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잠시 침묵하던 엘리시어스는 마석 통신구를 꺼냈다. 마력을 담은 전언이 이어졌다.
“암살자의 왕, 듀크 아인델타에게 전해라.”
통신구의 마석 안에서 빛이 춤을 추듯 타올랐다.
만약에 실험체가 맞다면, 그리고 그것이 새끼 고드윈 곁에 붙었다면…….
‘그렇다면 아무나 보낼 수 없지.’
적어도 격이 맞는 이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해리스 고드윈이 가진 이능의 격에 맞는 S급 이능력자로 듀크 아인델타만큼 적합한 인물도 없었다.
엘리시어스는 의뢰 대상의 외형 조건을 설명한 뒤 위치를 지정했다.
“람서스 제국, 고드윈 공작령 주변이다.”
통신구 너머에서 대답이 없었다.
나는 흥신소가 아니고, 사람 죽이는 거 아니면 꺼지라는 의사에도 엘리시어스는 개의치 않았다.
“잡아 와.”
엘리시어스의 전언을 받던 패에서 어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나지. 가이드인가?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알아보고 잡아 올 대상이라면 뻔한 사실이었으니.
통신구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가이딩은 제법 거친데, 괜찮나 보지?
가이드라는 존재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겠지.
엘리시어스는 예상대로의 반응에 놀라지 않았다. 듀크 아인델타를 상대하고 죽은 가이드가 어디 한둘이던가.
‘하지만 저만한 이능력자도 드물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아는 실험체가 맞다면, 저런 흉포한 놈이라도 거뜬히 상대하고 살아남겠지.
‘아니면 죽든가.’
그렇다면 자신이 찾던 실험체가 아니라는 거다. 실망스럽겠지만.
엘리시어스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으며 답했다.
“생포해 와.”
살아만 있다면, 그 외의 일은 개의치 않겠다는 듯이.
통신석 너머로 불길한 웃음소리가 답을 대신하듯 울려왔다.
-그 의뢰, 받지.
훅, 빛이 꺼졌다.
남은 건 암흑이었다.
* * *
아아, 나의 개빡신 빙의가 이쯤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제이드.”
아니었다.
“깨어났군.”
그러게요, 또 깨어나 버렸네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거지 같은 세상에 버려지다니! 이젠 해리스의 뇌쇄적인 목소리도 썩 달갑지 않…….
‘……해리스?!’
맞아,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괘, 괜찮아요?!”
해리스, 너 총에 맞았잖아! 마지막으로 봤을 때 피투성이에, 손목 발목에도 억제구로 인한 상흔이 가득했고!
“…….”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어둠에도 선연한 붉은 눈동자. 잿빛의 그림자가 중첩된 것처럼 어두운 머리카락.
새하얀 대리석으로 깎은 수려한 이목구비 때문에 얼굴 반절이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정말이지, 해리스는 근사한 퇴폐미 컨셉 화보처럼 아름다운 사내였다.
너무 압도적인 미모라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멀쩡하다.”
그러나 화보의 인물이 내게 말을 걸자 현실감이 서서히 깨어났다.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은데.’
확실히 감옥에서 피 토하고 기침하던 때와 달리 꽤 건강해 보였다.
‘억제구를 빼서 그런가?’
하긴, 상대는 S급 이능력자. 해리스 정도의 초월자는 회복력도 범상찮으니 정말로 순식간에 다 나은 걸지도 모르지.
다행이었다. 다행이지만…….
‘아악, 마이 아이즈, 마이 아이즈……!’
정작 내 눈은 너무 건조해서 아프다! 이런 개복치 같은 몸뚱이!
나는 곧장 눈을 감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또 우는군.”
아니, 이건 우는 게 아니라- 하고 달싹이려던 입술이 멈췄다.
눈가에 닿은 베개가 축축했다. 난 정말로 울고 있었다.
“왜 매번 울지?”
낮게 울려오는 동굴 같은 목소리.
막 깨어난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듣기엔 과도하게 섹시한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등골이 파르르 떨리며 입이 열렸다.
“악, 악몽을 꿔서…….”
“악몽.”
또 꿈을 핑계로 우냐고 말하는 것 같아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진짠데…….”
불에 타 죽는 꿈이었단 말이다. 불길해서 입 밖으로 내긴 좀 그렇지만.
악몽이라도 깨어나고 나니 잘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좁은 우물 같은 곳에 빠져있던 에이드리안과 그런 그를 내려다보던 나.
물에 잠긴 에이드리안은 내게 미친 듯이 화가 나고 당황한 얼굴로 내려오라는 듯 손을 뻗었는데…….
‘그러기도 전에 덮쳐오는 불길에 타 죽었지.’
그나마 다행인 건 고통은 없었다는 거였다. 갑자기 퓨즈 끊기듯 툭 시야가 암전되었으니까.
‘꿈이라서 그런가?’
손으로 눈가를 비비려던 난 손에 무언가를 꽉 움켜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손바닥의 안에는 딸기색의 반질반질한 돌멩이가 잡혀있었다. 얼핏 보면 루비 원석처럼도 보이는 이 예쁜 돌멩이는-
‘에이드리안이잖아!’
잠기운에 젖어 있던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동시에 내가 기절하기 전 있었던 개판도.
‘그게 현실이었다니. 내 주인공이 돌멩이가 되었다니!’
안 돼. 어떻게든 이야기를 원래대로 돌려야 해!
그것만이 이 미친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인데, 내 손으로 폐기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
‘에이드리안을 원 상태로 돌려놔야 해.’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첫째, 에이드리안을 돌멩이로 만든 마법사한테 가서 주문을 해제, 즉 해주(解呪) 해달라고 하기.
