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56)화 (156/164)

16609266889157.jpg 

#156

하드엘은 정말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자 삭막한 겨울 풍경만이 보였다.

황제궁으로 향하는 길이 이제 텅 비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무렵 옆에 있던 아델이 조용히 날 불렀다.

“폐하.”

나는 고개를 돌렸다. 따스하게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이 비쳤다.

힘겹게 버티고 선 내 모습이.

괜찮냐고. 아델은 그리 묻고 싶은 것 같았지만 난 대답해 줄 수 없는 말을 피해 다른 주제로 침묵을 깼다.

“아델 경, 그대도 누구의 짓인지 눈치챘죠?”

나를 살피던 그가 잠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기억만 가져간 게 아니에요. 그는 폐하의 마음에 어둠까지 심었습니다.”

“그런데 흑마법사가 왜 황제 폐하를…….”

“나도 그게 이상했어요. 공녀는 이미 갇혔는데 지금 상황에 이런 계약으로 득을 볼 게 없잖아요. 아무래도 이번은 그자가 스스로 일을 꾸민 듯싶어요.”

“네?”

“폐하에게서 나에 대한 기억만 가져갔다…….”

이를 통해 하드엘로부터 흑마법사가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하나였다.

없다. 그는 하드엘에게서 무엇도 얻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가 노린 건 애초에 하드엘이 아니었다.

“뭔지는 몰라도 내게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아델은 미간을 구겼다. 앞으로 내가 어찌 나올지를 읽어 내는 건 그에겐 쉬운 일이다.

그는 입술을 짓씹더니 곧 단호히 나를 막고 섰다.

“폐하, 절대 나서시면 안 됩니다. 부디 저희에게 맡겨 주세요.”

“아니요, 황제 폐하의 기억을 되찾고 싶은 사람은 납니다. 누구보다 간절해요. 즉, 곧 흑마법사를 찾을 사람도 나라는 뜻이죠. 내가 그자를 원하게 되는 게 그 흑마법사의 의도라면 기꺼이 난 미끼가 되어 볼래요.”

흑마법사는 자신을 원하는 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기다리면 그자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에스타란토의 힘을 깨워 낸 이상 나도 전처럼 당하고 있지만은 않아.

“아델 경, 아무리 그대라도 이번은 날 말릴 수 없어요.”

아델은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깊은숨을 토해 냈다. 어떤 말도 잇지 못하고 그는 불그스름해진 내 눈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폐하 곁엔 내가 있을게요. 혹시 모르잖아요. 내가 옆에 있으면 폐하의 상태가 좋아질지도.”

나는 애써 웃었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으니까.

차가운 공기를 쐬어도 가슴이 답답한 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만은 아주 뚜렷하고 맑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흘러나온 입김이 빠르게 흩어졌다.

언제 베였는지 모를 손등의 상처를 가리며 난 하드엘이 사라진 길목을 똑바로 응시했다.

* * *

“폐하!”

“넬슨, 내가 말로 하는 것도 여기까지야.”

의자에 기대앉은 하드엘이 내리뜬 눈을 들어 넬슨에게 경고했다.

황후, 황후.

아까부터 뒤를 쫓으며 계속해서 그 여자 얘기뿐이었다.

‘폐하께서 잊어서는 안 되는 분입니다.’

‘어떻게 폐하께서 황후 폐하께…….’

자주 말문이 막히는 듯했지만 쉴 새 없이 늘어놓는 말만은 한결같았다.

그는 이 상황이 못 견디게 지겨웠다.

“하지만, 폐하.”

“그만.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 하였다.”

하드엘은 넬슨에게서 아예 시선을 돌리며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섰다.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에스트라의 화원이 그의 시야에 가득 찼다. 눈으로 새하얗게 뒤덮인 화원이 햇빛 아래 은빛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여전히 그곳엔 황후, 그 여자가 서 있었다. 그 여자를 애타게 바라보는 기사도 함께였다.

하드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런데 저 기사는 누구지?”

넬슨은 흘긋 고개를 들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답했다.

“신전 기사단 아델 경입니다.”

“뭐? 신전 기사단?”

황제가 기억을 잃었다. 그것도 황후에 대한 기억만. 하드엘의 반응을 보고도 그 사실을 믿지 못했던 넬슨이 이제야 침통한 탄식을 흘렸다.

