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하드엘은 쥐고 있던 검을 스스로 떨어뜨렸다. 칼날에 묻어 있던 핏물에 새하얀 눈길이 다시금 젖어 들었다.
그는 방금까지 황후가 서 있던 자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길을 따라 수없이 이어져 온 작은 발자국이 자신의 앞에 멈춰 있었다.
‘폐하, 사실 저 하나도 안 괜찮아요. 저 아파요. 그러니 폐하께서 일으켜 주세요. 그러기로 약속했잖아요.’
숨이 막힐 듯한 슬픔이 그를 집어삼켰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슬픔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괴로움은 분명 저 여자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그런데 왜 나는…….
그녀는 매번 참아 내던 눈물을 기어코 터트렸다. 그 와중에도 고집스럽게 웃고 있었다.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불쾌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드는 생각은 이처럼 여전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이제 자신을 수렁에 빠뜨렸다.
발아래 펼쳐진 끝없는 어둠이 그는 처음으로 두려워졌다.
분명 이전의 나는 빛 속에 있었는데.
그처럼 찬연한 나날을 보내왔는데.
하드엘은 천천히 고개를 젖혔다. 잎이 진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겨울 하늘답지 않게 맑았다.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이 그의 시야에 담겼다.
‘아니요. 폐하께서는 제가 죽길 바라실 분이 아닙니다.’
가까이서 본 말간 검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해 대는 순간마다 그 눈은 더욱 투명하게 빛났다.
하드엘은 잠시 눈을 감고 떴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벤 검을 쥐었던 자신의 손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슬픔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 사실을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 * *
“이쯤 하면 된 것 같은데.”
마르누아는 제 손가락 끝으로 허벅지를 툭툭 치던 행동을 멈추고 나무줄기에 기대 서 있던 몸을 일으켰다.
잠시 소란이 일었던 숲길은 이제 고요하기만 했다.
그곳에 남은 것은 황후의 핏자국과 버려진 검이 전부였다. 날이 선 칼날은 눈길에 박힌 채 번뜩였다.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보던 마르누아는 황후궁으로 난 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갔다.
“우리 황후 폐하께서는 참으로 미련하시지.”
그래서 내겐 참으로 다행인 건가?
픽. 짤막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팔을 타고 흐른 피가 손끝에 맺혀 뚝뚝 떨어지는데도 황후는 부드럽게 입매를 휘며 웃어 주었다. 황제를 향해.
아까의 장면은 그의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았다.
이상하게 되뇔수록 묘한 짜증이 밀려왔지만 마르누아는 그 거슬리는 장면들을 굳이 떨쳐 내려 하지 않았다.
그저 재밌고, 즐거워서.
다양한 표정을 담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기억하는 것은 이유 모를 찝찝함을 지울 만큼이나 흥미로웠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이마 위로 넘겼다. 그리고 재킷의 흙먼지를 털고 셔츠의 깃을 정돈했다.
이대로 살아왔으니 이대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사실 무엇을 위하여 이토록 애를 쓰는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에스타란토의 힘을 얻기 위해 저 여자가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저 여자를 얻기 위해 에스타란토의 힘이 필요한 것일까.
문득 떠오른 질문에 잠시 멈춰 서서 고민하던 마르누아는 답을 내는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에스타란토에 집착하는 얼간이들을 닮아 가나? 내가?’
어쨌든 여기까지 온 이상 원하는 바를 이뤄야지.
펼쳐진 길 위, 이미 움푹 팬 작은 발자국이 제 갈 길을 알려 주고 있었다.
숲길 나무들을 뒤흔든 서늘한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산책이라도 하듯 한가롭게 마르누아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 * *
“폐하.”
아델은 겨우 목소리를 내 나를 불렀다. 주먹을 쥔 커다란 두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아델 경.”
내 부름에 답하는 대신 아델은 상처가 난 내 팔 위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결국 닿지 못했다.
그는 물기 어린 시선을 떨구며 까마득한 슬픔에 잠긴 듯 낮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창가에서부터 드리워진 나무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에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아델 경.”
나는 다시 한번 아델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걸음을 옮겼다.
명료한 발자국 소리가 정적 속에서 또렷하게 울렸다.
아델은 뒤에 있는 서랍을 하나씩 열었다. 그리고 붕대를 찾아 들고 다시 내 앞에 되돌아왔다.
그는 내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상처가 난 곳에 가져온 붕대를 감아 주기 시작했다. 하얀 헝겊이 피에 젖어 들었다.
붕대의 끝을 묶는 그 순간까지도 아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델의 붉은 눈가를 살폈다. 내 걱정을 할 그를 배려하지 못했다.
“…미안해요.”
나지막이 말을 뱉자 무겁게 내려앉은 그의 음성이 뒤늦게 들려왔다.
“폐하께서 제게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잠시만 여기 계세요.”
“아니요, 아델 경. 나 돌아가야 해요.”
“돌아가신다니요. 폐하께선 다치셨습니다! 제발… 이번 한 번만은 폐하를 먼저 생각해 주세요. 저를 보아서라도 제발…….”
나는 간절히 애원하는 아델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 긴 속눈썹이 젖어 들어 있었다. 그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가 슬프게 빛났다.
하지만 내 뜻을 굽힐 수 없었다.
당장 돌아가 아까 본 검은빛. 그걸 없애야 한다.
나는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검은빛이 무엇인지.
그것은 흑마법사에게 빼앗긴 하드엘의 기억이었다. 에스타란토의 붉은 힘이 이를 보호하고 있던 것이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운명을 바뀌었고. 승패는 갈렸다.
아델이 건네준 마법서의 마지막 장에 적혀 있던 『흑마법의 방비』 그것을 따른 날.