‘해줄 리가 없잖아!’
상대는 마탑주 엘리시어스다. 에이드리안을 실험체로 손에 넣고 굴리던 그 엘리시어스!
‘설득한다고 들어줄 인물이 아니야.’
그를 설득하려면 인간미나 양심에 기댈 게 아니라 거래를 해야 한다.
하지만 내겐 그가 거래하고 싶어 할 만한 게 거의 없다는 게 문제다. 이능력자가 아니라 가이드를 필요로 하지도 않을 거고.
‘게다가, 거래를 제안한다고 해서 그걸 들어줄 인물도 아니지.’
도리어 거래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걸 들키는 즉시 도둑맞기나 할 거다. 그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고.
‘아, 안 돼. 내 목숨은 소중해.’
살고 싶어서 에이드리안을 마법에서 풀어주려는 건데 그건 완전 본말전도다.
그렇다면 두 번째.
‘마탑주 엘리시어스, 그를 죽여야 한다.’
기본적으로 마법은 마법사가 죽으면 사멸하게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설득하기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내가 무슨 힘으로? 전 이 세계관 최약체일 텐데요.
자리에서 일어나려 몸을 세우는 것마저 어지러워 휘청거리는 이 볼품없는 몸뚱어리…….
“가만.”
그런 나를 붙들어 준 건 마디마디 선명하고 커다란 손이었다.
고개를 들자 마주한 건 라즈베리처럼 빨갛고 예쁜 눈동자였다.
“정신 들었나?”
해리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것이 대답 같았는지 해리스의 흰 손이 내게서 멀어지더니 컵을 가져다주었다.
“마셔.”
순순히 입술을 컵 끝에 대었다.
꿀꺽, 물을 마시자 머리는 더욱 명료해졌다.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해주석(解呪石).’
이 세계관 설정상, 그 어떠한 마법과 저주라도 해제할 수 있다는 신비의 귀물.
엄청난 아이템이다 보니 아무나 가지고 있지 않다. 소유자가 무려 황제!
그리고 그런 황제에게 접근해서 해주석을 쌔벼올 수 있는 사람은…… 당장 내 주변엔 오직 해리스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이건 해리스를 고드윈 공작가의 주인으로 만들어야 가능한 일이다.
공교롭게도 이는 <시천귀>에서 에이드리안이 밟은 절차와 같았다.
‘해리스와의 감옥 생활에서 애증 어린 우정을 쌓은 에이드리안이 설득하지.’
당장에 고드윈 공작을 죽이는 게 아닌 고드윈 공작가 전체를 먹는 것으로 복수를 시작하자고.
「“공작이 가지지 못한 걸 네가 가지는 것. 그 이상으로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없어.”」
모종의 사정으로 현 고드윈 공작은 고드윈 공작 가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지 못한 상태다.
한마디로 그의 발작 버튼이란 말이지.
‘좋아.’
나는 호기롭게 다 마신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해리스 님!”
“왜.”
본래 이 역할은 주인공인 에이드리안이 해야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나라도 해보자!
‘읽은 대로 설득해보자. 할 수 있어!’
“우리 선대 공작님께 가요.”
“뭐?”
해리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나는 호기롭게 외쳤다.
“가서 후계자 자리를 돌려받읍시다!”
* * *
물론 단번에 설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해리스가 내 말을 들어주긴 했다.
“그래서라니요. 일단 선대 공작님의 협조를 받으면 일을 진행하기도 수월하고…….”
“필요 없어.”
들어주기만 했다.
‘역시 원작에서처럼 감옥에서 해리스랑 더 버텼어야 했나?’
나는 초조함에 잠시 후회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랬다간 내가 죽었을 거야…….
“나를 설득하려 하는군.”
“아, 네. 궁극적으로 보자면 후계권 확보는 해리스 님을 위해…….”
“사기꾼 같아.”
“네?!”
WHY! 난 그냥 <시천귀>에 적힌 그대로 복붙해서 설명하고 있을 뿐인데!
‘에이드리안은 통했는데, 왜 난 사기꾼 같다는 오해나 받고 있지?’
해리스는 내 의문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물었다.
“왠지 알아?”
설마 주인공이 아니라서? 같은 말을 해도 설득력+10 되는 건 주인공 한정 이펙트인 건가요?
“넌 내게만 유리한 말을 해.”
“그야, 해리스 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거기서 네가 뭘 얻는지는 말하지 않지.”
“……!”
눈이 커다래졌다. 해리스는 고개를 기울여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제안하는 자의 목적이 보이지 않는 제안은 믿을 수 없다, 제이드.”
“…….”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해리스는 내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의 붉은 입술은 무어라 달싹이다가 말았다.
‘뭔데, 원하는 게 뭔데!’
침묵을 버티지 못하고 내가 속으로 외칠 무렵,
“너.”
“네?”
“…….”
“왜요?”
잠시 침묵하던 해리스가 물었다.
“너, 내 가이드지?”
“엥? 아뇨.”
“…….”
너무 단칼에 부정해서일까, 해리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왜 부인하지?”
“그야 아니니까……?”
“그럼 이 파장은 뭐지?”
파장이라니?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으려다 눈을 크게 떴다. 깨어날 때는 비몽사몽이라 몰랐는데 지금 보니 파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파장의 위치는…….
‘내 손!’
정확히는 돌멩이가 된 에이드리안이었다! 갸아악, 나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설마, 에이드리안. 자아를 유지할 수 없어 능력도 컨트롤할 수 없어진 거야?!’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