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폐하를 또 찾아가셨다고?”
“그래, 황제궁 분위기가 날마다 살얼음판이야. 뭔 일이라도 날까 무서워 죽겠다니까.”
신전의 뒤편으로 펼쳐진 숲을 거닐며 산책하는 시녀들의 말소리가 아델의 귓가에 들려왔다.
온종일 같은 이야기였다.
황후가 황제의 기억을 되찾아 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고, 그에 비해 황제는 또 어찌나 무정한지.
황제는 상처를 주는 말들을 또 얼마나 서슴없이 하는지, 그걸 듣는 황후가 환히 웃는 모습에 마음이 아릿해진다는 그런 얘기들.
잠시 후, 심각하게 중얼거리던 시녀들이 멀어지며 목소리가 옅어졌다.
아델은 황후궁으로 향하던 걸음을 늦췄다. 해가 가려지지 않는 앙상한 나무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에 드리워졌다.
듣고 있기 괴로운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는데도 쉽사리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그는 유독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욕이 새어 나왔다.
황제가 왜 저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는 알고 있다.
흑마법. 그 때문이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도 아주 잘 알지만 그걸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황제에게 모진 말을 듣고도 꿋꿋이 웃으며 돌아와 흑마법에 관련된 서적을 펼쳐 드는 플로리아를 생각하면 아델은 도저히 황제를 너그러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견디는지,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는지 그것을 알기에 더더욱.
아델은 잠시 감았던 눈을 느리게 떴다. 오후의 노곤한 햇살이 물든 눈동자가 아름다운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나.
며칠째 같은 고민을 하는 아델은 입술을 짓씹으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황후를 말릴 순 없다. 일주일 사이 몇 번이나 시도했고, 실패했다.
자신이 위로가 되어 줄 수도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니니까.
“아델 경!”
그때였다. 아델을 발견한 릴리가 신전 계단에서 내려와 빠르게 달려왔다.
“아직 황후궁에 안 가셨네요?”
“생각 좀 하느라.”
릴리는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건 분명 황후 폐하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넋 나간 듯 서 있는 일이 드문 사람이다.
릴리는 몇 번의 고초를 통해 아델을 파악했다. 그가 미소를 짓는 이유도, 심각하게 인상을 구기는 이유도 모두 황후에게 있었다.
아델은 아주 충성스러운 신전 기사였다.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며 릴리는 그를 다독이려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에 관해 생각 중이셨습니까? 걱정 마세요. 저희도 노력하고 있고 황후 폐하께서 에스타란토의 힘을 깨워 내셨으니…….”
“안 되겠어.”
“네?”
아델이 대뜸 던진 말에 릴리는 눈을 크게 떴다.
“릴리, 네가 나 대신 황후궁에 가 줘야겠다. 장로님이 황후 폐하께 무슨 말을 전해 달라고 하셨는지 잘 기억하고 있지?”
“네, 그렇기는 한데…….”
“부탁할게.”
“어, 어! 아델 경!”
아델은 더한 말도 없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곧바로 등을 돌려 멀어졌다.
기다란 망토 자락이 차가운 바람에 휘날렸다.
* * *
참 끈질긴 여자였다.
일주일을 쉬지 않고 찾아오는 걸 보면.
하드엘은 느릿한 손길로 서류를 넘겼다. 종잇장이 가볍게 넘어가는 소리 사이로 부드러운, 그래서 더욱 신경을 긁어 대는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내일 또 찾아올게요.’
오늘도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렇게.
짓이겨진 꽃을 안고 가는 뒷모습이 떠오르자 펜을 쥐고 있는 손이 멈칫했다. 새하얀 종이 위로 잉크가 툭 떨어졌다.
지저분한 얼룩은 차츰 번져 갔다.
잠잠한 눈빛으로 이를 내려다보던 하드엘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정말 죽여야 찾아오지 않으려나.”
잊고 싶은 그 여자의 모습이 또다시 생생히 그려졌다.
죽이고 싶다. 매번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왜 모든 감각이 그 여자를 향해 있는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사소한 손짓과 말투를 기억하고 되뇌는 것이 그를 더 괴롭게 했다.
하드엘은 잉크가 번진 종이를 구겼다. 손에 힘이 실릴수록 푸른 힘줄과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날로 심해져 가는 두통이 또다시 찾아오려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황후가 다녀간 후면 매번 이랬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거슬리고 불쾌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구겼던 종이를 버렸다. 그리고 다시 보고서를 펼쳐 들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눈매와 달리 자세는 곧고 반듯했다.
“폐하, 아델 경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시종이 반갑지 않은 손님의 등장을 알린 건 그때였다.
아델. 황후의 옆에 붙어 다니는 그자다.
번갈아 찾아와서 어쩌자는 건지.
마법사들은 원래 이리 끈질긴가?
“폐하, 아델 경께서…….”
“들라 하라.”
대답이 없자 시종은 듣기 싫은 소식을 재차 전했다. 그에 하드엘은 여전히 서류에 눈을 두고 무심하게 명했다.
곧 문이 열리고 기사의 제복을 갖춰 입은 아델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저자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도 같았다. 그리 애가 타서 황후를 지켜본 기사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야 뻔하니까.
충성심이 갸륵하기도 하지.
“무슨 일인가?”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아델은 정중히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의 곧은 눈이 천천히 하드엘에게 닿았다. 그 무렵 하드엘도 고개를 들었다.
