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맙소사, ‘검은 인어의 눈물’이라면……!”
“그렇습니다. 초대 성녀의 축복을 받아 아직도 신성이 깃들어 있는 성물이지요.”
허억, 감탄 어린 한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행방불명되었다는 건 소문이고, 사실 신전이 진품을 숨기고 있다고 들었는데…….”
“거짓입니다.”
두로스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신전에는 진품이 존재한 적 없습니다.”
“뭐? 신전이 거짓 소문을 퍼뜨렸단 말인가!”
“예. 정말로 진품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하여 실물을 보았다는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을까요?”
와, 나는 감탄하며 팔짱을 꼈다. 이 새끼 입 잘 터네?
“이 ‘검은 인어의 눈물’은 남부의 사막에서 힘들게 찾아낸 물건입니다. 몹쓸 이민족들이 대전쟁 이후 훔쳐 갔기 때문이죠!”
두로스는 결연한 얼굴로 외쳤다.
“제국의 성물을 어찌 이민족들의 손아귀에 둘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저희 상단은 모든 재산을 동원해 ‘검은 인어의 눈물’을 확보해내는 데 총력을 다했습니다!”
열렬한 스피치였다. 선거였다면 박수 한 번 정도는 쳐줄 만했다.
“오롯이 각하께 가장 훌륭한 귀물을 바치기 위해……!”
“그래서.”
하지만 정작 유세 대상인 선대 공작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얼마를 원하지?”
잡설은 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태도. 두로스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희가 들인 인력과 자산이 상당한바…… 최소한 100억 마르크는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100억 마르크! 그 엄청난 단위에 사람들은 신음조차 내지 못하며 입을 쩍 벌렸다.
“그것이 진품이라면, 좋다.”
좌중의 반응과 반대로 선대 공작은 간단히 답했다.
황후 아예야스의 목걸이라는 역사적 가치와 ‘검은 인어의 눈물’이라는 성물을 고려한다면 그도 아깝지 않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와, 대박이다.”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저거 완전 짭인데.
“……뭐라고?”
어느덧 고요해진 공간. 선대 공작의 목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아, 내가 소리 내어 말했나.’
사방의 시선이 내게 쏟아지고 있었다.
오히려 좋아. 난 드디어 나를 바라보는 선대 공작에게 싱긋 웃었다.
“저거, 가짜라고요.”
흥분으로 들끓던 공기가 쩌저적 얼어붙었다. 나를 향하는 집무실의 모든 눈동자엔 경악, 의심, 분노, 조소가 가득 찼다.
“제이드.”
그중에서 미약하게라도 걱정의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은, 해리스의 딸기색 눈동자였다.
왜 그러냐는 타박의 뜻이 담긴 것도.
‘해리스도 눈치를 챈 건가?’
하긴, 해리스는 천재만재니까 무언가 느낀 걸지도 모른다. 저건 일반적인 위조품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는 내가 입을 연 뒤에도 무어라 덧붙이지 않았다.
‘뭐, 친할아버지라는 작자가 손자를 어화둥둥 환대하기는커녕 저렇게 사무적으로 굴면 있던 정도 사라지겠지.’
그러나 선대 고드윈 공작의 태도에 불쾌했기 때문이라기엔, 해리스는 너무 차분했다.
물론 해리스는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 선대 공작이 인사를 받아주지 않자 감정을 드러내긴 했다. 하지만 그 뒤 이어진 자신에 대한 무시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예상했던 걸까.’
사실, 예상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선대 고드윈 공작은 해리스가 병을 핑계로 후계자 자리를 박탈당하고, 끝내 지하 감옥에 감금당하는 것마저 외면해 온 사람이었다.
그의 정보력이라면, 그리고 해리스가 감금되어 있던 곳과 본성의 위치를 고려한다면 모를 수가 없는데도.
‘나쁜 놈. 개쓰레기 공작의 아비다워.’
