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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62)화 (162/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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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그와 눈을 맞추는 순간 난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하드엘, 그 사람이 돌아왔다.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그리고 이렇게나 떨어져 있지만 그 사실을 깨닫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름다운 눈으로 하드엘 당신이 날 바라봐 주었으니까.

아롱거리는 눈물을 꾹 참고 미소 지으며 나는 한 걸음씩 내디뎌 그의 앞에 다가섰다.

더 이상 그의 손등에는 검은 표식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인데 그걸 확인하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

“저예요, 폐하.”

제자리에서 굳은 채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하드엘이 시선을 아래로 내려 상처가 난 곳을 빤히 응시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끝이 피가 번진 붕대에 닿았다가 이내 툭 떨어졌다.

“플로리아, 내가 당신을…….”

숨을 쉬기가 버거운 사람처럼 하드엘은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의 앞에 서니 상처가 아팠다. 분명 방금까지는 어떠한 느낌도 들지 않았는데.

하지만 “플로리아”라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한 마디가 너무 달콤해서 나는 그만 미소 지어 버렸다.

나는 그의 입술을, 콧날을 그리고 은빛으로 빛나는 두 눈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며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하드엘은 자신의 얼굴에 닿은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곧 붉어진 그의 눈시울 아래로 눈물이 흘렀다.

“안아 주실래요? 지금은 그거면 될 것 같은데.”

나는 손등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온몸에 저절로 따스한 온기가 퍼져 가는 기분이었다. 당신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난 그랬다. 봄의 한복판에 있는 듯 그렇게 마음이 포근했다.

아마 이 감정은 영원하지 않을까. 다가올 봄날에도 그 후 수많은 계절이 흘러도.

하드엘은 거리를 좁혀 다가와 날 안아 주었다.

닿은 품이 따스해 놓고 싶지 않았다. 나와 같은 마음인지 그의 팔에도 힘이 실렸다.

‘아직도 울고 있을까?’

그게 궁금해져 잠시 후 나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날 발견한 그는 낮게 웃어 버렸다. 울고 있는데 웃고 있었다. 그런 하드엘의 모습을 보던 나도 뒤따라 입매를 휘었다.

“플로리아.”

내 입술을 어루만지던 그가 나직이 내 이름을 부르곤 몸을 숙여 다가왔다.

다가올 봄을 예감하게 하는 부드러운 입맞춤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 * *

신전 창가로 비껴들어 온 봄볕이 따스했다.

펜촉을 바쁘게 움직이는 손 위로도 나른한 오전의 빛이 어른거렸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쉼 없이 귓가를 맴돌았다.

백지 한 장이 빼곡히 글씨로 채워지고 나는 다시금 곧은 자세로 새로운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이제는 익숙한 일상이었다.

하드엘은 하드엘의 자리에서, 나는 나의 자리에서. 우린 그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에스타란토의 즉위식은 돌아온 봄날 치러졌다.

제국민들은 들뜬 마음으로 또 한 번 신전의 터에 모였고 내 등장에 열렬한 환성을 쏟아 냈다.

신전의 주인, 제국의 축복, 아벨리움의 수호자.

지금은 익숙해진, 그러나 아직 조금은 낯간지러운 수식을 외쳐 대며 그들은 성대한 즉위식을 지켜보았다.

즉위식은 엄숙하기보다 축제 같은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내가 그걸 원했고, 장로는 이런 내 뜻을 따라줬다. 그래서인지 그날 단상 아래에선 밝은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모두가 찬연한 빛 속에 있었다. 저 웃음을 오래도록 지켜 주고 싶다, 나는 그들을 오래도록 내려다보다 그처럼 기분 좋은 다짐을 곱씹었다.

꽤 길게 이어진 에스타란토의 즉위식은 신전 마법사들의 충성의 서약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끝을 알리는 북소리와 사람들의 함성 속에서도 나는 돌아서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나아가 지난겨울부터 줄곧 생각해 왔던 말을 전했다.

‘폐하와 나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겁니다. 어느 누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전과 황실이 동등한 위치에서 우리 아벨리움을 보살피게 될 거예요.’

이에 반의를 표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제국민들에게 있어 완벽한 성군이었으니까.

나도 하드엘도 제국민들의 앞에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은 손에 쥔 보고서의 내용처럼 나름 좋은 성과로 나타났고.

트리움 왕국의 국왕이 역내의 자유 무역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뜻밖의 재난 피해를 입은 트리움 왕국의 서북지방에 우리 신전의 마법사들을 파견하여 구호 활동을 펼치게 했는데 그에 감동한 왕이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 안건을 검토했다고 한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내려놓았던 펜을 다시 들었다.

그사이 창틀을 넘어 불어오는 실바람에 종잇장이 팔랑 넘어갔다.

연분홍 꽃잎 한 장이 그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날아와 종이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나는 보고에서 잠시 눈을 떼고 연한 꽃잎을 집어 들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봄이 돌아왔다. 그 사실이 새삼 와닿는 순간이었다.

“다시 날려 보내 줄까?”

나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섰다. 손에 힘을 풀자마자 숲길 저편에서 불어온 바람에 실려 꽃잎은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폐하!”

그때였다. 고요한 신전을 뒤흔드는 루안의 명랑한 외침이 들려왔다.

높고 가파른 신전의 계단을 올라왔을 텐데 목소리가 또랑또랑했다.

이제 단련이 된 모양이지? 처음만 해도 울상을 짓더니.

나는 혼자 자그맣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루안, 무슨 일이에요?”

“폐하, 이제 단장을 시작하셔야 해요!”

“벌써요?”

루안이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제 폐하께서는 벌써 기다리고 계세요!”

“폐하께서 기다리신다니요? 그게 무슨…, 아니 그보다 어디에 계시는데요?”

