 님을, 친손자로서 인정하고 아껴주시길 바랍니다.”
저 말이 나오기 전까진.
“뭐, 뭐라고?”
“지금 저 말은…….”
좌중이 얼어붙었다. 해리스조차 예상치 못했던 일인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자신과 유리되었다는 듯, 제이드는 히힛 웃으며 말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약속을 지켜주시면, 그때 할게요!”
하, 선대 공작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의 패배였다.
* * *
“와- 방이 너무 좋아요!”
나는 감탄했다.
침실의 모든 것이 호화롭고 아름다웠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커다란 창문이었다.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보이는 푸르른 숲의 풍경이란!
“동관에서도 제일 좋은 방입니다. 직계님 중에서도 가장 귀하신 분께서나 쓰실 수 있으시죠.”
나를 안내하던 사용인이 웃으며 말했다.
선대 공작이 머무는, 고드윈 공작 가문의 본성은 총 5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외부인을 맞이하는 남(南)관.
그리고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중앙관.
중앙관에서 양옆에 있는 것은 서(西)관과 동(東)관이다.
서관은 고드윈의 방계나 손님, 그리고 동관은 직계와 후계자가 머무는 곳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북(北)관은 가주의 공간이고, 북관과 가장 가까운 것이 동관이지.’
한마디로 그 꼰대 할아버지가 해리스를 자신의 직계이자 친손자로 인정했단 말이다.
웃음이 절로 나올 상황이었지만…….
“도련님, 목욕 시중이라도-”
“더러운 손 치우고 꺼져.”
……아무래도 해리스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안내 뒤 시중을 들기 위해 남아있던 사용인들은 해리스의 흉흉한 기세에 황급히 사라졌다.
“너.”
달칵.
사용인들이 다 사라지고 문이 닫히자 해리스는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 * *
해리스, 화가 많이 났구나.
“……해리스 님이 원래 가져야 마땅한 권리를 내놓으라고 했어요.”
제이드는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다 나가고 나서야 이렇게 추궁하다니.
머리끝까지 화가 나도 해리스는 막무가내로 사람들 앞에서 분노를 쏟아내지 않고 단둘이 남을 때까지 기다렸다.
“죄송해요.”
아, 난 이런 거에 약한데. 제이드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먼저 말씀드리지 않고 행동해서-”
“말 돌리지 마, 제이드.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나도 알아.”
해리스의 손가락이 제이드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는 네가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물었어.”
“본디 해리스 님의 것이니까요. 당연히 되찾아야…….”
“내가 내 권리를 되찾고 말고는 너하고 관계없어.”
“왜 관계없어요? 저는-”
“말 돌리지 말랬지!”
해리스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발칵 고함쳤다.
“너, 나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었어. 알아?”
“…….”
제이드는 눈이 커졌다.
아니, 그 이유로 화가 났으리라곤 예상 못 했는데.
“다 늙은 새끼라고 만만해 보여? 정신 차려! 저 사람은 고드윈 공작조차 쓰러뜨리지 못한 자야. 그런 노인네한테 어딜 덤벼들어?”
해리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는 듯 버럭버럭 소리치고 있었다.
하마터면 그녀가 위험해질 뻔했다고, 왜 그렇게 조심성 없이 행동하냐고.
‘……나를 반려 가이드라 착각해서 그런 거겠지?’
제이드는 잘 알고 있었다. 해리스가 순수하게 자신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니었으면-”
“역시 전 해리스 님이 좋아요.”
“-큰일 날 뻔했, 뭐?”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였다.
‘좋아.’
역시 난 이 사람이 좋다.
여러모로 너무 스펙타클한 일을 겪어서 정신없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만나게 되어 기뻐.
당신을 알게 되어 다행이야.
제이드는 푸스스 웃었다.
뜬금없는 고백이긴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진정한 덕후는 덕심 앞에서 당당한 법.’
태연한 제이드와 반대로 해리스의 목덜미와 귀 끝이 달아올랐다.
