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안 돼.”
처음, 해리스는 단칼에 거절했다.
내가 막 깨어난 상태고, 제대로 회복되지 못한(놀랍게도 나는 무려 나흘이나 잠들었다고 한다) 몸이니 선대 공작을 뵐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해리스 님, 그분께선 그저 해리스 님의 가이드가 누구인지 확인하시려는 것뿐입니다.”
전령은 끈질겼다.
해리스가 일방적으로 나를 안고 선대 공작이 머무는 고드윈 공작 가문의 본성에 쳐들어왔지만, 선대 공작이 해리스를 위해 나라는 신분도 정체도 불확실한 존재를 본성에 들여주었다는 것.
그로 인한 본성의 소란마저도 감수했다는 것 등을 강조하며 끈질기게 달라붙었던 것이다.
“할아버님 한번 만나 뵙죠, 뭐.”
먼저 백기를 든 건 나였다.
“설마 절 잡아먹기라도 하실까요.”
“…….”
해리스는 여전히 굳어진 얼굴이었다. 잡아먹힌다는 농담조차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싸늘하지만 경계에 찬 목소리.
‘하긴, 상대는 현 고드윈 공작, 노먼 고드윈의 아버지니까.’
그 노먼 고드윈이 공작이 되고 나서도 쓰러트리지 못한 상대.
황제의 신임과 수도의 권력을 쥐고서도 간신히 양분만 할 수 있었던 자.
선대 고드윈 공작은 고드윈의 이름만 가진 현 공작과 달리, 실질적으로 고드윈 공작 가문과 고드윈령을 지배하는 자였다.
‘그리고 내가 해주석을 얻기 위해서라면 제일 먼저 포섭해야 하는 상대이기도 하지.’
나는 침을 삼켰다. 이렇게 빨리 맞닥뜨리게 되었다니.
‘긴장된다.’
나는 욕조에 몸을 늘어뜨리며 신음했다.
“휴…….”
먼저 출발한 해리스는 ‘이 꼴로 뵈려고?’라는 말로 나를 욕실로 쫓아내고 하녀들에게 나의 목욕 시중을 들게 했다.
“……물 온도는 적당하신가요?”
“아?”
“향유는 마음에 드시는지.”
“아, 응, 다 좋아.”
나는 긴장을 몰아낼 겸 시중드는 하녀들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신기하단 말이지.’
인생의 절반을 지하 감옥에 갇히고 사용인들에게 멸시당하면서 지냈으면서도, 저렇게 명령내리는 건 또 능숙하다니.
‘이게 귀족이라는 걸까.’
신분제 사회에서 내려오는 혈통적 지위는 상황이 어떠하든 근본으로 남게 되는 걸지도.
뭐, 그건 아무래도 좋다. 드디어 빙의 시점부터 찝찝하던 몸을 씻게 되었으니까!
‘역시 고드윈 공작 가, 제국의 개국공신 가문은 욕실도 장난 아니네.’
나는 대리석 욕조에 턱을 기댔다. 따뜻한 물과 대조되는 온도에 기분이 나른해졌다.
반대로 하녀들은 나를 자신들의 최고 상사에게 빨리 데려가야 하는 처지여서인지 몹시나 다급했다. 정신 차리니 다 씻겨져 있을 정도로.
“다 되셨습니다.”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던 난, 어느덧 거울 속 자신과 마주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우와.”
그리고 감탄했다. 아니, 정말로 감탄할 만한 외모인걸?
제이드는 꽃의 요정처럼 사랑스럽고 아담한 미소녀였다.
우윳빛으로 흰 피부. 뺨에는 천연 블러셔처럼 사랑스러운 홍조가 자리했고, 커다란 눈동자는 각도에 따라 푸른색으로도, 옅은 청보라색으로도 보였다.
‘내가 입은 푸른 드레스와 찰떡이군.’