내 물음에 루안을 뒤를 슬쩍 보았다.

설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를 거닐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에 다다라서야 명명하게 울리는 그 소리가 그쳤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그 남자가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여기.”

* * *

넬슨은 황후궁을 가로질러 멀어져 가는 마차를 멍하니 바라봤다.

꽃이 나리는 허공에 부옇게 흙먼지가 일어났다.

새벽까지 한숨도 자지 못한 황제가 미소 그리며 떠났다. 아주 여유롭게.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점차 흐려지자 자리에 서 있던 넬슨은 얼마쯤은 이 기적 같은 일이 믿기지 않아 헛웃음을 흘렸다.

황제가 황후의 일정에 동행하겠다는 말을 전한 것은 며칠 전이었다.

봄의 무도회 때문에 실정을 파악하러 궁 밖을 나서는 황후를 따라나서겠다. 그는 별말 없이 그 한 마디를 단호하고 담담하게 흘렸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일주일 안에 처리해야 할 업무가 집무실 책상에 쌓여 있었다.

온갖 알현 요청에 봄의 무도회를 전후한 각국 정상들의 방문, 정책에 필요한 입법 요구의 검토까지.

그러니 실정 파악의 동행이 절대 불가능하리라 넬슨은 장담할 수 있었다. 적어도 어젯밤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황제는 기어코 며칠 밤을 꼬박 새워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끝냈고, 오늘 아침 황후를 찾았다.

모든 일이 그의 계획대로였다.

조금의 피로도 묻어나지 않는 얼굴로 황후를 마주하는 모습을 보았을 땐 이 따사로운 봄날 넬슨은 목덜미가 서늘해지기까지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었는데 결국 해냈다.

하기야. 지금껏 이어온 황실의 법도를 깨며 황후궁 침실과 황제궁 침실을 합치겠다 선언한 순간에도 황제는 담담했고, 결국 해냈었지.

넬슨은 작은 점처럼 보이는 마차에서 이만 시선을 거두었다.

밤새 혹사한 탓에 눈두덩이가 무거웠다. 저절로 감겨 오는 두 눈을 번쩍 뜨며 넬슨은 생각했다.

우선 잠을 좀 자야겠다고.

* * *

“공녀가 아주 미쳤다며?”

“쯧, 거기서 평생을 살아야 하니 미칠 만도 하지.”

“그만 얘기해 소름 끼쳐 죽겠어. 제 아비도 죽였잖아. 집사의 행적까지 꾸며 내며 누명을 씌우고.”

“아 참, 너희 칸제로스 공작 사후 재판 봤어? 세상에, 그간의 일을 다 묵인했다지? 심지어 도박장의 일도 베르시트 남작과 짜고 쳤다지 뭐야! 더러운 칸제로스!”

시원스러운 분수대의 물줄기 소리 사이로 신랄한 비난조의 말들이 들려왔다.

분수대 앞 벤치에 홀로 앉아 있던 나는 옆 벤치에 나란히 앉은 사람들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듣고 있었다.

온통 칸제로스 공작과 공녀의 이야기뿐이었다.

아, 이제 공작가가 아니니 공작과 공녀도 아니려나.

아무튼. 저번 겨울 레이샤의 마지막 재판이 끝나고 올봄 칸제로스 공작의 사후 재판이 열리며 사람들은 칸제로스의 악행을 지탄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니 저들의 대화 속 대부분의 주제가 칸제로스, 그에 관한 것이라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죽은 이를 상대로 실형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공작이 그렇게나 아끼던 가문의 이름을 더럽힐 수는 있었으니 이것도 나름의 벌이라 해야 하나.

“그런데 황후 폐하께서 공녀의 판결에 있어 절대 사형은 안 된다 못 박으셨다면서?”

“너그럽게 아량을 베푸신 거지.”

“참 인자한 분이셔. 공녀의 목숨도 몇 번씩이나 살려 주셨잖아. 그리고 이번 겨울에 북부 지방에 처음으로 피해가 없었다면서? 백마법사들과 함께 황후 폐하께서…….”

갑작스럽게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제 발 저린 사람처럼 움찔한 나는 티 나지 않게 그들에게서 몸을 살짝 돌리고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 썼다.

베일이 아래로 내려와 얼굴에 더 짙은 그늘을 만들었다.

“그나저나 언제 오는 거지?”

나는 하드엘이 사라진 길가를 기웃거렸다.

아직 실정 파악이 끝나지 않았는데 하드엘은 날 이곳에 홀로 앉혀두고 어딘가로 떠났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시오.’

그가 내게 남긴 말은 그게 전부였다.

무슨 일인지 도무지 예측을 못 하겠단 말이지. 오늘도 이렇게 갑자기 동행한다고 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고.

나는 픽 웃으며 구두 끝으로 작은 돌멩이를 툭툭 건드렸다.

잠시 고개를 숙이는 사이 바닥 아래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천천히 눈을 들자 달콤한 향기가 배어나는 갈색 봉투가 보였다.

“에틀리오 제과점의 퓌이 다무르. 먹고 싶다며.”

나는 번쩍 그를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과 이를 등지고 서 있는 하드엘이 동시에 눈에 담겼다.

“지금 이거 사러 다녀오신 거예요?”

그는 내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턱 끝을 까딱였다.

정말 이 남자를 어쩌면 좋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데 나는 그만 크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하드엘 그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오로지 그 탓에.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렸다. 그의 허술한 변장 탓인 것 같기도, 나의 웃음소리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내민 봉투를 품에 안아 들었다.

“어서 가요, 하드엘.”

“가자니?”

“여긴 사람들이 많잖아요.”

나는 눈짓으로 그가 사 온 퓌이 다무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적한 곳에서 같이 먹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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