그러니 해리스는 자신의 친할아버지에게 어떠한 기대도 없었던 거겠지.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겠지만, 희망은 접는 게 좋을 거다.’
해리스는 먼저 선대 공작의 부름에 따라 나가며 말했다.
자신은 내 계책대로 해줄 생각이 없고, 어디까지나 내가 고열로 기절한 상태라 잠시 이곳을 들렀을 뿐이라고.
‘내가 쓰러져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곳에 들러, 끝내 친할아버지에게마저도 버려진 현실을 자각하게 만들었다고 봐야 할까.
‘차라리 화가 난 상태면 나았을 텐데.’
내가 더 열불이 터졌다. 우리 해리스를 이렇게 무시하다니!
처음엔 ‘해리스가 개빡쳐서 선대 공작이고 나발이고 다 죽이고 부수려 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는데, 저 반응보다는 차라리 저렇게 난감한 상황인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정말이냐?”
“네?”
해리스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자 선대 공작의 자줏빛 눈동자가 형형한 안광을 띄며 나를 응시해오고 있었다.
확실히 해리스의 할아버지다운 기세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벌벌 떨 법도 한.
하지만 난 해리스에게도 따박따박 말대꾸하던 겁대가리의 소유자!
“아, 네. 정말로 가짜예요.”
내 태연한 답에 자줏빛 안광은 상인, 두로스를 향했다. 상황이 심각해졌다는 황급히 무릎을 꿇고 부인했다.
“아, 아닙니다! 제 상단을 걸고 맹세컨대, 결코-!”
선대 공작은 가만히 손을 들었다. 그 곁에 서 있던 보좌관이 순식간에 두로스의 입을 막았다.
“읍!”
선대 공작이 허락한 순간에만 입을 열 수 있다는 듯이.
“증명할 수 있느냐?”
증명하지 못하면 다음은 내 차례라는 얼굴이었다.
“거짓이라면 네 사특한 입을 찢어놓겠다.”
스캉-!
집무실에 소리 없이 대기하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와, 무섭네.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진짜면 뭘 주시게요?”
“감히! 불손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 말에 분개한 듯 검날의 끝이 나를 향하듯 기울여졌다.
“치워.”
해리스는 더 참아줄 수 없다는 듯 서늘한 얼굴이었다.
그의 그림자에서부터 뻗어나간 검은 마력이 촉수처럼 무기를 감싸며 기사들의 손아귀를 비틀었다.
“……!”
“으, 윽……!”
으드득-
기사들은 위력적인 힘에도 이 악물고 버티려 했으나, 어느덧 무기는 빼앗길 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해리스 님.”
나는 작게 속삭이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물론 내 편을 들어줘서 좋다. 좋은데…….
‘이러다 빡친 해리스가 여기도 날려버리면 해리스의 쓰레기 애비, 고드윈 공작에게만 좋은 일이란 말이지.’
해리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
그래서인지 몹시도 가라앉은 표정이었음에도 해리스는 내가 말리자 기세를 거두었다.
“……읏!”
그러나 일시에 힘을 회수하자 도리어 기사들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잘 훈련된 무인들답게 금방 자세를 바로잡긴 했지만, 잠시라도 휘말렸다는 게 굴욕적인 듯 얼굴이 벌겠다.
‘흥, 꼴 좋다.’
요즘 들어 붉은색이 점점 내 최애 컬러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네놈이 감히, 내가 눈 시퍼렇게 뜨는 앞에서 이능을 발휘하는 것이냐!”
선대 공작이 매섭게 호령하자 해리스는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감히 제가 눈 벌겋게 뜨고 있는 와중에 제 가이드에게 위협을 한 것은 누구입니까?”
“네놈……!”
이크, 할아버지와 손자의 싸움으로 번질라.
“각하께선 ‘검은 인어의 눈물’을 가져온 상인에게 대가로 100억 마르크를 허락하셨습니다.”
