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제법 씩씩하네.”
황제궁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선 플로리아가 웃고 있었다. 금빛 꽃다발을 한 아름 안은 채였다.
그녀의 머리 위로는 그 꽃잎의 색을 닮은 오후의 햇살이 어른거렸다.
자신을 증오하는 황제에게 가는 사람답지 않게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수줍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눈에 거슬리는데도 또 재미있었다.
우아한 걸음으로 나아가던 그녀는 잠시 멈춰 서더니 황제에게 전할 말을 혼자 되뇌었다.
부드러운 입술에선 그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르누아는 미간을 좁히고선 피식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황후 폐하께서 애가 좀 타야 내가 나타날 텐데. 이거 어쩌나.”
마르누아는 다시 가벼운 걸음을 내딛는 플로리아를 뒤쫓았다. 왜 이렇게 지나친 관심을 쏟고 있는지 그조차 모를 일이었다.
황후궁 주위를 맴돌고, 기다렸다. 창가 너머로 그녀가 모습을 비출 때까지 종일.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녀가 지닌 에스타란토의 힘 때문이다. 그는 그처럼 단순한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그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마르누아는 가지를 사뿐히 딛고 섰다.
기다린 시간과 비례하지 않게 플로리아는 금세 황제궁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바람에 나부끼는 붉은 머리칼이 마지막까지 그의 시야에 담겼다.
이제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슬슬 가 볼까.”
플로리아가 지나온 길을 내려다보며 그가 몸을 돌렸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금빛 꽃잎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붉은 입술 끝이 휘어졌다.
곧장 땅으로 내려간 마르누아는 그 꽃잎 한 장을 직접 주워 들었다.
손끝에 잡힌 여린 꽃잎이 몸을 떨었다.
바람이 잦아들 무렵 그것을 하늘 높이 올려 보자 얇은 꽃잎에 투명한 빛이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그는 도로 팔을 내리고 꽃잎을 쥔 손에 주먹을 쥐었다.
이런 꽃을 한 아름 받으면 어떤 기분이려나.
무의미한 의문을 품는 것이 우스웠다. 마르누아는 피식거리며 이만 걸음을 돌렸다. 기사의 망토가 그의 등 뒤에서 펄럭거렸다.
옥사 안에 다다라서야 그는 걸음의 속도를 늦췄다. 누군가를 찾듯 느리게 움직이던 눈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너! 너……!”
등불이 겨우 어둠을 몰아내는 곳에서 마르누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의 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은 레이샤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한동안 말문이 막힌 채로 레이샤는 창살 너머 남자를 바라봤다. 그 사이 마르누아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네가 어떻게…….”
“아가씨께 사죄나 드릴까 하고요. 마음이 안 좋더라고. 그나저나 못 뵌 사이 몸이 많이 상하셨네요.”
마르누아는 여유롭게 빙긋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한 레이샤는 분노에 차올라 눈을 번쩍 떴다.
“네까짓 게 감히 나를 배신해? 너 때문에 내가 이딴 처지가 된 거야. 두고 봐!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우선 당장 날 여기서 꺼내!”
“두고 보라니? 아가씨께서 무엇을 어찌하실 수 있는데요?”
“너 잊었어? 계약을 한 흑마법사가 계약의 내용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계약자가 원하는 대로 대가를 치러야…….”
풋.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르누아는 장난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언제 계약을 했는데요?”
“황후를 죽여 주겠다고, 그리 말을 해서 계약을 했잖아!”
“그런데 아가씨는 대가를 내어 주지 않았지요.”
“그건 네가 필요 없다 했으니까.”
“손등에 표식은? 새겼나?”
마르누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눈썹을 치켜떴다. 그가 되물을수록 레이샤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 갔다.
차가운 쇠창살을 잡고 있던 그녀의 양손이 툭 떨어졌다.
“너 설마 처음부터… 황후를 죽일 생각이 없었던 거야?”
마르누아가 턱 끝을 까닥이자 등불의 빛이 알른거리는 검은 가면이 그 움직임에 따라 반뜻거렸다.
“어차피 아가씨의 뜻대로 황후를 죽일 수도 없었어요. 황후가 에스타란토의 힘을 진작 다루고 있었거든. 그러니 너무 아쉬워 말아요.”
“솔직하게 말하면 됐잖아! 그러면 왜 날 속였어? 도대체 왜!”
