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해리스와 달리, 나와 같은 노예들은 결계라는 무형의 벽을 넘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사실, 결계가 막아서는 건 구속구를 차고 있는 대상뿐이야.’
정작 해리스의 힘은 막지 못한다는 게 그 증거다.
나는 체어샷 두 번으로 박살 난 의자를 내려놓았다. 에릭이라고 불리던 사용인은 내 연이은 체어샷으로 의식불명 상태였다.
그리고 쓰러진 그의 손에는…….
‘저기 있다!’
나는 재빨리 컨트롤러를 빼앗아 들었다.
해리스의 구속구와 비슷한 재질, 비슷한 마석을 박은 컨트롤러를 쥐자 정전기를 느끼듯 손이 찌릿했다.
에릭의 입과 코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걸 보니, 마력을 있는 대로 빨아먹어 그런 건가?
‘뭐, 좋아. 여기까지는 계획대로다.’
문을 따고 나가는 거야 언제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해리스의 구속구를 해제하려면 저 컨트롤러가 필요해.’
구속구를 해제하지 않고선 무형의 벽인 결계를 통과할 수 없고, 해리스의 힘도 손발이 묶인 상태일 테니까 말이다.
내 탈출 계획은 완벽했다.
‘왜냐하면 이미 원작에서 에이드리안과 해리스가 탈출하는 장면을 보고 표절한 거니까!’
죄송, 정말 죄송합니다…… 만, 저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양해해주시길, 미리 감사합니다.
아무튼 그 완벽한 계획에 두 가지 변수가 있었다.
첫째, 컨트롤러를 가지고 있는 건 놈이 누군지 까먹었다는 것.
‘내가 아무리 <시천귀> 덕후라도 그런 엑스트라가 누군지까지는 기억 못 해!’
나, 그러니까 ‘제이드’라는 엑스트라도 기억 못 하는데 저것들은 어떻게 하라고?
아무튼 그래서 해리스에게 부탁했다. 일부러 저놈들 겁먹게 만들어 달라고. 위협을 느낀 저들이 컨트롤러를 꺼내 들도록.
저 나쁜 놈들은 해리스를 두려워하면서도 짓밟아버리고 싶어 했다.
아비에게도 버려져 지하 감옥에 비참히 갇혀 있는 해리스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기는커녕, 도리어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했으니까.
‘그러니 해리스에게 엿 먹었다 싶으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여기까진 모두 내 예상대로 흘러갔다.
“해리스 님, 찾았어요!”
내 부름에 해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양 말짱했다.
역시 내 최애, 교활하기도 하지. 흑막이 될 자질이 충분해!
“에, 에릭?!”
“이게 무슨……!”
내가 뿌듯해하는 와중, 사용인들은 급작스럽게 일어난 사태에 경악하고 있었다.
저게 넘어가면 자신들은 죽는다.
상황을 파악한 사용인들은 곧장 내게 달려들었지만.
“이 새끼가 누구를 잡으려고.”
“으헉-!”
달려온 에이드리안이 나를 움켜쥐려던 사용인을 걷어찼다. 그리고 그 뒤로는.
“커헉!”
“으악, 악!”
“밟아, 밟아 죽여!”
“이 새끼가 우리 지하 감옥에 끌고 온 개놈이야!”
곳곳에서 튀어나온 노예들이 다른 사용인들을 덮쳐 쓰러뜨리고 공격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한 두 번째 변수였다.
원작에 없었던 존재, 노예들.
본디 그들은 이 시점이 오기도 전에 학살당할 운명이었다.
이번에는 나를 제물로 바쳐 살아남았지만, 그렇다 한들 자신을 죽일 뻔한 해리스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없다.
‘나와 해리스를 도와주기는커녕, 해를 가하지 않기만 해도 다행이지.’
그래서 물자를 나눠주며 계획을 설파했고, 저들은 당장의 원한과 미래의 탈출을 위해 협조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나는 해리스를 향해 달려가며 외쳤다.
“해리스 님, 손!”
“…….”
멍멍이 부르듯 내민 손에 해리스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얼른!”
“……빨리 해.”
다가온 손 위로 가만히 손목을 내밀었다.
‘은근 귀엽다니깐.’
그에게 죽을 뻔한 것도 잊고 벌써 헤실거리는 꼴이 내가 생각해도 우습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해리스를 싫어할 수 없었다.
그의 곁에 다가가기만 해도 몸이 산뜻해지고 기분이 들뜨고 만다.
‘최애라 그런가.’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덕심 같은 거지.
나는 혼자서 합리화하며 해리스 손목 구속구의 마석에 컨트롤러를 가져다 대었다.
틱, 티딕-!
마석에 불꽃이 튀듯 불이 들어오던 순간이었다.
“읏……!”
내 안의 어떠한 에너지가, 손에 쥔 컨트롤러로 빨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몸의 힘이 빨리고 숨이 가빠지는 기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게 바로 마력이 소모되는 감각이라는 걸.
‘내가 진짜 판타지 세계에 들어오긴 했구나.’
지금껏 남의 일로 구경하듯 실감하던 게 몸으로 체감되고 있었다.
체내 특정 부위가 욱신거리는 게 영 불편한 기분이었지만, 그렇다고 놓을 순 없었다.
각각의 마석에서 빛을 주고받으며 구속구가 해제되고 있었으니까.
틱! 티딕-
마침내 잠금쇠가 열리며, 그의 손목과 발목을 감싸던 구속구가 해제되었다.
“휴…….”
내가 찬 것도 아닌데 속이 다 시원했다. 나는 식은땀을 닦으며 물었다.
“어때요? 어디 아프거나 하진 않으세요?”
“…….”
