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속상한가?”
“네, 많이요.”
하드엘의 질문에 답하고 나니 오늘 낮, 날 찾아온 아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마법 시약 연구를 위해 잠시 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것도 놀라웠는데 언제 떠나는 것이냐 물으니 그는 당장 내일이라 답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붙잡지는 못했다.
아델의 자리를 잠시 비워 두는 게 아쉽기는 해도 분명 이번 여정은 백마법사인 그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꼭 돌아오겠습니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에 아델은 그처럼 간결한 한마디를 남겼다. 그리고 돌아서기 직전, 처음 만난 그날처럼 그는 환히 웃었다.
아델다운 작별 인사였다.
“아델 경이 무사히 복귀하겠지요?”
“염려 마시오. 그자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니.”
어둠이 내려앉은 침실에서 낮게 울리는 하드엘의 목소리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나는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보다 우리 서랠 왕국에 가기로 하지 않았던가?”
“기억하고 계셨어요?”
“당신과 한 약속이니 기억해야지.”
나란히 누워 있던 하드엘이 느릿한 손길로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공녀의 재판이 끝나면 하고 싶다 말했던 것들, 심지어는 아주 사소한 바람까지 그는 이렇게 차근히 이뤄 줬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잊지 않았다.
예쁜 조각보를 하나씩 짜 맞춰 이어 나가는 것만 같은 하루하루였다.
“봄의 무도회가 끝나는 대로 일정을 잡도록 하겠소.”
“고마워요.”
나는 하드엘의 품에 얼굴을 묻고서 말했다.
그의 체온이 느껴지는 게 좋아 더욱 힘주어 안자 하드엘은 실없이 웃어 버렸다.
열린 창 너머로 풀잎이 한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르르. 완연한 봄을 떠올리게 하는 부드러운 소리였다.
나는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박동에 귀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 손길이 나른해서인지 시간이 지나자 졸음이 몰려왔다.
“어서 자, 플로리아.”
하드엘은 내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알아채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잠시 몸을 들어 흉이 남지 않은 팔 위 상처에 입을 맞추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 정성스러운 입맞춤은 그의 기억이 되돌아온 그날 이후 매번 처음처럼 되새겨지는 수순이었다.
어쩌면 흔적도 없이 상처가 사라진 건 하드엘 이 사람 덕분이 아닐까.
나는 살며시 미소를 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날 바라보는 고요한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이는 내 두 눈 안에 담겼다.
나는 그와 함께 맞을 아침을 이제는 당연하게 떠올리며 졸음이 가득 실린, 힘없이 보드라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잘하셨어요.”
“뭘?”
“침실을 하나로 합친 일 말이에요. 예전부터 칭찬해 주고 싶었어요.”
* * *
안온한 봄밤이었다.
하드엘은 잠이 든 플로리아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붉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고르게 내쉬는 숨소리가 적막 속에 맴돌았다. 감은 눈 아래로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드엘은 플로리아의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상처가 나 있던 팔이 보이자 그의 눈 위로는 잠시 슬픈 빛이 드리워졌다.
시간이 흘러 상처가 아물고 당신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 줬지만 이렇듯 못 견디게 가슴이 아려 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지난겨울은 그에게 있어 전쟁의 상흔처럼 고통스럽고, 악몽처럼 끔찍한 나날이었다.
플로리아를 잊었던 모든 순간들이 그에겐 어둠이었다.
검으로 베었던 팔을 보면 자신을 보며 울음을 참아 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떨리는 입꼬리를 올려 애써 미소 짓던 얼굴도 떠올랐다.
마지막 눈길 위에 떨어진 핏자국을 내려다보며 한참이나 뒤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도 그의 기억 속에선 여전히 선명했다.
그날, 황제궁에 도착해서야 불현듯 모든 것이 기억났다.
이유 없는 증오가 사라진 자리는 처음에 텅 비어 있었다. 그 자리에 곧바로 버거운 슬픔이 들어찼다.
하나둘, 떠오른 기억을 받아들이는 일은 가혹하기만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그녀를 찾아야 했다. 당장은 그 생각뿐이었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죄책감이 자신을 짓눌러도 우선은 그녀를 봐야 할 것 같았다.
봐야 숨이 쉬어질 것 같아서.
‘폐하.’
에스트라의 화원에서 자신을 부르던 플로리아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하드엘은 잠든 그녀의 입술에 다가가 입을 맞췄다.
따스한 숨결이 짧게 전해져 왔다.
이렇게 당신의 곁에 아무렇지 않게 머무는 것이 이기적인 욕심이란 걸 알았다.
아무리 플로리아 당신이 괜찮다 해도 당신에게 그런 상처를 준 내가 곁에서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는 걸까, 그런 회의감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죄책감 때문에 그녀를 피하고 돌아서는 일 따위는 할 수 없다는 걸.
아무리 마음이 저미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자신을 짓눌러 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곁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하드엘은 곤히 잠들어 새근거리는 플로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눈도, 오뚝한 코도, 다물린 입술도. 그렇게 찬찬히 자신의 눈에 담았다.
