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61)화 (161/164)

16609267084896.jpg 

#161

몇 걸음을 두고 멈춰 선 그를 보며 나는 허무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

하드엘의 기억은 일종의 볼모였던 것이다. 내게서 에스타란토의 힘을 빼앗기 위한 볼모.

하지만 제 손에 쥐고 있지도 않은 것으로 거래를 하자니.

모르고 있는 거겠지. 대가로 받아 낸 그 사람의 기억이 어디로 갔는지.

“내가 왜 네게 그 힘을 줘야 하지?”

“황제 폐하를 평생 고통 속에 살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분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살려 준다는 허술한 거짓말에 모든 걸 내놓겠다고 나섰는데.”

“거짓말?”

“그때 폐하께서는 제 흑마법에 공격당해 어떻게 되실만한 상태가 아니셨거든요. 오히려 애를 먹은 건 저였죠.”

“그럼 나를 살려 준다 속여 황제 폐하께 기억을 대가로 받아 냈다. 이 말인가?”

그가 빙긋거리며 순순히 인정했다. 그 태도가 너무나 태연했다. 심지어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눈은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흑마법에 의지해야 할 만큼 나의 생이 하드엘 당신에겐 간절했던 거였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되니 가슴 한구석이 못 견디게 아려오는 동시에 분노가 들끓었다.

팔에 난 상처에 더 이상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난 차게 식은 눈으로 앞에 있는 흑마법사를 마주 봤다. 그러자 남자는 울상을 지어 보이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입가에 깃든 웃음의 여운까지 감추지는 못한 모습이었다.

“이런, 속이 많이 상하셨나 봅니다.”

나른히 눈을 내리뜬 그 흑마법사는 대뜸 팔을 뻗어 내 눈가를 쓸었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의 손길이 닿은 것만으로 소름이 끼쳐 와 나는 그의 손을 쳐 냈다.

“치워.”

그는 아래로 떨어진 손을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이자 대충 넘긴 짙은 갈색의 머리칼이 이마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거 어쩐지 서운한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그는 눈썹을 치켜떴다.

“앞으로 함께 할 사이잖아요, 우리.”

“뭐?”

“아, 제가 말씀을 안 드렸던가요? 에스타란토의 힘을 제게 넘기고 폐하께서 저를 따라 궁을 떠나는 것까지가 황제의 기억과 마음을 되돌려 드리는 조건입니다.”

난 저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헛소리가 믿기지 않아 제자리에 서서 어떠한 말도 잇지 못했다.

미친 건가?

사실 그렇게 묻고 싶은 것도 같았다.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는 대신 나는 얼굴을 굳혔다.

나를 담은 저 두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황제보다도 더욱 아껴 드리겠습니다.”

“이러는 이유가 뭐야?”

“다들 이유를 물으시네. 이유라는 게 그렇게나 중요한가?”

활짝 열린 창문 너머에서 시린 바람이 불어왔다. 맑고 냉한 공기가 손끝을 스쳤다. 핏방울이 묻어 있는 드레스 자락도 너울거렸다.

마르누아, 그자는 느긋하게 창가에 등을 기대고 서더니 나를 찬찬히 훑었다.

“그냥 그러고 싶어졌어요.”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매만지며 그처럼 허무한 답을 내놓았다.

“지겨울 만큼 오래 살면 재미있는 것을 좇게 되는 법이지요.”

“하.”

더 이상 그와 나눌 말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손끝에 힘을 모았다. 한기가 느껴지는 방 안에서 열감은 생생히 전달되었다.

그를 없애야 한다. 그래야 모든 일이 끝이 난다.

그렇게 생각하고 붉은빛이 떠오른 손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절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여기서 제가 사라지면 황제께선 기억을 영영 되찾지 못하실 텐데요?”

그자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날 비웃으며 눈썹을 치켜떴다.

“널 죽이면 황제 폐하께선 기억을 영영 잃으시나?”

“기억은 잃으시고 마음은 돌아오시겠죠. 그게 더한 괴로움인 걸 아시죠?”

괴로움이라.

나는 부드럽게 입매를 휘었다.

“그런데 말이야. 쥔 것이 있어야 거래를 하는 게 아닌가?”