별것 아닌 질문이었다. 그러나 한참을 고민하다 마르누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후를 죽일 다른 방법을 찾을 것 같아서.”
덤덤한 한 마디가 섬뜩하게 울렸다. 생각지도 못한 답에 레이샤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뭐……?”
“그땐 저도 황후가 에스타란토의 힘을 다루고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에스타란토의 힘을 빼앗아야 하는데 아가씨가 미친 사람처럼 나서 방해하면 큰일이니까. 그래서 속였어요.”
여유롭게 그녀에게 다가선 마르누아가 레이샤와 눈높이를 맞춰 시선을 내렸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선과 눈매는 더욱 날카로웠다.
“마침 아가씨께서 알려 주신 약점이란 게 제법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참인데. 아차, 그럼 고맙다는 인사도 해야 하나? 하지만 ‘미안한데 고마워요’라기엔… 그건 좀 웃기긴 한데.”
큭큭 웃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의 얼굴을 간신히 비추던 등불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아스라이 흔들렸다.
마르누아가 서서히 허리를 폈다.
“고맙고 미안해요. 이편이 낫겠다. 그렇죠?”
레이샤는 깊은숨을 내쉬며 고개를 바로 들었다. 옥 안에서도 꼿꼿한 모습이었다.
이건 제 처지를 모른다 해야 하나? 내리뜬 눈으로 공녀를 바라보던 그는 실없이 웃다 몸을 돌렸다.
“거기서! 에스타란토의 힘을 빼앗고 후에 황후를 죽여. 그렇게 다시 계약해.”
그런 마르누아를 붙잡은 건 레이샤의 한 마디였다.
마르누아는 비스듬히 올라갔던 입꼬리를 바로 하며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황후를 죽여라…….
일말의 고민도 필요 없었다.
내가 왜?
“싫은데.”
“에스타란토의 힘만 가져가면 그 여자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잖아! 내가 대가를 내어 준다니까?”
“제가 그 여자를 데려갈 거거든요. 에스타란토의 힘과 함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거린 레이샤가 뒤늦게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젖혀 웃어댔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황후를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좋아한다? 꼭 그런 이유가 필요한가? 재밌잖아요.”
마르누아는 자리에 서서 레이샤를 지켜봤다. 들썩이는 어깨에 맞춰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이 흔들렸다.
바람을 타고 물결치던 황후의 붉은 머리가 떠오른 건 순간이었다.
“아가씨보다 그쪽이 훨씬 재밌으니까.”
“미쳤어.”
고인 눈물을 닦아 내며 레이샤가 읊조렸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을 기민하게 알아들은 마르누아가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아가씨께 들으니 꽤 신선한데. 인정받은 것 같고 막 그러네?”
그때 복도를 거닐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옆을 흘끗 보더니 그녀가 갇혀 있는 쇠창살로부터 한 걸음씩 천천히 물러났다.
“그럼 그 후에 날 꺼내 줘.”
멀어지는 그를 보며 쇠창살 사이로 손을 뻗은 레이샤가 다급히 말을 꺼냈다.
마르누아는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검은 가면 위로 짙은 갈색의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그것도 싫은데.”
“그, 그건 가능하잖아!”
마르누아는 전보다 간절해진 외침에 답하는 대신 빙긋 웃었다.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몸을 숙인 그는 정중히 인사를 건네며 일말의 여지없는 작별을 고했다.
“누가 오네요, 그럼 아가씨,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 * *
하드엘의 침실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문턱을 넘어섰다.
전과 다름없는 풍경 속에 달라진 유일한 것이라면 유리 화병이 다시 텅 비어 있다는 것. 그 하나였다.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카드도 함께 버려진 듯했다.
“괜찮아.”
나는 담담하게 웃으며 한 아름 안은 데르카바를 화병 옆에 내려놓았다. 온실에서 자란 금빛 꽃잎이 이전보다 더 싱싱했다.
‘폐하께서 매주 데르카바를 찾으셨거든요.’
정원사가 전한 말이 떠올랐다.
데르카바가 이 겨울에도 곧바로 준비될 수 있던 이유는 하드엘, 그 사람 때문이었다.
더 예쁘고 풍성하게 꽃이 피어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찾는 꽃이니까.