다홍빛으로 도톰한 입술은 가만히 있어도 미소 짓는 것처럼 사랑스러웠고, 매끄러운 코는 오뚝하니 귀여웠다.
작고 갸름한 얼굴 아래 백조처럼 길고 우아한 목선이 호리호리한 육신으로 이어졌다.
화룡점정은 바로 머리카락이었다.
살구꽃처럼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구불거리며 흘러내리는 게 정말…….
‘……최소 탈색 3번, 핑크와 코랄로 염색해서 머리 두 번만 감으면 사라질 덧없는 컬러!’
여러 가지 의미로 감탄스러웠다. 탈색하면 펌도 안 되는데, 이 컬한 것처럼 예쁜 곱슬머리라니.
‘심지어 결도 좋다.’
사라락-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흘러갔다. 비단실처럼 매끄러운 감촉에 저절로 전생의 내가 생각났다.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 머리를 죄다 밀어 버렸던 과거가.
나중엔 가발을 쓰지도 않았고, 거울조차 보지 않았다. 내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젠 내가 원래 어떻게 생겼었는지 잘 기억도 안 나.’
흐릿한 실루엣 위로 거울로 마주한 제이드의 외형이 겹쳐졌다.
‘……에이드리안이 괜히 오빠충이 된 게 아니었군. 진짜 좀 닮았는데?’
그러나 외형에 더 감탄할 시간은 없었다.
“이제 가시지요.”
나는 하녀들의 인도에 따라 선대 공작의 집무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해리스가 후계자로 복권되려면, 선대 공작의 인정이 중요해.’
그건 고드윈 공작 가문이 두 개로 양분된 상황 때문이었다.
본디 고드윈 공작이 될 예정이었던 사람은 현 공작이 아니라 그의 손위 누이, 아이린 공녀였다.
그러나 현 공작 노먼 고드윈은 황제의 신임을 사 작위를 강탈했고, 아이린 공녀는 황제의 명으로 다른 가문에 강제로 시집 보내졌다.
‘세조 같은 짓 한 거지.’
적법한 절차가 아닌 작위의 강탈은 기존 고드윈 공작 세력, 그러니까 선대 공작과 고드윈 공작 가문 가신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그로써 고드윈 공작 가문은 두 개로 쪼개지게 되었다.
수도의 세력과 황제의 인정을 받는 현 고드윈 공작(신 고드윈)과 고드윈 공작령과 기존 가신들의 지지를 받는 선대 공작(구 고드윈)으로.
‘그리고 지금 해리스에게 가까운 건 선대 공작이지.’
적의 적은 동지라고, 현 공작을 싫어하는 선대 공작은 충분히 해리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현재 비어있는 고드윈 공작 가의 후계자 자리의 결정권을 가진 이가 바로 선대 공작이기 때문이다.
즉, 나의 마스터 플랜(황제의 해주석을 써먹기 위해 해리스 공작 만들기)에는 선대 공작의 지지와 인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일단은 친할아버지잖아.’
물론 나의 빅픽처를 생각해서라도 선대 공작과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가족이지 않은가.
비록 해리스가 아버지와의 관계는 구제할 수 없다 해도, 다른 혈연과는 가족 간의 정을 회복했으면 했다.
‘잘돼야 할 텐데.’
나는 선대 공작의 집무실 앞에서 심호흡했다.
아니, 해리스가 알아서 잘하겠지. 가기 전에 내가 미리 신신당부했잖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해리스는 유능한 흑막캐니까…….
그러나.
“들여라.”
기분 탓인지 몹시도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문 양옆의 기사들이 육중한 문을 열며 정면에 한 사람이 보였다.
노인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강건한 육체. 근사한 수염.
그러나 얼굴은 바위를 깎아지른 듯 엄격했고, 전신에 감히 똑바로 응시하기 어려운 위엄이 가득했다.
과연 고드윈의 주인다운 기세였다. 나는 잠자코 하녀들이 알려준 예법대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안건에 대해서라면, 허락할 수 없다.”
