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짹. 짹.
별안간 들려온 새소리에 아델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여전히 눈앞의 세상은 희미한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나무줄기에 기대앉아 있던 그가 몸을 바로 세우자 얼굴 위에 덮어 놓은 책이 푸릇한 잔디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제야 시야 한가득 오후의 햇살이 들어찼다.
아델은 아직 빛에 익숙하지 않은 눈을 찡그리며 방금까지 눈앞에 펼쳐졌던 장면을 떠올렸다.
꿈을 꾸었다. 모든 감각이 선명해 깨어나니 소름이 돋는 꿈.
아델은 꿈속 알링의 자그마한 부리가 닿았던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환상처럼 보였지만 현실처럼 와닿았던 금빛 횃대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꿈속에서 횃대에 앉아 알링은 부지런히 모이를 먹고 있었다.
‘알링, 다 먹었어?’
단숨에 식사를 마친 알링이 그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짧게 지저귀었다.
한 줌의 모이를 다 먹을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델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타들어 가는 초 몇 개가 방 안의 어둠을 물리치고 있었다. 등불조차 없는 방은 지금의 신전과는 많이 달랐다.
책상으로 걸어가 아델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펼쳐 두고 한참을 고심하다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내렸다.
『흑마법의 방비』
마침내 그 제목 아래 내용을 모두 써냈을 무렵 달빛이 새어 드는 방 안에 또 한 명의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또 알링이랑 놀고 있었어?’
남자가 말을 걸자 아델은 친밀하게 그에게 인사했다.
‘왔냐?’
‘아, 알링이랑 놀고 있던 게 아니었네. 신전에서 책 장사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더니 이상한 상술을 적어 내고 있던 거였네. 칼날을 칼끝으로 찌르면 흑마법이 방비된다니. 말이 되냐.’
그는 아델이 적고 있던 마법서를 흘끗 훔쳐보며 큭큭거렸다.
‘내용이 전체적으로 너무 어려운 것 같아서 재미 삼아 실어 봤는데 상술 같나?’
‘누가 봐도.’
‘그래도 염원을 담아 간절히 기도하면 또 모르는 일이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잠들어 있던 마력이 상대방의 칼날에 깃들어 정말 흑마법을 방비해 줄지도.’
‘웃기는 소리 마! 책 많이 팔려는 수작인 거 모를 줄 알아?’
피식 웃은 아델은 다 써낸 책을 밀어 두었다. 그리고 의자에 깊이 등을 기대며 남자와 마주 봤다.
‘그나저나 할 말이 뭐야? 여기 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눈치는 또 빠르시지. 너 밤새 에스타란토를 보필했다며?’
‘그게 왜?’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는 아델을 보며 남자를 눈살을 찌푸렸다.
‘몰라서 물어? 네 마음을 자중하라는 뜻이야. 우린 에스타란토의 신자야. 그러니 그분은 너와 이루어질 수 없어. 알잖아.’
아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남자의 어깨너머 들창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얀빛이 어른거리는 창가 주위를 아델은 고요히 눈에 담았다.
바로 옆, 그런 아델을 응시하고 있던 알링은 또다시 아름답게 지저귀었다.
뒤늦게 알링과 눈을 맞추고 웃어 주며 아델은 입을 열었다.
‘알아. 그러니 난 다음 생에도 그분의 충신으로 살아갈 거야.’
아델의 말을 들은 남자는 실소를 흘려 버렸다.
‘아주 좋은 다짐이시네. 그런데 에스타란토를 다음 생에도 만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어?’
빈정대는 말투에도 아델은 한없이 진지했다. 그 눈빛은 단호하기까지 했다.
‘만날 거야. 그분의 생엔 내가 언제든 함께할 거거든. 그리고 한눈에 알아볼 거야.’
꿈에서조차 참 소박한 바람을 품었다.
깨어나던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들려오던 자신의 목소리를 되뇌며 그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 사이 눈은 밝음에 적응했다.
화창한 햇빛과 어우러져 너울거리는 연둣빛 이파리가 싱그러웠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여유롭게 풍경을 살피던 아델은 돌연 흘러간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신전의 사람 중 누구도 자신을 찾지 않았고 깨우지 않았다. 그걸로 봐선 다행히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니 아직 회담까지도 시간이 한참 남았겠지.
휴, 그는 안도하며 기지개를 켰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비쳐 든 투명한 빛이 아델의 얼굴 위에 어른거렸다. 가슴에 달린 신전 기사의 휘장도 그 빛 아래서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짧게 잠든 것치고 노곤했던 몸이 몹시 개운해졌다.
-짹.
단잠을 깨운 새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
아델은 불현듯 시선을 낮췄다. 작고 둥글한 새가 바닥에 떨어진 책 표지 위를 콩콩 뛰어다녔다.
“알링?”
아델의 부름에 고개를 갸웃거린 알링이 포르르 날아와 그의 손바닥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 어쩐지 꿈이 이상하다 했더니 알링, 다 너 때문이었구나.”
아델은 아주 편하게 자신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알링을 가는 눈으로 살폈다.
“그렇지? 네가 그런 꿈을 꾸게 한 거지, 알링?”
어느 날 나타나 갑자기 정령조가 되었으니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은 새였다.