나는 이제 아무것도 꽂혀 있지 않은 유리 화병을 바라봤다. 화병의 굴곡을 따라 눈부신 햇빛이 조각났다.
그래서 시들지 않고 매번 같은 자리에, 매번 아름답게 피어 있던 거였구나.
“시들기 전에 당신이 먼저 알아차리니까…….”
당연한 사실을 난 왜 이제야 알았을까.
나는 손을 뻗어 여린 꽃잎을 부드럽게 쓸어 보았다.
‘이 꽃을 보면 당신이 생각날 테니까. 가까이 두는 게 내겐 득이지.’
듣기 좋은 그의 목소리가 낮게 번지는 것만 착각이 들었다.
그때 당신은 웃고 있었는데.
눈을 감고 그날을 되새기는 사이 발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일정한 구두굽 소리가 내 앞에 다다라서 끊겼다.
“누가 황후를 이곳에 들였지?”
머릿속을 맴돌던 그의 목소리가 뒤따라 귓가를 스쳤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달리 한기를 가득 실은 목소리. 하지만 나직하고 특유의 음색이 맑은 그 목소리의 주인은 오로지 하드엘뿐이었다.
나는 서서히 눈을 떠 그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오셨습니까.”
“넬슨.”
자신을 부르는 선득한 목소리에 백작은 주춤했다. 하드엘이 오는 시각을 내게 일러 주었으니 찔리는 게 많은 탓이었다.
나는 그런 백작과 눈을 맞추고 나가 보라 명하며 다시 그를 보았다.
“제가 멋대로 찾아온 것입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드릴 게 있어서요.”
내가 데르카바를 내려다보자 그의 시선도 아래를 향했다. 화병 옆에 놓여 있는 금빛 꽃다발을 발견한 하드엘은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했다.
“눈에 띄지 말라 했을 텐데. 황후, 그대는 귀가 어두운 건가?”
“폐하께서 좋아하신 꽃입니다. 데르카바, 이 꽃의 꽃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꿋꿋이 말을 하자 하드엘은 인상을 쓰더니 아예 몸을 틀었다.
되돌아 나가려는 듯 걸음을 내딛기에 나는 그의 팔목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데르카바, 금빛 꽃잎, 나의 첫사랑.”
그리고 그에게 전했던 마음을 읊었다. 그가 알아 주길, 그가 기억해 주길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알려 주고 싶었다. 당신이 잊고 있는 추억이 무엇인지.
피로감이 짙게 배어 있는 한숨 소리가 방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돌아서서 잡힌 팔목을 바라보던 하드엘이 화가 난 사람처럼 물어왔다.
“그걸 내가 알아야 하나?”
두 눈의 서려 있는 검은빛은 어제보다 더 짙어져 있었다.
그가 내 손을 끌어 내렸다.
툭. 내려진 손이 협탁을 스치자 그 위에 올려 있던 데르카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풍성하게 엮어 만든 꽃다발이 흐트러졌다. 봄날 오후의 햇살과 꼭 닮은 꽃잎 몇 장이 주위에 흩뿌려졌다.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 해도…….”
하드엘은 눈앞의 데르카바를 보란 듯 짓밟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의 구두굽 아래 화사한 꽃잎이 너저분하게 뭉그러졌다.
“지금은 아니야.”
그는 나를 몰아세우려는 듯 겨우 한 뼘의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망가진 데르카바를 보던 시선을 천천히 들자 그가 보였다.
날 어떻게든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눈으로 그가 속삭였다.
“그러니 나가.”
도무지 익숙하지 않은 눈빛으로 익숙하지 않은 말을 뱉는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단 한 번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거라곤 상상해 본 적 없는 말들.
그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마주하니 아팠다. 사실 괴로웠다. 그럴수록 나는 환히 웃었다. 종일 연습했던 대로.
걱정했지만 꽤 잘 해냈다.
나는 그의 뒤로 걸어가 목이 꺾인 꽃다발을 안아 들었다.
“그럼 새로운 꽃을 들고 내일 다시 올게요.”
“다시 온다니?”
“내일이 되면 폐하의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르니까요.”
“하.”
허무한 실소를 흘리며 그는 내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의 발아래 떨어진 꽃잎 몇 장이 검게 짓뭉개져 있었다.
“그럼 내일 봬요.”
다음을 기약하는 말을 남기며 나는 그에게 인사했다.
아주 밝게, 슬픔이 보이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