줄곧 미소 짓던 얼굴이 그제야 싸하게 일변하였다.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던 얇은 시폰 커튼이 이제는 거세게 휘날렸다. 그는 한팔로 거슬리는 커튼을 치워 내며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어떻게 알았지?”

“그 기억이 어디 있는지 보셨구나? 그렇죠?”

연달아 질문을 던진 그가 내 턱 끝을 움켜잡아 시선을 끌어왔다.

에스타란토의 힘이 흑마법을 가리고 있다. 그러니 아무리 자신의 마력이라도 그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겠지.

“오래 살았다니 마침 다행이야. 이제 이 세상에 미련이 없을 거 아니야.”

그의 손에 악력이 더해졌다. 마치 내 눈빛을 읽어 내려는 듯 그는 몸을 기울여 코앞까지 다가섰다.

뜨거운 기운이 몸 전체에 번지자 전보다 심장 박동 소리가 거세졌다. 분노로 일어난 힘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손끝에서 피어오른 붉은빛을 난 그의 앞에 던졌다.

파편처럼 튀어 오른 그것이 순식간에 타오르는 불꽃처럼 그를 뒤덮었다.

“전 폐하를 선택했는데.”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결코 평온하지 못했다.

곧이어 검은빛과 붉은빛이 충돌하며 거센 소용돌이가 일었다.

유리가 깨지고 금속 날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귓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의 굉음이 울리고 잠시 뒤, 비등하던 빛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내 눈에 보인 것은 문드러져 어른거리는 검은 형체가 전부였다.

“내 앞에서 사라져. 영원히.”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시야를 아득하게 하는 붉은빛이 온 사방을 물들였다.

* * *

“폐하!”

아델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것은 눈앞의 모든 빛이 연기처럼 스러졌을 때였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햇빛만이 창 너머로 비껴들어 멍하니 홀로 서 있는 나를 비추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내가 자리에 주저앉으려 하자 달려온 아델이 나를 부축했다.

“안 다치셨습니까? 방금 빛이……!”

“다 끝났어요. 정말 이제 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넋이 나가 읊조렸다.

방금까지 그 남자가 서 있던 곳에 뿌연 먼지가 부유하고 있었다.

다리에 힘을 주고 바로 서자 아델은 조심스럽게 나를 놓아 주었다.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깨진 화병과 흐트러진 서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잔잔한 바람 소리가 전부인 침실을 배회하던 눈은 협탁 위에서 멈추었다.

방금 내 눈앞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현실임을 알려 주듯 흑마법사가 벗어 둔 검은 가면이 그곳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폐하, 어떻게 된 건가요? 그 흑마법사는요?”

“사라졌어요.”

“소멸되었단 말씀이세요?”

소멸. 그래 그건 소멸이었다.

그는 마치 이 세상에 없던 사람처럼 사라졌다. 내가 본 그 남자의 마지막은 그랬다.

눈앞의 검은 형체가 붉은빛에 완전히 삼켜졌을 때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음만 맴돌았다. 거센 저항을 견뎌낸 내 몸은 사정없이 떨렸고 그 후엔 피로가 몰려와 맥이 빠지듯 힘이 풀렸다.

그게 다였다.

“맞아요, 소멸.”

나는 한참 만에야 아델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아델은 내 눈길이 닿아 있는 협탁 위 검은 가면을 바라보다 다소 고조되어 말을 이었다.

“그 흑마법사 다른 이들에게 지금껏 수명을 받아 자신의 생명을 이어온 모양입니다. 마법사가 소멸되는 경우는 그뿐입니다. 어쨌거나 폐하께서 해내신 겁니다!”

-짹. 짹.

불현듯 평화로운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들어 문득 고개를 드니 마른 가지에 앉아 날 지켜보는 알링이 보였다.

덕분에 차츰 시야가 넓어졌다.

올겨울 들어 가장 밝고 환한 빛이 굳은 땅 아래 투명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툭. 창가로 다가서자 손등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쌓인 눈이 녹고 있었다. 동시에 숲길로, 아니, 하드엘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그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드레스의 양 끝을 잡고 돌아섰다.

황후궁으로 우르르 몰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폐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방금 어마어마한 에스타란토의 힘이 느껴졌습니다!”

신전 사람들이 모두 달려왔다. 신전 기사들과 장로가 그 무리에 섞여 있었다.