유순한 인상을 지닌 자였다. 황후와 꽤 닮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 거슬리긴 매한가지다.
“말해 보아라.”
“부디 황후 폐하께 모진 말과 행동을 삼가 주세요.”
예상과 딱 떨어지는 말을 겁도 없이 뱉는 신전 마법사를 보며 하드엘은 노골적으로 냉소했다.
“네가 무엇이기에 내게 명하지?”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
그 단어를 되짚으며 하드엘은 손에 쥔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황후를 위해 죽자고 달려드는 거만한 신전 마법사를 빤히 응시했다.
“싫다면, 무릎이라도 꿇을 생각인가?”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 눈빛이 너무나 단호해 우스울 지경이었다.
에스타란토를 위해 무릎까지 굽히는 신전 기사라. 꽤 감동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아델 경.”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부른 하드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걸음을 내디뎌 다가서는 순간에 그의 얼굴 위로는 어떠한 표정도 드리워지지 않았다.
“내게 이런 부탁을 할 게 아니라 가서 황후를 말리는 게 좋을 거야.”
고아하게 번뜩이는 신전 기사의 휘장을 살핀 하드엘이 턱 끝을 들었다.
곧 핏기가 서린 입술이 벌어졌다.
“내가 그 여자를 죽이고 싶은 것 같거든.”
그 잔인한 말을 뱉는 순간에도 하드엘의 눈빛은 고요했다. 아니, 오히려 텅 비어 있었다.
한 줌 쥐었던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공허한 느낌은 또 다른 불쾌감을 선사했다.
뭔지 모를 거북함이 치밀었다.
그래도 머리를 짓누르는 통증은 그제야 가셨다. 뭐든 좋았다. 이 끔찍한 고통이 사라질 수만 있다면.
침묵이 찾아오자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커져 갔다.
차게 식은 눈으로 아델을 바라보던 그는 이만하여 돌아섰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었다. 세상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밝은 달빛 아래, 또 한 번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며칠이 따스하더니, 다시 겨울임이 와닿았다.
차갑고 맑은 공기 속에 하얀 입김이 스르르 흩어졌다.
걸음을 재촉해 황제궁에 도착한 나는 머리 위에 내려앉은 굵은 눈송이를 털어 냈다.
‘폐하, 황제 폐하께서 잠이 드셨습니다.’
설마 깨어 있는 건 아니겠지. 넬슨 백작이 재차 확인했다 했으니 그럴 리 없을 거야.
얼어붙은 손을 녹이며 나는 그의 침실로 향했다. 기사들은 내 등장에 조심스럽게 길을 내주었다.
거대한 침실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조금씩 다가서자 눈을 감고 있는 하드엘의 모습이 보였다.
달빛에만 의지하여 본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걸음을 내디뎌 난 그의 곁에 섰다.
“하드엘.”
그의 이름을 그의 앞에서 오랜만에 속삭여 보았다. 반응 없이 고요한 모습이었다.
진짜 잠든 게 맞구나.
그제야 마음 놓고 침대 끝에 걸터앉아 나는 그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며칠 사이 마른 얼굴이 느껴졌다.
얼굴선이 날카로워진 탓인지 그에게서 감도는 분위기가 전보다 서늘했다.
이를 깨닫자 손끝이 아릿해졌다.
이렇듯 당신은 나로 인해 잃은 것이 너무나 많은데. 하드엘, 당신에게 받은 만큼 난 내주지 못했다.
또 언제나 당신은 나와 한 약속을 지켜줬는데 나는 매번…….
손등에 새겨진 검은 표식에 시선이 닿았다.
“이런 불행을 두 번이나 겪게 해서 미안해요.”
나직하게 중얼거린 나는 잠시 손을 내려 이 표식을 가만히 쓸었다가 꼭 쥐었다.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붉은빛이 아슴푸레 번졌다.
그 빛은 어둠 속에서 물결처럼 찰랑이다가 스르르 꺼져갔다.
‘역시 오늘도 안 되는구나.’
나는 미동도 없는 하드엘을 내려다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요 며칠 내내 그를 치유하기 위해 힘을 쓰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하드엘의 기억이 없기 때문.
에스타란토의 힘은 흑마법보다 강하다. 하지만 없는 기억을 되찾아 줄 수는 없었다.
기억에 없는 대상을 혐오하도록 하는 어둠이 심어졌으니 이는 뿌리 없는 증오에 가깝다. 그러니 이 또한 내가 해결하지 못한다.
하드엘의 기억을 지닌 흑마법사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곧 나타날 것 같은데. 그 곧이라는 게 언제인지 모르니 애만 탔다.
차라리 먼저 나서서 찾아야 하나.
하지만 난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치를 쉽게 들킬 거였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겠지. 분명 그자도 날 기다리고 있어.
하드엘, 당신은 도대체 흑마법사와 도대체 어떤 거래를 한 걸까.
무엇을 받았기에 이처럼 많은 것을 내줬지? 설마 나와 관련된…….
짐작이 가도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과 감긴 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을 숙여 그곳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플로리아, 당신에게 나를 바치겠소.’
언제 다시 당신이 그날처럼 날 바라봐 줄까.
가슴이 욱신거려왔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에 나는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영원할 것 같은 어둠 속, 하얀 달빛이 창 너머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