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이렇게 된 이상 오해를 사는 건 피할 수 없다.
‘기분 탓인가, 점점 상황이 나를 해리스의 진정제로 몰고 가는 거 같은데.’
차라리 정말 그게 맞으면 모르겠는데, 정황상 가짜라는 게 확실해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와서라도 ‘사실 내가 아니라 이 돌멩이…… 그러니까 에이드리안 때문이에요’ 하고 구구절절한 진상을 밝히는 게 나으려나 싶기도 했지만.
‘그랬다간 돌멩이(에이드리안)만 빼앗기고 쫑나겠지…….’
그리고 해주도 도와주지 않으리라.
솔직히 인간 진정제에게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마법 진정 돌멩이를 가지고 다니는 게 편리할 테니까.
‘절대 말하면 안 돼.’
무엇보다 에이드리안의 비밀을 까발렸다간 또 무슨 꼴을 맞이하게 될지 무섭다.
나는 주먹으로 숨긴 돌멩이(에이드리안)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제길, 에이드리안! 정체가 까발려지기 싫으면 뭐라도 해봐!
그때였다.
“……!”
손끝에서 에너지 같은 게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더니 공간에 가득 뻗어져 나가던 어떠한 느낌-아무래도 파장으로 보이는 것이 슥 가라앉았다.
‘마력!’
눈이 커졌다.
그래, 엘리시어스도 이렇게 마력을 먹여서 인간을 이따위로 만들고도 생명을 보존시키곤 했지.
어떻게 마력을 주입한 건지 원리는 모르겠지만…….
“오, 오해십니다.”
일단 됐다. 나는 돌멩이를 손에 숨긴 채 해리스의 착각을 벗겨내려 입을 열었다.
“파장이니 가이딩이니 하셨지만, 사실 전…….”
“내가 지적하니 숨기는군.”
“예?”
하지만 해리스의 낯빛은 더욱 싸늘해질 뿐.
“그 조절 능력이야말로 네가 가이드란 증거 아닌가?”
“네?”
전혀 먹히지 않았다.
“아니, 그니까 그게 아니라…….”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해.”
“아니, 거짓말이라뇨! 진짜 아니라니깐!”
나는 팔을 쭉 내밀며 말했다.
“자! 만져봐요, 가이딩 되나!”
사실 반쯤은 해본 소리였다. 사람의 접촉을 싫어하는 해리스가 정말 만질 리가?
“……!”
그러나 해리스는 정말로 내게 손을 뻗었다.
피아니스트처럼 기다란 손가락. 마디마디가 선명하고 커다란 손은 정말 주인 닮아 예쁘고 잘생겨서 닿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치만 가이딩은 택도 없어!’
솔직히 말해서 내가 가이딩받는 것 같다. 나의 최애님 해리스가 자발적으로 나를 만지다니, 에너지 충전되는 기분인걸?
흐뭇함에 뺨마저 발그레 달아올랐지만…….
“…….”
나를 만지작거리는 해리스의 얼굴은 점점 찌푸려졌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역시 가이딩이고 나발이고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거봐!’
하도 가이드라고 오해받아서 ‘혹시?’ 했지만, 역시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도.”
“네?”
한참 후에야 나온 해리스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붉은 눈이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흔들렸다.
‘어, 어라?’
상처받아?
“그렇게도, 내 가이드라는 걸 인정하기 싫나?”
“네?!”
나는 아연했다. 아니. 아니라는 걸 증명했을 뿐인데 왜 저런 반응인 건데?
“네가 잠들어 있을 때는 파장을 뿜어내더니, 내가 가이드라 지적하니 거두었지.”
“아, 아니, 그건…….”
“그때엔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진정되는 기분이었는데, 깨어난 네게는 닿아도 초조해진다.”
해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두덩이는 그가 얼마나 충격받았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의식을 차리자마자 이렇게 힘을 거두다니.”
아니, 그거 내가 아니라 에이드리안(돌멩이)이라니까! 내가 기절했던 동안 저게 멋대로 힘을 발산한 거라고!
그러나 나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머리에 암석이 떨어진 듯한 충격이었다.
“내 가이드가 되는 게 그렇게도 싫으냐?”
역효과였어.
‘WHY-!!’
오해받다 못해 이제는 상처까지 주었다니!
일단 내가 감히 해리스를 상처 입힐 정도의 관계가 되었다는 게 가장 패닉이었다.
‘뭐야, 이전에는 나 싫어하지 않았나?’
보호해주길래 미운 정이라도 붙은 건가 싶긴 했지만, 이렇게 극적인 태도 변화라니.
‘전우애의 효과가 이렇게 강력한 거였어?!’
하긴, 나도 에이드리안이 그때 나타나 줘서 순식간에 미움 다 사그라들긴 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그 자리에 나타나 내 손목을 끌고 도망치려 했던 에이드리안.
나 때문에 잡혀갈 뻔하면서도, 오빠라 부르라 윽박지르던 에이드리안.
그 에이드리안을 마법에서 풀어줘야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대답해라, 제이드.”
해리스.
각진 턱에 힘이 들어가 턱 근육이 갈라졌다. 근사하고도 무서운 모습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 * *
사실, 해리스는 제이드가 반려 가이드라는 사실을 믿지 않던 상태였다.