선대 고드윈 공작은 내 인사를 받아주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서류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이, 이런 개무시는 예상 못 했는데?’
힐끗 시선을 굴리자, 집무실 책상 앞에 안락한 의자가 하나 보였다. 이 집무실에서 앉는 걸 허락받는 건 그 하나뿐이라는 듯이.
“제 가이드가 인사했습니다.”
그 사람은 당연하게도 해리스였다. 싸늘한 음성에도 선대 공작은 무심했다.
“그래서?”
“…….”
싸가지 없는 건 아마도 고드윈 공작가의 유전인 모양이네, 하하.
해리스는 내 인사를 받지도, 일어나라 허락해주지도 않는 선대 공작을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일어나, 제이드.”
“……!”
집무실 안의 사람들이 숨을 들이켜며 경악을 표했다.
감히 선대 공작의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는 그의 모습이 충격받은 듯이.
“넵!”
그러나 나는 사양치 않고 해리스의 말대로 몸을 일으켰다.
“……어찌!”
“감히, 주인님의 명도 없이 저러다니.”
고드윈의 후손인 해리스면 몰라도, 나까지 선대 공작의 무시를 무시하니 사방에서 놀람과 불쾌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나의 주인이라 지칭할 수 있는 건 해리스뿐이었다.
‘일단 고용‘주’니까.’
그렇다. 나는 결국 해리스의 가이드로 고용되고야 말았다…….
‘몰라, 난 말했어.’
내 최선은 반려 가이드까진 사양하는 거였다.
고객님, 이건 상품 설명 하단에 써놨는데 안 보고 구매하신 고객님 잘못이세요, 전 책임 안 집니다.
“이리 와.”
“넹!”
나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적대적인 시선을 모른 체하며 해리스 뒤로 총총 걸어갔다.
여전히 선대 공작은 나는커녕 해리스에게조차 시선을 주지 않았다.
‘에휴, 텄다, 텄어…….’
이 기류, 싸움이 터지기 일보 직전 같군요. 공기가 따가울 지경이야.
“각하. 상인이 물건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공기가 개판이든 말든 웃는 낯을 유지하던 보좌관이 선대 공작에게 말했다.
“물건?”
“예, 건국제를 기념하여 바칠…….”
“들여라.”
저기요, 할아버님? 지금 오랜만에 만난 친손자, 해리스 앞에 두고 상인까지 불렀단 말이세요?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확인한다더니 진짜 확인만 하는 거야?’
내 용건은 끝났으니 너흰 이제 꺼지라고?
나는 일어나려는 해리스의 어깨를 꾹 누르고 속닥거렸다.
“해리스 님, 안 돼요! 누구 마음대로 꺼져줘요? 버텨요!”
“……너 주종관계라는 단어를 알기는 하냐?”
“됐으니까 궁둥이 붙여요, 얼른!”
진상에겐 진상으로! 내 부릅뜬 눈에 해리스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고, 우리가 속닥거리는 동안 상인이 들어왔다.
“각하를 만나 뵙게 되었다니, 이 로스두 상단의 무한한 영광입니다.”
잠깐, 로스두?
“소인은 상단주 두로스라 합니다.”
비굴해 보일 정도로 공손하게 인사한 두로스는 무릎걸음으로 들어와 선대 공작 앞에 어떠한 상자를 내밀었다.
“보십시오.”
설명이 필요 없다는 자신만만한 태도.
“……이것은!”
상자를 해제한 보좌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것은 몹시도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목걸이였다. 백금으로 만든 체인 사이로 반짝이는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루비와 오팔…….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것은 중앙의 커다란 흑진주였다.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흑진주는 보기만 해도 신성한 광채를 뿜어냈다.
“아예야스 황후의 목걸이, ‘검은 인어의 눈물’입니다.”
뭐? 내 눈이 커다래졌다. 경악으로 입도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니, 저게 지금 여기 있을 수가 없는데?’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