나는 해리스 앞에 서서 그를 가리며 말했다.
“그러니 저 ‘검은 인어의 눈물’의 진위를 증명할 수 있는 제 입의 가치 또한 그에 부족하지 않겠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찌 네년의 세 치 혀가 그만큼……!”
선대 고드윈 공작의 가신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반발했으나.
“닥쳐.”
“…….”
해리스의 적안이 향하자마자 조용해졌다. 역시 S급 이능력자의 포스!
“그러니 각하, 어쩌시겠습니까? 제가 틀렸다면 제 입을 찢으시겠다 하셨는데, 각하께선 그 반대편의 저울엔 무엇을 올리실 작정인지요?”
“…….”
가만히 있어도 무서운 선대 고드윈 공작의 얼굴은 점점 더 사나워졌다. 무형의 기운이 나를 짓누르듯 압박해 오는 기분이었다.
“……읏!”
“허억, 헉…….”
기분 탓이 아닌지 집무실의 가신들마저 숨이 막힌다는 듯 파리해진 안색이었다.
‘확실히, 숨쉬기가 버겁긴 해.’
이게 살기라는 건가. 그러나 난 빙의 첫날 해리스의 폭주에 죽을 뻔한 몸이시다.
거기에 괴물이 창궐하고 고성이 박살 날 정도로 어마어마한 전투를 겪은 몸이기도 하지.
‘겨우 이런 것에 겁먹고 꼬리말 처지는 아니란 말씀!’
공포 저항 스킬이 생긴 거나 다름없다고.
“각하?”
나는 내 입술을 보란 듯이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무엇을 거시겠습니까?”
저울처럼 양손을 펼쳐 갸웃거리자, 선대 공작은 ‘하’ 하고 비소하듯 얼굴을 비틀었다.
“그래, 무엇을 원하지?”
“……!”
“각하……!”
“각하의 약속을 원합니다. 청컨대 저의 바람을 고드윈의 이름을 걸고 지켜주시길.”
고드윈의 이름을 걸고, 라는 말에 짓눌려 있던 가신들은 발작하듯 고함쳤다.
“어, 어딜 감히!”
“보자 보자 하니까, 저 건방진 것이-!”
“아가리 닥쳐!”
해리스가 사납게 으르렁거리자 좌중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선대 공작은 해리스를 힐끗 보다가 답했다.
“좋다.”
“저도 좋습니다.”
더 끌지 않고 나는 선대 공작의 보좌관을 지목했다.
‘나는 왜?’라는 얼굴의 보좌관은 선대 공작이 끄덕이자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있지요?”
“있긴 합니다만. 그게 무슨 상관인지…….”
나는 답 없이 웃었고, 보좌관은 자리를 비웠다.
“제가 목걸이를 의심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휘황찬란한 목걸이를 손으로 훑으며 말했다.
“우선, 황후 아예야스의 목걸이는 대전쟁 와중에 소실되었습니다.”
나의 <시천귀> 덕질이 빛을 발할 순간이 왔다. 내 흑진주에 손에 닿으려던 순간, 두로스가 움찔했다.
“그렇게 오래전 과거, 그 난리 통에 사라진 물건이 이렇게 멀쩡할 순 없지요.”
내 말에 두로스는 바로 반박했다.
“그렇지 않다! 이런 귀중품은 아무리 어리석은 이민족들이라도 귀중히 다루게 되어 있어!”
내가 악쓰던 그는 선대 공작의 눈빛을 받자 얼른 덧붙였다.
“무, 물론 몇 가지 보석과 금이 살짝 변색 되어 조금 손을 보긴 했습니다만…… 그 정도는 어떤 장물이라도 거치는 과정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귀물은 보통 보석들을 분해해서 장물로 팔아버리는 게 일반적이고, 이게 역사적 가치를 띄는 귀물인 이상 원래의 보석이 아니면 가치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두로스는 이를 미리 언급하지 않았다.
이건 기만이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