깊이 저문 밤에도 그의 세상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 *
‘황후 폐하, 축하드립니다!’
의원에게서 뜻밖의 축하 인사를 듣게 된 건 오늘 오전이었다. 서랠 왕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기도 했다.
이상하게 며칠 내내 종일 몸이 무력하고 피곤했다.
무리한 일정도 없어 왕국에선 그저 즐겁기만 했는데 돌아오고 나서는 줄곧 이랬다.
예전에는 밤을 새워 마법서를 읽던 날도 있었지만 근래엔 루이 왕자와 왕세자에게서 전해 받은 편지만 읽어도 졸음이 몰려왔다.
속이 더부룩한 일도 잦아져 이를 마샤티아 백작 부인에게 털어놓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황후궁 의원을 불러 주었다.
나를 진찰하던 의원은 정말 조금도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전했다.
‘회임하셨습니다!’
의원은 거듭 축하드린다고 말을 하며 자신이 더 감격하여 눈물을 글썽였다.
루안은 뒤늦게 기쁨에 겨운 소리를 내질렀다. 옆에 있던 마샤티아 백작 부인은 그런 루안에게 자중하라 말을 하면서도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한동안 멍하게 눈만 깜빡였다. 배 속에 하드엘과 나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엔 조금 믿기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나는 의원에게 되물었다.
방금 그 말이 정말이냐고.
그가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때 마음 깊은 곳에 무언가가 차올랐다.
그 무언가는 강물에 찰랑이는 물비늘처럼 잔잔하게 반짝였다. 눈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정의하자면 꼭 그런 느낌이 들었다.
분명 그건 슬픔이 아니었다. 따스하고 포근한, 그러면서도 벅차 어쩔 줄을 모르는 기쁨이었다.
“폐하께서 에스트라의 화원에 도착하셨다 합니다.”
오전의 일을 곱씹는 사이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다가와 기다리고 있던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우리의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처럼 놀라 아무 말도 못 하는 게 아닐까?
노곤한 봄바람이 불자 창가에 드리워진 커튼이 느리게 부풀어 올랐다.
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돌아섰다.
“그럼 다녀올게요.”
하얗게 물든 에스트라의 화원이 차츰 눈에 담겼다.
여린 꽃잎을 흔들고 지나온 미풍에 드레스 자락이 살랑였다.
아벨리움에 돌아온 그날처럼, 그리고 하드엘을 처음 만난 그때처럼 만개한 꽃들이 공중이 나부끼고 있었다.
훈훈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나는 가벼운 걸음을 내디뎠다.
다리 위, 새하얀 제복을 입고 서 있는 하드엘이 보였다.
나는 그를 부르는 대신 소리를 죽여 다가갔다. 그리고 뒤에서 살며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조금의 놀라는 기색도 없이 하드엘이 돌아섰다.
“왔소?”
“되게 조용히 다가갔는데 다 알고 계셨어요?”
자연스럽게 손을 얽어 잡으며 그가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플로리아, 당신이 오는데 내가 모를 리가. 그런데 무슨 일이오? 듣기로는 내게 급하게 할 말이 있다 하던데.”
“흠, 글쎄요?”
나는 뜸을 들이며 그를 바라봤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칼이 찬연한 봄볕 아래 은은한 금빛으로 반짝였다.
반듯한 이마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내리면 그의 두 눈이 보였다.
오롯하게 내가 담겨 있는 회색 눈은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봄을 닮아 있었다.
“플로리아?”
하드엘이 대답을 재촉했다. 내 입술이 열리길 애타게 기다리는 하드엘을 향해 나는 아주아주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 폐하께서 제게 지신 빚. 이제 갚아 주세요.”
“빚?”
“네. 폐하를 괴한에게서 구해 드린 그날, 제게 빚을 갚기로 하셨잖아요.”
하드엘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심각했던 얼굴이 그제야 풀어졌다.
“말하시오.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나는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사랑해 주세요. 저도, 우리 아이도 영원히.”
꾹 참아왔던 말을 뱉는 순간, 날리는 꽃잎 한 장이 살포시 내려앉기라도 한 듯 마음이 간질거렸다.
하드엘은 한참 나를 응시했다. 내 말을 되뇌듯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잠시 후 한 걸음 다가온 하드엘이 몸을 낮췄다. 이마에 짧게 그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플로리아.”
하드엘은 그저 내 이름만 나지막이 불렀다.
특별한 말은 없었지만 난 지금 이 순간 그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저 눈빛도, 미소도, 뒤이어 나를 살며시 껴안아 쓰다듬는 손에도 어디 하나 기쁨이 차오르지 않은 데가 없었으니까.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에스트라의 화원을 바라봤다.
화창한 봄빛 아래 있는 화원은 눈부셨다.
기다린 시간만큼이나 아름답게 피어난 꽃이 훈훈한 바람결을 타고 느리게 한들거렸다.
평온한 공기의 흐름을 타고 말간 새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긴 봄날의 시작이었다.
『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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