어쩌면 말도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알링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의 추궁을 들으면서도 반박하지 못하고 검은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저 멀리에서 바릴호움과 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기척이 가까워지자 알링은 황후궁 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 버렸다.
정령조는 낯을 가린다. 이로써 황후궁 시녀들의 말이 증명된 셈이었다.
아델은 떨어뜨린 책을 주워 들고 흙을 털며 그들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아델 경!”
바릴호움과 줄리아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울상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곧 눈물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글썽이며 말을 이었다.
“떠나신다면서요?”
“소식이 왜 이렇게 빨라? 보나 마나 장로님께서 말씀하셨겠지.”
그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델은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맞아. 나 떠나.”
담담한 한 마디에 그들의 눈시울은 더욱 붉어졌다.
“황후 폐하도 아세요?”
“아니. 떠나기 전날 말씀드릴 거야.”
“안 가면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래. 누가 보면 영영 가는 줄 알겠다.”
“그래도 무려 석 달이잖아요. 왜 갑자기 마법 시약 재료를 구하신다며 떠난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냥.”
“네?”
사실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황제가 기억을 되찾은 밤, 자신은 그런 결심을 했다. 황후 폐하의 곁을 아주 잠시 떠나 있어야겠다고.
‘고맙네. 황후의 곁을 지켜 줘서.’
신전으로 직접 찾아와 자신을 믿고 고마움을 표하던 황제를 보고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
사실 잘 모르겠다. 떠난다 해도 내가 무엇을 정리할 수 있을지.
어쩌면 황후 폐하를 뵐 때마다 떨리고 아리는 이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영원할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엔 영원한 비밀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그러니 마음을 누르고 다시 돌아오는 날엔 지금보다 더 편히 그분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델은 더 이상의 말을 아끼며 부드러운 입매를 휘었다.
그에 좀처럼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바릴호움과 줄리아가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안 돼요. 떠나시려면 저희 손을… 아니, 이 소맷자락을 자르고 가세요!”
“뭐?”
아델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어 버렸다.
평화롭기만 했던 봄날의 오후, 어쩐지 좀 귀찮은 일이 생긴 것만 같았다.
* * *
창가에서 시작된 키스는 한없이 다정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래, 분명 시작은 그랬다.
나는 침대에 누워 열띤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젖혔다. 어둠에 잠긴 밤은 너무나 고요했다. 물기 어린 신음 소리가 그래서 더욱 생생하게 들려왔다.
하드엘의 손이 허리를 더욱 단단히 감쌀 때면 그 소리는 더욱 커져 갔다.
괜히 부끄러워져 고개를 돌리면 그는 내 입술을 삼킬 듯 베어 물었다.
시선을 갈구하는 입맞춤은 끈질겼고 서로의 타액으로 젖어 가는 입술은 갈수록 붉어졌다.
“하드엘.”
나와 눈을 맞추고서야 그가 삼킨 입술을 놓아 주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는 두 손으로 하드엘의 목을 감싸 안았다.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나서 그는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방금 전 아주 적극적으로 날 몰아붙인 사람답지 않게 올라간 입매가 부드러웠다.
“계속 불러 줘.”
하지만 욕망이 선연하게 묻어나는 눈빛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힘없이 픽 웃으며 하드엘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르자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깃들었다.
그는 다시 한번 입 안 여린 살을 더듬어 갔다. 하지만 이번엔 입술에 머문 시간이 짧았다.
목덜미에서 쇄골로 그보다 더 아래로. 다시 처음처럼 느리고 정성스럽게 하드엘은 빠짐없이 입을 맞추었다.
그가 집요해질 때면 숨결에 배어나는 열기가 짙어졌다.
몸 곳곳에 하나둘 그의 흔적이 붉게 새겨지고 있는 게 보였다. 이를 눈에 담는 일은 여전히 부끄러웠는데 싫지는 않았다.
분주하던 하드엘은 서서히 몸을 들었다. 섬세하게 잡힌 몸의 근육에서 나른하게 뜬 회색 눈으로 내 시선이 옮겨 갔다.
하드엘은 잠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강건한 체격이 주는 위압감이 상당했지만 내 눈에 비친 그는 그저 사랑스럽기만 했다.
나는 흐트러진 연한 금빛 머리칼을 가만히 바라만 보다가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에 닿은 보드라운 감촉이 좋았다.
하지만 등줄기를 쓸고 지나간 하드엘의 손이 어디에 닿았는지를 알아챘을 땐 더 이상 그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잠시 후, 하드엘은 너른 품으로 날 꽉 안았다. 그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동안은 눈앞이 흐릿해지는 달콤한 쾌감이 이어졌다.
한참 동안 이어진 몸의 대화는 아까보다 더욱 깊은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정신을 차리고 서서히 눈을 떴을 때 하드엘은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마주 보고 설핏 입매를 휘며 늘 그랬듯 하나둘, 오늘 있던 일을 조곤조곤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없는 점심엔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였는지. 장로가 새로운 백마법사의 임명 문제로 갑자기 찾아오는 바람에 오늘 늦게까지 신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그런 얘기들.
하드엘은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언제나처럼 나긋한 목소리로 일일이 답해 주었다.
불현듯 작별을 고하던 아델이 떠오른 건 내가 오늘 있던 일 전부를 그에게 말했을 즈음이었다.
“폐하, 아델 경이 내일 떠난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