‘첫 번째 생애의 끝이 반복되지 않길.’
‘내가 기억하는 그 비참한 결말이 부디 달라지길.’
그 간절한 기도를 했을 때부터. 그래, 어쩌면 그 순간부터 결말은 바뀐 거였다.
영원한 행복. 동화에서 나올 법한 그 아름다운 끝으로.
단순한 의식이 정말로 효력을 발휘한 것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다. 그러니 하드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황제 폐하의 검을 감싸고도는 검은빛을 봤어요. 그걸 없애면 그분의 기억이 되돌아올 거예요. 그러니 다시 가야 해요.”
“네? 빛이라니 그게 무슨…….”
-똑똑. 똑.
그때였다. 가볍게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델과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얼굴의 반을 검은 가면으로 가린 남자가 나를 보고 아주 환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예를 갖추듯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가 폈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의 시작과 끝. 내가 또 한 번의 생을 거쳐 아벨리움에 되돌아온 이유.
“참 시기적절하게 등장해 주네요.”
이 긴 이야기의 결말은 이미 정해졌고 두려울 건 없었다. 그를 보자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이제 질긴 악연을 모두 끊어 낼 때가 왔다.’
“폐하, 피하십시오.”
그가 흑마법사라는 걸 아델도 직감한 모양이다. 나란히 서 있던 아델은 곧장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하지만 그를 상대하는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지금껏 기다려 왔던 자입니다.”
“하지만 지금 많이 다치셨습니다.”
“아델 경, 난 그대들이 보호해야 할 황후이기 이전에 그대들을 지켜야 할 에스타란토예요.”
무엇보다 반드시 내 손으로 끝내고 싶었다. 그토록 기다려 왔던 순간이니까.
“날 믿어 줘요.”
끝까지 망설이던 아델이 오래도록 나를 응시하다가 결국 한발 물러났다.
아델은 상처가 난 팔을 내려다보며 낮게 읊조렸다.
“폐하께서 다치시면 아까처럼 가만히 있진 못합니다. 그땐 제가 나서겠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해 줘요, 아델 경.”
난 설핏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흑마법사를 담은 눈에 웃음기는 거두어졌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 창을 열었다.
“드디어 뵙네요. 이렇게 직접.”
처음 듣는 목소리는 나직하고 섬세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렸던 자답지 않은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나를 빤히 보는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날렵한 몸짓으로 창틀을 딛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거리가 좁혀지자 그에게서 배어나는 찬기가 내게도 전해져 왔다.
마력을 쓰지 않았는데 그 남자에게선 음험하고 어두운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둘이 있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나와 마주 선 흑마법사는 뒤에 있는 아델을 눈으로 가리키고선 까딱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 왔다. 언뜻 상냥해 보이는 어투에 오만한 미소가 곁들어져 있었다.
나는 아델에게 이를 따를 것을 지시했다.
냉한 눈으로 흑마법사를 노려본 아델은 내 단호함에 마지못해 뒤돌았다.
진작 이 상황을 예상한 듯 아델은 더 이상 나를 말리지 않았다. 아니, 말리지 못했다 하는 편이 맞았다.
문 앞에 선 마지막 순간 아델은 허리를 굽히고 기사의 예를 다했다.
그렇게 이 방을 나서는 아델을 끝까지 지켜보는데 돌연 앞에서 이상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여기저기 죄다 거슬리네.”
나는 고개를 바로 해 흑마법사를 응시했다.
흑갈색 눈이 창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빛의 농도에 따라 색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얼핏 지금 그의 눈동자는 검은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델이 사라진 자리를 오래도록 바라보던 흑마법사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서서히 시야를 낮춰 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나긋하게 미소 지었다.
“마르누아입니다. 제 이름.”
그의 이름이 뭐든 궁금하지 않았다. 곧 내 손에 사라질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고.
하드엘의 기억이 그의 손에 없는 걸 알게 된 이상 이리 마주 보고 서 있는 이유는 하나다.
그간 벌인 일의 의도를 묻기 위해.
공녀와의 계약이 아니라면 원래 그는 이리 나올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대체 왜?
다시 본 그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게다가 저 가면…….
“당신, 그 애 맞지? 가을날 나무 아래 서 있던 애. 그때부터 날 쫓았던 건가? 내게 원하는 게 뭐지?”
“역시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기억해 주시니 영광이기도 하고. 그런데 엄밀히 말해 쫓은 건 아니죠. 그날 저는 다른 이를 찾아왔다고 분명 폐하께 말씀을 드린 걸로 기억하는데.”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춘 그가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한발 물러서자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뭐,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니셨어요. 언젠가부터 폐하의 뒤를 쫓기는 했으니.”
뒷짐을 지고 날 스쳐 지나간 남자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침실을 거닐다가 협탁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느릿한 손길로 가면을 고정하는 끈을 풀었다. 뜬금없는 행동이었다.
무언가를 요구하러 온 사람치곤 한없이 느긋했다.
길게 비쳐 든 한 줄기 햇빛이 협탁 위를 스쳐 갔다. 그는 정확히 빛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그곳에 가면을 내려놓았다.
“폐하와 있을 땐 풀어도 될 것 같아서. 이게 보기보다 꽤 답답하거든요.”
가면에 가려져 있던 상처가 드러났다. 비스듬히 흉이 진 상처 주위는 여전히 곪아 있었다.
얼굴을 내보이고 내 반응을 살피는 것 같던 그는 잠시 후 만족스러운 웃음이 깃든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셨죠?”
맨틀피스에 진열되어 있는 촛대와 보석의 세공품을 손가락 끝으로 일일이 쓸며 그는 내게 다시 다가왔다. 곧 붉은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에스타란토의 힘. 제게 에스타란토의 힘을 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