해리스는 내 말에 답하지 않고 자신의 신체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오랜 시간 결박되어있던 구속구가 사라지며, 해리스의 손목과 발목에 지저분한 상흔이 드러났다.
그가 힘을 쓰려 할 때마다, 제한을 넘겼다며 몇 번이고 고문했던 흔적들.
“이…….”
이 악랄한 놈들.
입천장까지 쏟아져 나오는 욕을 간신히 눌렀다. <시천귀>에서도 묘사가 나오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 심하잖아!
“이런 기분이었군.”
정작 손목을 매만지는 해리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구속구가 없어지는 건.”
너무 오랫동안 갈망했던 것이 현실로 일어나니 도리어 무덤덤해진 걸까.
“힘을 쓰는 것도.”
자유로워진 해리스의 손으로, 검은 힘이 휘몰아쳤다.
“읏.”
무시무시한 기세에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이렇게 쉬운 거였어.”
새빨간 눈이 건너편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노예들에게 두들겨 맞는 사용인들이 있었다.
고요한 얼굴이었다.
흑과 백. 그 두 가지 색으로만 나뉘는.
그러나 해리스의 선명한 적안만큼은, 평안한 얼굴과 달리 섬뜩한 안광을 드러냈다.
“자, 잠깐만요.”
주저앉은 내가 손을 내밀기도 전, 어느덧 내 어깨를 잡고 뒤로 당 에이드리안이 ‘모두 물러나!’ 하고 고함쳤다.
“으, 으아악-!”
“피해, 도망쳐!”
그렇게 노예들이 도망치는 사이, 두들겨 맞아 쓰러지고 웅크리던 사용인들이 고개를 든 순간.
“죽어라.”
휘몰아치던 검은 힘이 순식간에 그들을 향해 쏘아졌다.
콰콰쾅-!
공간이 쿠르릉 울려왔다. 그 압도적인 힘에 나도 모르게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 웅크렸다.
힘의 여파에 내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마구 흔들렸다.
간신히 먹먹한 귀를 떼어냈을 때.
“아아악-!!”
가장 먼저 끔찍한 비명이 꽂혀 들었다. 사람이 죽기 전 내뱉는 단말마가 귀청을 찢듯 공간을 울렸다.
퍼뜩 고개를 들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무릎의 힘이 풀렸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사람이 죽고 남은 시체의 흔적마저도.
“마, 맙소사…….”
그저, 바닥에 묻은 검은 그을음만이 해리스가 발휘한 이능의 흔적을 남겼을 뿐.
그제야 난 해리스가 얼마나 힘을 억제당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푼 결과가 무엇인지 자각했다.
어쩌면 내가, 길들여지지 않은 괴물을 풀어버린 걸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 * *
해리스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손목을 내밀어 보아라.’
그 목소리. 익숙하지 않은 다정함이 깃들어 있던 아버지의 목소리.
‘잠시면 된다.’
‘네 힘은 아직 위험하지 않으냐, 그래서 잠시 실험해 보는 것이다.’
‘아비인 나를 못 믿겠느냐? 설마 내가 친아들인 너를 해칠까…….’
고드윈 공작은 열두 살도 채 되지 못한 아이를 그렇게 구슬렸다.
당시 해리스는 어렸다. 몇 번이고 외면당하고, 버려지고, 감금까지 숱하게 당해 왔음에도 다시 속을 만큼.
‘……!!’
구속구를 매달자마자 벼락이 자신을 내리찍는 것 같았다.
신음조차 내지 못할 정도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보는 것은…….
‘너는 영원히 저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싸늘한, 익숙한 혐오의 눈빛.
손목을 붙들고 쓰러져 헐떡이는 자신에게 고드윈 공작은 그렇게 말했었다.
‘네가 만에 하나 벗어난다고 한들, 나는 언제라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다시 가두면 그만이지. 한 번도 했는데 두 번이 어렵겠느냐?’
조소하는 얼굴에선 숨겨지지 않은 증오가 드러났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얼굴밖에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어렸던 해리스는, 아버지가 자신을 속이는 걸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손을 내밀고야 말았다.
조금이라도 다정한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할 거 같아서.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등신 새끼.’
해리스는 조소했다.
친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그 눈에 인정받고 싶다는, 그런 어리석은 소망이 그때까지도 남아있었다니.
증오스러웠다.
눈앞에 나타난다면 당장에 찢어 죽여버리고 싶었다.
자신을 달콤한 말로 속이던 고드윈 공작도, 그딴 말 몇 마디로 넘어가 버린 자신도.
과거의 기억은 툭 누르기만 해도 격노의 감정을 폭발시켰다.
그러나 해리스는 분노하기 위해 그 기억을 상기시킨 게 아니었다.
‘알 수 있다, 라.’
고드윈 공작의 말을 복기하며 해리스는 생각했다.
그건 구속구에 그를 억제하고 고문하는 것 외에 다른 능력도 있다는 거겠지.
‘해제하면 인지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한 건가.’
마도구를 만든 것은 마탑주 엘리시어스다. 구속구의 감시 기능 또한 마탑에서 관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자신이 구속구를 해제한 시점에서부터 마탑에 신호가 갔다는 소리다.
고드윈 공작이 이를 알아차리고, 다시 그를 가두기 위해 온갖 수를 써서 공격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제 겨우, 구속구를 벗어나 자유를 찾은 자신에게.
아직 그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복수를 시작하기 전, 자신을 추스를 겨를이. 순식간에 돌아온 자신의 힘에 적응할 시간이.
‘그렇다면…….’
해리스의 붉은 시선이 구속구를 찾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
하얗고 자그마한 손이, 바닥에 버려진 구속구를 먼저 잡아챈 것을.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찌푸려졌던 해리스의 얼굴이 이어진 그녀의 행동에 멈칫했다.
“……?”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