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래.”
해리스가 턱을 괸 채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반쯤 감긴 붉은 삼백안은 차가워 보이면서도 매혹적이었고, 무심한 표정은 그림 같이 수려했다.
깨어나자마자 이렇게 눈이 즐거워질 미모를 보다니, 얼굴이 다시 헤실……거릴 때가 아니잖아!
“너, 아니, 해리스 님이 왜 여기 계세요!”
“그걸 이제 인지하나? 드디어 잠에서 깨어나긴 했나 보군.”
“아, 네……. 제, 제가 원래 저혈압이라 잠에서 빨리 못 깨고 해롱해롱하는 편입니다…… 가 아니라!”
담담한 말투에 그대로 낚여서 대답하던 난 뒤늦게 펄쩍 뛰었다.
“왜, 왜, 왜 여기 계신 거예……욥?!”
수면에 절여져 있다 벌떡 일어난 몸은 사지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해 다시 엎어졌다.
“제이, 제이드!”
뒤에서 다시 뻗어진 손이 나를 붙들었다.
“막 일어났으면서 그렇게 움직이면 어떡해.”
낯선 목소리와 상반된 익숙한 잔소리는 언니를 연상시켰다. 나는 습관적으로 대답했다.
“미안, 언……”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건 언니가 아니었다.
“……니?”
진분홍색 머리카락. 청보랏빛 눈동자. 중성적인 미모가 남다른 절세미청년.
우리의 주인공, 에이드리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정하고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친!’
니가 왜 여기 있어?!
그제야 난 내가 지금껏 그의 품에 안겨있다는 걸, 나를 해리스에게서 떼어낸 게 그라는 걸 깨달았다.
“컥!”
왜 친한 척이야. 무슨 꿍꿍이인 거지?
‘에이드리안은 나를 죽이려 했어.’
정확히는 폭주통을 앓는 S급 이능력자, 차후 초월자라고 불릴 해리스에게 맨몸으로 내던진 거지만, 그게 그거니깐.
물론 에이드리안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긴 했다.
나는 그가 숨기고 있는 힘을 멋대로 사용하게끔 밀쳤으며 그의 정체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를 폭주통을 앓고 있는 해리스에게 떠민 거잖아!’
죽으라고!
사실 해리스처럼 곱게 꺼지라고 말로 해주는 건 극히 드문 사례고, 이능력자들은 본능적으로 거슬리는 존재를 힘으로 ‘치워’ 버리려 한다.
그리고 그 치우는 방법은 평범하지 않지.
‘나도 그렇게 죽을 뻔했잖아.’
하지만 지금 에이드리안은 나를 보살피듯 안고, 걱정하는 얼굴을 내비치고 있다.
뭐야, 소름 끼쳐. 이 미친 계략 주인공이 또 무슨 개수작을?
내 경악한 얼굴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에이드리안은 다정히 말했다.
“괜찮아, 제이드.”
천천히 나를 다독이는 손길은 친밀하여 더욱 섬뜩했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아니, 님 때문에 제가 무서운 건데요!
그때 갑자기 쑥, 몸이 반대편으로 당겨졌다. 고개를 들자 검은 머리카락과 탄탄한 턱이, 그리고 그림자 속에서도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너.”
해리스였다.
‘아, 맞다, 쟤도 여기 있었지!’
에이드리안 때문에 너무 정신없어서 잊고 있었다.
“가이드 아니라며.”
“네?”
무표정한 얼굴 속, 눈썹이 찌푸려졌다. 나는 의미를 알 수 없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색은 멀쩡한데.’
이전처럼 열에 들끓거나, 입술이 피로 물들어 있지 않았다. 즉 내 치료는 문제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득달같이 내가 깨어나자마자 나타나다니, 뭐가 문제지?
‘설마 치료 자체가 문제였나.’
가이드도 아닌데 어떻게 치료했냐고 따지러 온 걸지도 모른다.
일명 진상 환자.
“아, 아니. 제가 한 건 그저……!”
“됐고.”
내가 무어라 변호하기도 전, 검은 마력에 감싸여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따라와.”
해리스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보더니 그대로 뒤돌았다. 나 외의 노예들은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나 하나만 조지겠다는 건가!’
저벅, 해리스가 나를 둥둥 든 채 끌고 갔다. 나를 버린 노예 동지들은 이번에도 우르르 물러나 피했다.
‘야, 이것들아!’
인간적으로 내가 한 번 도와줬으면 의리 있게 나설 때도 되지 않았니!
그러나 의리 있게 나서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따라오라니요.”
나를 잡은 건 또 에이드리안이었다.
“제이드에게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무슨 상관이야.”
다행히 내가 물을 질문을 해리스가 대신해줬다.
그래, 무슨 너랑 나, 무슨 상관이니?
“제이드는 제 동생입니다.”
“엥?”
나는 상황도 잊고 의아함을 표했다.
‘너 그런 설정 없는데?’
주인공 겸 내 차애라서 잘 기억한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이 날 째려봐서 입을 열진 못했다.
“제이드를 놓아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약한 아이인데, 왜-”
에이드리안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나를 들고 가던 검은 힘이 어느덧 에이드리안의 목을 옥죄듯 틀어막은 것이다.
“커헉……!”
쿵, 그대로 낙하한 나는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버둥거리는 에이드리안의 꼴은 그저께의 나와 다르지 않았다.
“시끄러워.”
해리스는 싸늘한 얼굴이었다.
감히 노예 따위가 자신에게 무어라 말대꾸하고 막아선 게 거슬린다는 듯, 그대로 벌레 죽이듯 간단히 제거해 버릴 기세였다.
“자, 잠시만요!”
나는 황급히 해리스의 발목에 매달려 비명을 질렀다.