뒤늦게 그들을 쫓아온 루안과 부인도 숨을 고르며 이쪽을 기웃거렸다.

“가세요, 폐하.”

열린 문 너머 가득한 사람들을 보던 아델은 조급해하던 내게 나직한 한마디를 던졌다.

팔 위 상처에 머문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내 눈에 닿았다. 아주 오랜만에 아델이 웃고 있었다. 입매를 휘자 그의 양 볼엔 보조개가 피었다.

“여긴 제가 알아서 잘 해결하겠습니다. 대신 상처를 치료해야 하니 빨리 돌아오셔야 합니다.”

“아델 경.”

“어서요.”

환한 햇살이 담긴 아델의 눈빛은 따스했다. 그가 저런 표정일 때 대부분의 일은 잘 풀렸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를 믿고 가야지.

“고마워요.”

나는 그대로 황후궁 출구를 향해 나아 갔다.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이들은 당황하여 날 부르면서도 저절로 길을 내주었다.

하드엘, 그의 얼굴이 떠오를수록 걸음을 빨라졌고, 숨은 차올랐다.

기쁘고 벅찼다.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던 숲길에 가까워질수록 이 감정은 더욱 선명해졌다.

* * *

숲길엔 그 사람이 없었다. 이미 하드엘은 자리를 떠난 후였다.

나는 그를 찾아가기 전에 눈길에 버려진 검을 들었다. 그리고 에스타란토의 붉은빛을 걷어 내고 흑마법을 없앴다.

그렇게 차례대로, 너무나 쉽게 끝냈다.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을 때 검에서 마력이라 부를 만한 힘은 더 이상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마른 가지를 쪼며 분주하게 먹이를 찾는 새가 보였다. 빼곡한 나무들의 그림자가 눈길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주변이 너무나 고요했다. 특별할 것 없는 겨울날의 정오였다.

내가 하드엘과 보낸, 그 하루들 중 어느 날 같았다.

“그러니 당신도 되돌아왔을까?”

그 질문을 던지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막연한 불안감과 기대감이 동시에 떠올랐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기도 전에 눈길을 다시 달렸다. 그렇게 쉬지 않고 황제궁에 도착했다.

“넬슨 백작!”

낮은 계단을 서성이는 백작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내 부름에 그는 고개를 휙 돌렸다. 나를 발견한 백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폐하는요?”

그는 단숨에 내 앞으로 뛰어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방금 황후궁으로 가셨습니다!”

“황후궁으로요?”

“네, 그리고 황후 폐하! 아무래도 폐하께서 기억을……!”

“고마워요!”

나는 평소 잘 다니지 않는 지름길을 찾아 다시 드레스의 끝을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쌓인 눈을 치우지 않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구두굽이 자꾸만 눈길에 푹푹 박혔다. 마음이 급해 이 길을 택했는데 자꾸만 지체되니 애가 탔다.

힘겹게 황후궁에 도착한 나는 입구에서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루안을 발견했다. 그녀의 볼이 추위에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루안, 폐하는요?”

말을 할 때마다 새어 나온 더운 숨이 하얀 입김으로 변해 찬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루안은 잽싸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표정도 넬슨 백작과 다를 것이 없었다.

요즘 매일같이 시름에 젖어 있던 얼굴이 맑게 개어 있었다.

“폐하께서 방금 황후 폐하를 찾으러 가셨어요! 안 그래도 제가 나서 황후 폐하를 찾아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황후 폐하! 그보다 폐하께서…….”

“고마워요!”

나는 무작정 발길이 향하는 곳을 따랐다.

하드엘이 나를 찾으러 갔다는 말에 당장 생각나는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에스트라의 화원.

그가 왠지 그곳에 있을 것 같았다. 무엇도 약속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냥 당신이니까. 나와 함께 보낸 날을 기억한다면 당신의 발길은 나와 같은 곳을 향하고 있겠지.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자 가쁜 숨결에서는 이제 쇳내가 묻어났다.

눈으로 덮인 에스트라의 화원이 시야에 한가득 담겼을 때가 되어서야 난 걸음을 늦출 수 있었다.

화원의 한 가운데에 있는 다리에 하드엘 그가 서 있었다.

이 추운 날씨에 셔츠 한 장만 걸치고 그는 붉어진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백금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하얀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폐하.”

나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었다. 바삐 움직이던 하드엘의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