‘반려 가이드라니,’
그렇게 기적적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리가 없다.
자고로 삶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생겨난 삶의 변화란 대체로 나쁜 것이었으니.
하지만…….
“전 아니에요!”
필사적으로 자신이 가이드가 아니라 부정하는 제이드를 보니, 도리어 이게 현실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그래, 나 같은 것의 반려 가이드는 되기 싫다는 거겠지.’
드디어 납득할 수 있었다.
기적같이 반려 가이드가 나타났지만, 그 가이드가 자신을 외면한다. 반려 가이드가 되길 거부한다.
충분히 자신에게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해리스는 비소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끓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제 심장을 터뜨리고 갈비뼈를 부러트리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눈 돌아갈 것만 같은 분노가 사그라들 것 같았다.
하지만.
“해리스 님…….”
정작 제이드에겐 화낼 수가 없었다.
동그랗고 커다란 청안. 새처럼 지저귀는 분홍빛 입술.
말간 얼굴의 제이드는 당혹스럽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 무구한 모습에 나오려던 고함마저도 기어들어 갔다.
‘……어쩌면, 자신이 가이드라는 걸 모르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합리화마저 피어났다.
해리스가 처음 발현했을 때와 달리, 이능력자와 가이드의 개념이 세간에도 널리 퍼진 상태였다.
이능력자들이 가이드를 얼마나 험하게 다루는지 또한.
‘그러니, 저렇게 현실 부정하는 걸 수도 있어.’
해리스는 화를 삭이기 위해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제이드가 쓰러져 있을 때, 해리스는 끝없이 파장을 느꼈다.
파장 가이딩의 안정감에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서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함부로 닿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가이딩하다 쓰러진 제이드였다.
거기다 특유의 고혹적인 향이 그녀가 쓰러져 있던 동안 더욱 강하게 피어나, 한 번 닿았다간 자제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러나 깨어난 제이드는 금방 자신의 파장을 거두더니, 접촉 가이딩을 시도했을 땐 완전히 막혀 버렸다.
특유의 향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 이제는 은은하고 산뜻한 느낌만 날 뿐이었고.
‘아니, 고의로 막은 건 아닌가? 어쩌면 계속된 가이딩에 지쳐서 반사적으로 힘을 잠근 걸지도.’
아주 오랫동안, 가이딩은커녕 사람과 닿지도 못했던 해리스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제이드와 닿는 건…… 싫지 않았다. 어쩐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자신 안, 주체할 수 없이 날뛰는 거대한 마력이 사그라드는 느낌.
그러나 그것은 여태껏 제이드가 뿜어낸 파장에서 받은 가이딩과는 달랐다.
‘숨기고 있어.’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제이드는 자신 앞에서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이능(異能)의 각성으로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는 이능력자들과 달리, 가이드들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건 허다한 일이었다.
인지하더라도 그를 받아들이지 못해 부정하고, 반사적으로 숨기려 드는 것도.
‘하지만 그런 가이드들도 이능력자를 접하며 자신의 능력을 깨닫게 된다던데.’
생각이 ‘일부러 자신을 거부한다’는 관점으로 돌아오자 해리스의 눈매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감정을 억누르던 해리스는 입 안의 살을 질근질근 씹었다. 너무 세게 깨문 이에 피 맛이 나던 순간이었다.
“아니, 왜 또 피를 보고 그래요…….”
제이드가 손을 뻗었다.
그를 말리듯 뺨을 살짝 두드리는 손끝은 발그레했고, 푸르고 투명한 눈동자는 걱정스레 찌푸려졌다.
‘또, 또, 또 입 안의 살 깨물지.’
<시천귀>에서 언급된 해리스의 안 좋은 습관이다. 자꾸 그러다간 나중에 미각 상실한다고! 인생에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데?
해리스는 기가 막혔다.
‘한 가지만 해, 한 가지만!’
다정할 거면 반려 가이드라는 걸 인정하거나, 부정할 거면 애초에 매정하게 굴든가!
목에 핏대가 솟았다. 뭐라도 버럭 쏟아내려던 차였다.
똑똑, 문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제이드는 그제야 자신이 아주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고, 공간은 널찍하고 호화롭다는 걸 깨달았다.
‘자, 잠깐.’
분명 원래 해리스가 갇힌 고성은 개박살이 났다. 그리고 인근에 그가 머물 법한 곳은…….
“여기 설마, 선대 공작님의 거처예요?!”
현 공작의 아버지, 그러니까 해리스에겐 할아버지 되는 선대 공작의 거처는 고드윈 공작 가문의 본성이다.
‘설마 우리 벌써 성에 들어와 있었던 거야?’
당황한 제이드의 얼굴을 보자 해리스는 심술궂게 웃었다.
“해리스 님!”
“들어와도 좋다.”
그는 제이드의 말을 무시하며 문소리에 답했다.
달칵, 문이 열리며 문틈에서부터 소리가 들어왔다.
“선대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정말 왔구나!
‘그럼 왜 굳이 내 구구절절한 설득 무시한 거야?’
그러나 해리스는 제이드의 의문 섞인 얼굴에 코웃음 치며 몸을 일으켰다.
“가지.”
“그리고 곁의 가이드도 데려오라 말씀하셨습니다.”
해리스의 웃음이 굳어졌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