해리스, 이 미친놈아! 아무리 그래도 너의 유일한 오아시스인 에이드리안을 위협하면 어떻게 해!
‘물론 몰라서 그러는 거겠지만!’
하지만 진실을 아는 나로서는 해리스가 에이드리안의 원한을 사게 둘 수는 없었다.
너 에이드리안 없으면 죽거나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지는 몸이라고!
“……이게 무슨 짓이냐.”
해리스 다리가 딱딱하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정말 말처럼 튼실하고 단단하게 갈라졌…… 아니, 이게 아니라.
“워, 원하시는 거 뭐든 해드릴게요!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에이드리안 놔 줘!
비록 날 죽이려 한 개자식이지만, 그래도 내 차애야! 그리고 이 개자식 없이는 이야기 진행이 안 된다고!
“…….”
해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분노.
살의.
공기를 통해 퍼져나오는 기운은 너무나 생생했다.
무서웠다. 몸이 덜덜 떨렸다. 지금이라도 두 손을 놓고 에이드리안이 죽든 말든 도망쳐야 할 것 같았다.
‘안 돼.’
여태껏 난 이 모든 게 과몰입 오덕후의 망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미친 거라 여겼다.
하지만, 내가 정말 빙의한 거라면?
정말로 이렇게 주인공 에이드리안이 죽어버린다면?
‘그럼 <시천귀>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 버리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최애 소설이 끝장나게 생겼다는 덕후의 절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이 디스토피아 세계의 불가촉천민 엑스트라에 빙의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인데 내 유일한 나침반인 에이드리안이 이대로 죽어버리면…….
“……제발.”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해?
투둑, 굵은 눈물이 뺨을 흘러 턱 끝에서 떨어졌다.
무서워, 너무 무섭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이 죽음이 더 무서웠다.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미래가 두려웠다.
날 것의 사나운 공기에 피부가 찢길 것 같았지만, 나는 해리스를 놓을 수 없었다.
“사, 살려줘요. 에이드리안, 제발-!”
“너.”
심연처럼 깊고 어두운 적안이 날 내려다보았다.
“내가 원하는 것, 그게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했었지.”
“네, 네!”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에이드리안을 살려야 했다.
“그게 무엇이라도 들어드릴게요!”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걸까.
“커헉!”
쿵, 하는 소리, 에이드리안을 옥죄던 검은 힘이 다시 해리스에게 수거되었다. 나는 다급히 몸을 돌렸다.
“에이드리안!”
“쿨럭, 컥…….”
비록 그는 고의로 나를 죽음으로 몰아간 개자식이지만, 미우나 고우나 하나뿐인 주인공이기도 했다. 에이드리안이 벌게진 목을 부여잡고 몸을 웅크린 채 기침하는 모습이 보기 좋진 않았다.
“이, 이제 괜찮아. 심호흡하고…….”
내가 그의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키려던 찰나였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
내 손이 에이드리안의 등에 닿기도 전에 퍼뜩 허공에 들렸다.
‘해리스!’
어느덧 다가온 그가 내 손목을 잡아 든 거였다.
크고 기다란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부드럽게 내 손목을 두드렸고, 석류처럼 붉은 입술이 휘어졌다.
매혹적이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와 맞닿은 피부에서부터, 어떠한 에너지마저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거짓말쟁이.”
그 말에 몽롱하던 정신에 급속히 불이 들어왔다.
“아, 아니에요! 거짓말이 아니라…….”
“가이드, 아니라며.”
“정말로 들어드릴 생각…… 켁?”
해리스의 손이 에이드리안을 향하고 있던 내 몸을 돌렸고, 내가 휘청이기도 전에 다른 손이 나의 목과 턱선을 움켜쥐었다.
“읏.”
힘이 들어가지 않은, 가벼운 손길인데도 숨이 막혔다.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가 내게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쉽게 들킬 거짓말 따윈, 하지 말았어야지.”
해리스가 얼굴을 당겼다. 아름다운 선홍빛 눈동자가 가득 찼다.
“거, 거짓말이 아니-.”
내 말이 듣기 싫다는 듯, 턱을 움켜쥔 손이 압박을 가했다. 입술이 강제로 맞물렸다.
“파장이 이토록 생생한데.”
“-읍?”
파장?
순간 머리에 전구가 켜진 듯 이해(理解)가 들어왔다.
‘에이드리안.’
그다. 해리스의 힘에 목이 졸린 순간, 에이드리안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숨기고 있던 힘을 푼 거다.
에이드리안 정도의 경지에 이른 가이드는 그 자신의 파장을 뿜어내는 것만으로도, 그러니까 어떠한 접촉도 없이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능력자들을 진정시킬 수 있다.
‘해리스는 착각하고 있어.’
그 파장의 주인이 나라고. 공교롭게도 에이드리안과 나는 같은 방향에 있었기에 착각은 심화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에이드리안은 파장을 접지 않았다…….’
내게도 ‘파장’이라는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에게서 발생하는.
이건 고의일까, 실수일까?
내 몸의 신경이 온통 뒤의 에이드리안에게 쏠렸다.
얕은 기침, 아직 일으키지 못한 몸.
이건 에이드리안의 계획인가? 나를 방패 삼아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한?
“아니…… 아니에요.”
개수작 그만해, 에이드리안! 이제 그만 정체를 드러내라고!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심호흡하며 삼켰다,
‘밀고했다간, 이번엔 정말로 죽는다…….’
주인공을 팔아넘기는 엑스트라를 기다리는 건 죽음뿐. 친히 몸으로 구르며 깨닫지 않았는가.
‘진실을 말하면 안 돼.’
그렇다고 해서 거짓을 말할 수도 없다. 해리스 급의 초월자는 거짓의 신호를 파악할 수 있기에.
그렇다면,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하나.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