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8화 (8/119)

8화

‘크학, 아아악-!’

‘사, 살려…… 컥!’

‘도, 도련님! 자, 잘못했습니다! 제발, 그만-!’

수년의 감금 생활에도 해리스는 약해지지도, 무기력해지지도 않았다.

‘왜? 나 들으라고 한 소리 아니었나?’

도리어 세월이 지날수록 소년의 적안은 더욱 살기 어리게 번뜩였다.

‘더 지껄여 봐.’

어느덧 지하 감옥에는 요령 없이 문을 두들기며 나가게 해달라고 고함치던 소년은 사라지고, 끔찍한 괴물 새끼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괴물 새끼는 자신을 가두고 핍박한 사용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엔 노예들을 풀었으나, 그 노예들을 사들이는 값도 만만치 않았다.

‘빌어먹을.’

에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노예들 목숨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자신이 빼돌린 성의 예산이 줄어드는 걸 생각하니 속이 쓰리고 분이 차올랐다.

“네놈들도 잘 알잖아, 폭주 시기는 끝났어! 그 살육에 미친 괴물이 노예들을 학살했을 테니까!”

“하, 하지만…….”

“아무리 괴물이라도 폭주 이후에는 제힘을 다 쏟아내느라 잠잠해. 아니면 폭주통을 앓느라 정신없을 거라고.”

“……!”

보통 이능력자들은 가이드를 통해 폭주를 해소하며, 이후 폭주통 또한 가이드의 치유 능력으로 버틴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하 감옥에 홀로 처박힌 해리스에게 그를 치료해주고 보살펴줄 가이드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마, 맞아.”

“그러고 보니, 이젠 그 타이밍이 찾아올 때긴 해…….”

지하 감옥 문을 연 사용인들은, 조심스레 그 아래를 둘러보았다.

고요했다.

그 어떠한 노예도 살아남지 못하고, 감옥의 주인마저도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폭주통이라면, 지금쯤 열이 올라 덜덜 떨고 있겠지.”

사용인들의 얼굴에서 공포가 사라지며 그 자리에 음침한 기대감이 피어났다.

자신이 올려다보지도 못할 고귀한 귀족의 몰락과 그를 괴롭힐 수 있다는 쾌감으로.

“얼음 없어? 도련님께서 열이 펄펄 끓을 정도로 추우시다는데, 찬물을 끼얹어드려야지.”

“푸하하! 그러니까, 구정물이라도 챙겼어야 하는데!”

사용인들은 지하 감옥에 짐을 내려놓으며 낄낄거렸다.

“……그나저나 아쉽군. 저번 노예 중에서 제법 예쁘장한 것들도 있었는데.”

“시간만 됐으면 좀 가지고 놀고 내려보낼걸. 너무 빨리 죽였어.”

“그러니까, 특히 그 분홍색 머리…….”

그렇게 안도하며 마구 떠들던 때였다.

“분홍 머리 누구.”

낯선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누구냐니. 기억 안 나? 그, 요정족 혼혈처럼 예쁘장하던 계집…….”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에릭은 흠칫 굳어졌다.

그 목소리는 지하 감옥 아래 짐을 내려놓던 사용인들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그래.”

어둠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피를 머금은 듯 불길한 적안. 석고상처럼 흰 얼굴은 귀신처럼 섬뜩했다.

“누군지 알겠네.”

해리스였다.

* * *

“어떻게……!”

이능력자.

대륙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 괴이한 존재들로 인해 마법사들의 영향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자기 밥그릇 뺏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들은 대표적인 반(反) 이능력자 파였고, 자연히 그런 이능력자들을 억누르는 방법을 강구해 왔다.

“정말이지, 대단하시오.”

그리고 그 억제에 성공한 마법사가 있었다.

마탑주, 엘리시어스.

“손 놓고 있다간 모은 걸 빼앗길지도 몰랐는데, 미리 발 빠르게 움직여 그 이능력자들의 이능 수치와 등급까지 만들어 내시다니.”

“그놈들을 다룰 수 있는, 가이드란 존재들도 마탑주가 제일 먼저 발굴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마탑주가 계시지 않으셨다면……!”

존경과 탄성, 마법사 세브릭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마스터 엘리시어스는 저토록 위대하신 분이었다.

“그런데 그리도 대단하신 마탑주께선 대체 어디 계시오?”

흐뭇하던 세브릭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 그분께선, 새로운 실험체를 찾느라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또?”

엘리시어스는 정녕 천년에 한 번 나올 인재였다.

인간의 것으로 보기 힘든 마력 보유량과 한도 끝도 없이 지고한 지식. 그리고 세간의 잣대를 따르지 않는 거만함까지.

“대체 그 비싼 얼굴을 언제 보여줄지 모르겠군.”

비록 반(反) 이능력자 세력의 최전선에 나서는 이라고 하나, 마탑주 엘리시어스의 이러한 방만한 태도에 마법사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번 회의가 무엇 때문에 열리게 된 건지 모르지 않을 텐데…….”

“설마 마탑주마저도 황실의 부름을 받은 것이오?”

세브릭은 점점 나빠져 가는 상황에 황급히 끼어들었다.

“그럴 리가요. 마스터께선 정말, 정말 응급한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우신 겁니다.”

“그 응급한 상황이라는 게…….”

“가이드입니다.”

“……!”

불만 가득하던 얼굴들이 세브릭의 소리 낮춘 목소리에 굳어졌다.

가이드.

이능력자들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유일한 키.

마탑주 엘리시어스는 그 가이드들을 색출해내는 것을 넘어 ‘제작’에까지 손을 뻗고 있는 자였다.

‘실제로는 성공하셨었지.’

딱 한 번. 유일하게 성공한 실험체가 나왔었다.