“무,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
“갑자기? 아, 이전엔 말 안 했군요.”
흠, 생각해보니 내 마음을 말할 겨를이 없었군.
제이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음 빙의할 때는 해리스가 폭주 상태였고, 그 뒤에는 나를 위협하고 죽이려 들고 경계하고 난리였지.
“좋아해요, 해리스 님.”
그대가 나의 최애라서 보람차요. 새삼 덕질 잘했다 싶네. 제이드는 진지한 얼굴로 양손 엄지를 척 올렸다.
“최고!”
“……헛소리 그만해, 말 돌리지 말라고!”
해리스는 사납게 쏘아붙이면서도 뜨거워진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당혹스러웠다.
그의 일생에, 이토록 산뜻하게 ‘좋아한다’고 고백한 사람은 없었다.
이능을 자각하기 전 아주 어릴 적 기억에도 고드윈 공작저는 음울했다.
자신을 낳은 친모, 황녀의 병증이 심각해 자신의 유모조차 황녀의 병증에 일희일비하던 상태였다.
그리고 이능을 각성한 후에는…….
해리스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에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그런데 좋아한다니.
‘진짜 정신 나간 거 아냐?’
반려 가이드는 아니라 우기는 주제에.
제이드도 그렇지만, 저 말에 심장이 쿵쿵 당황하여 날뛰는 게 확실히 정상은 아닌 거 같았다.
‘헛소리 아닌데.’
그렇지만 말 돌린 건 사실이라서 제이드는 ‘넵’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바로 믿어줄 거라곤 생각도 안 했어.’
그리고 진정한 덕심이란 상대에게 마음을 관철하는 것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 안 알아줘도 상관없어!
“…….”
해리스는 그런 제이드를 보다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원하는 게 뭐야.”
그도 ‘검은 인어의 눈물’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건 인지했다.
다만, 그들이 망하든 말든 자신과 관계없다고 판단해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다.
“해리스 님이 고드윈 공작 가문의 주인이 되는 거요.”
그러나 제이드의 개입으로 이 일은 자신과 관계있는 일이 되어버렸다.
“필요 없다고 했어.”
“아니, 필요해요. 정말로 복수하고 싶다면-”
“내 복수를 네가 결정하지 마!”
제이드는 고함에 눈을 깜빡였다.
해리스는 화를 삭이려는 듯 제이드에게 시선을 거두었다.
“……네가 뭔데 내게 그 선택지를 강요하지?”
그러나 팔걸이를 움켜쥔 손에는 핏줄이 서 있었다.
“말했잖아, 나는 그 방식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으드득. 단단한 팔걸이가 으스러졌다. 해리스는 다시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곳에 머문 건 네가 쓰러졌기 때문이야. 용건은 끝났으니, 난 지금이라도 당장…….”
“아뇨.”
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해리스 님은 선택한 적 없어요.”
“뭐?”
고개를 들자 제이드가 털썩 자신의 발치 아래에 앉았다.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 아세요?”
의자에 앉지 왜 바닥에 앉냐고 달싹이려던 해리스는 고개를 돌렸다.
“……포도를 먹지 못한 여우.”
“네, 여우는 포도를 먹고 싶었지만 먹을 수 없었고, 저것은 신 포도라 자신이 ‘먹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것처럼 말하죠.”
해리스는 단번에 제이드의 말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여우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합리화했을 뿐.”
제이드는 말하고 있었다.
고드윈 공작 가문의 주인이 되는 것도, 후계자의 자리를 돌려받는 것도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
해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머리가 터질 정도로 화가 치밀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선택하고 말고의 생각 자체를 해보지 않았기에 의식하지 않았을 뿐.
“공작이 되세요, 해리스 님.”
제이드는 해리스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당신을 지옥으로 떨어뜨린 이들을 그보다 더 추락시키려면, 당신은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 있어야 합니다.”
해리스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러나 그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나를 공작으로 올려놓아서까지 네가 바라는 건 뭐지?”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