‘그 실험체를 잃어버리지만 않았어도.’

세브릭은 로브 아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황실에서 어떤 가이드가 도망쳤다고 하던데.”

“설마, 마탑주가 그것을 잡으러……?”

세브릭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일순 긍정으로 보이는 표정에 마법사들은 감탄했다.

“……하, 역시 마탑주.”

“우리보다 한발 앞섰어.”

완화된 분위기에 세브릭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제를 이어갔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 마스터께선 S급 이능력자에게도 실험을 진행하셨고, 실험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고드윈 공작의 아들. 해리스.

그마저 마탑주가 손수 만든 구속구와 마법진 결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그 증거가 바로, 앞서 발견하신 이 마도구이지요.”

세브릭이 언급한 마도구에 박힌 마석에서 보랏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것은 구속구의 착용 여부는 물론, 결계에 종속된 현황까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오……! 괜찮다면, 내 한 번 만져보아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흥미로워하던 마법사들을 향해 마도구를 건네던 세브릭은 멈칫 굳었다.

“어?”

구속구의 해제나, 결계의 붕괴, 마지막으로 해리스의 사망이 아닌 이상 꺼질 일 없는 그 빛의 신호가…….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갑자기 꺼져 버렸다!

* * *

“어, 어떻게……!”

폭주통을 앓느라 죽은 듯이 쓰러져 있어야 할 괴물 새끼가, 왜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는 거야?!

“크헉-!”

그 의문을 내뱉기도 전에 에릭의 곁에서 노예를 희롱하던 사용인 하나가 쿵- 하고 쓰러졌다.

“허억, 컥, 크웨엑……!”

“……!”

꿈틀거리는 검은 힘에 잡아먹히기라도 한 듯, 그 사용인은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물었다.

‘빌어먹을, 완전히 회복했잖아!’

더는 어떻게, 라는 생각을 할 틈은 없었다. 어느덧 저편에 있던 해리스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었으니까.

“으악!”

“오, 오지 마!”

겁에 질린 사용인들은 마구 비명을 지르면서 뒷걸음질했다.

폭주 사태를 목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이어 해리스가 이능으로 공격하니 모두 이성이 마비된 것이다.

“에, 에릭! 뭐라도 해봐-!”

공포의 붉은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던 에릭은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 차렸다.

그러나 에릭의 반응은 너무 늦어, 어느덧 검은 연기에 감싸인 커다란 손이 눈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당장에라도 그의 목숨을 뜯어갈 듯이.

‘아, 안 돼. 죽고 싶지 않아!’

덜덜 떨리는 손이 본능적으로 품을 뒤적이던 순간.

둥-!

악귀처럼 달려들던 커다란 손아귀가 멈추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였다.

투명한 벽이라도 존재하듯, 웅웅 하는 소리와 함께 보랏빛 파동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둥, 투둥-!

해리스의 손이 주먹이 되어 그 벽을 마구 내려쳤지만, 주먹이 닿는 곳곳 보랏빛 파동이 퍼지며 그를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허억, 헉, 크헉……!”

하마터면 그대로 저 손에 잡힐 뻔했다. 겁에 질린 에릭은 뒷걸음질 치다가 그대로 발이 엉켜 넘어졌다.

‘마, 맞아. 마탑주가 저 괴물이 벗어나지 못하도록 결계를 쳐놓았다고 했었지.’

그걸 알았기에 에릭은 감옥의 관리인을 자처했었고, 점차 공작 성의 예산도 과감하게 착복하며 우두머리인 양 군림해 왔었다.

그런데도 갑작스레 달려드는 해리스의 위협적인 기세에 눌려 순간 잊어버린 것이다.

상황이 반전되자, 곧장 굴욕감과 비열한 안도감이 분노의 형태로 가득 차올랐다.

“저 괴물 새끼…….”

“에릭, 가만히 있을 거야?!”

마찬가지로 수치심과 분노를 느낀 사용인들이 그들의 우두머리, 에릭에게 고함쳤다.

“공격해!”

그래, 그들도 공격할 수단이 있었다. 에릭은 품에서 숨겨둔 마도구를 꺼냈다.

‘만에 하나, 고드윈 공자가 앞뒤 모르고 미쳐 날뛰는 순간이 온다면…….’

그건 한낱 사용인에 불과하던 그를 지하 감옥 총관리인으로 만들어 준 귀물이었다.

거기에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어 버튼을 눌렀다.

지지직-!

그러자 해리스의 사지를 감싼 구속구가 불길한 소리를 내며 덜덜 떨려왔다. 동시에 구속구 주변으로 기묘한 빛이 공격적으로 치솟았다.

“크흑-!”

신음을 삼키는 소리.

사지가 공격당해서인지, 해리스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웅크린 등의 근육이 고통스럽다는 듯 크게 헐떡였다.

“아하하!”

에릭은 과도한 마력 사용으로 코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희열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지하 밑바닥에 갇힌 괴물 새끼 주제에, 어딜 감히…… 커헉!”

퍼억- 둔탁한 소리에 뒤통수를 강타당하기 전까진.

“그러니까.”

쓰러지는 에릭 뒤로 나타난 것은, 살굿빛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요정처럼 자그마하고 호리호리한 소녀는 다시금 퍼억-! 체어샷을 갈기며 중얼거렸다.

“어딜 감히, 해리스를 건드려?”

내 최애님을 말이야.

* * *

“어, 어떻게……!”

사용인들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나라는 존재에 충격받은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해리스의 폭주 시기 제물로 바쳐졌던 노예들이 살아남다니.

‘본래라면 나도 그렇게 끔살당하는 엑스트라1이었을 거야.’

원작에서 살아남은 건 오로지 최강의 가이드, 에이드리안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사용인들은 잊고 있었으리라.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