신전 기사단이라. 그렇다면 벌써 에스타란토의 힘을 깨워 냈다는 뜻인가.

하드엘은 유심히 플로리아를 살폈다.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 있던 그녀가 돌아서고 멀어지기까지 그의 눈은 오로지 플로리아만을 향해 있었다.

‘저를 기억하지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폐하를 기억하니까요. 그거면 됩니다.’

이상하지.

가까이에서 본 얼굴도, 귓가를 맴도는 목소리도 생소했다.

다른 모든 것은 이렇게나 또렷한데 저 여자와 관련된 것만 생각나지 않았다.

“어째서.”

하드엘은 떠오르는 의문을 홀로 읊조렸다.

하지만 무의미할 뿐이었다. 넬슨이 저리 유난스럽게 나오는 이유도, 그녀를 보자마자 찾아든 불쾌감도 전부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그가 잠에서 깨어난 건 정오가 다 된 시각이었다. 눈을 뜨니 곁에는 의원이 있었고 그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소스라치게 놀라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찾아온 넬슨도 이와 비슷한 반응을 내비쳤다. 놀라움 그리고 기쁨.

이후 넬슨의 입으로 들은 이야기는 황당하기만 했다. 이 추운 날 바닥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고.

얼어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그 말을 전해 들을 때까지만 해도 그리 웃고 넘겼다.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다리 위에서 그 여자를 만난 후였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던 여자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눈물을 참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잘되지 않는지 되지도 않는 말을 뱉는 순간에도, 억지로 웃어 보이는 순간에도 입술 끝을 작게 떨었다.

그녀는 눈빛으로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런데 그 여자를 빤히 볼수록 입이 바짝 탔다. 마른 모래가 목 안에서 서걱거리는 기분이었다.

죽여.

귓가에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온 건 그 무렵이었다. 마주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목소리는 한층 집요해졌다.

원인 모를 두통이 찾아들자 불쾌감 또한 짙어졌다.

죽여.

죽이고 싶다. 그 생각이 정말 순식간에 머릿속을 뒤덮자 그는 곧바로 돌아섰다. 그리고 뒤를 보지 않고 걸었다.

그저 당장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이유라면 고작 그게 전부였다.

“번거롭게 됐어. 진작 없앴어야 했는데.”

“폐하!”

“에스타란토가 황후라니. 난 그간 뭘 하고 있던 거지?”

그는 넬슨의 외침에 낮게 실소하며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안타까움에 탄식하던 넬슨은 아까보다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황후 폐하를 누구보다 앞서 보호하신 건 폐하이십니다. 장로께 명해 신전 기사단까지 창단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내가 뭘 해?”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 넬슨을 바라봤다. 바닥까지 길게 내려온 책장의 그림자가 그의 위로 드리워졌다. 옅은 어둠 속에서 회색 눈은 첨예하게 빛나고 있었다.

“신전 기사단을 만들라 명하시고, 창단식을 직접 준비하시고, 반발하는 귀족들을 막으시고. 전부 폐하께서 하신 일입니다.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께 모든 것을 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그분을 사랑하시니까요.”

* * *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르 떴다.

어느덧 아침이었다. 맑은 알링의 울음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

몸을 일으키고 창문을 여니 새벽 공기처럼 쌀랑한 바람이 불어왔다.

조그마한 알링은 내 손바닥에 앉아 얼굴을 비볐다.

“폐하…….”

가지에 쌓인 눈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자니 루안의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빙긋 웃으며 돌아보았다.

“루안, 추워요? 문을 닫을까요?”

루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쉽사리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걸 보니 하드엘에 관한 일이겠구나.

어제 모든 사정을 듣게 된 후로 루안은 줄곧 우울한 모습이었다. 사실 루안뿐 아니라 전체적인 황궁의 분위기가 그러했다.

에스타란토의 힘이 깨어나고 공녀가 잡혀 드디어 마지막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 기쁨을 온전히 느껴 보기도 전에 하드엘이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이 궁 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되고 모든 이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젠 내 얘기만 나오면 질색을 하는 하드엘 탓에 황제궁의 시녀들은 입을 닫았고 황후궁 시녀들은 내 눈치를 살폈다.

황후를 잊은 황제. 하루 만에 그는 나를 잊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추위 탓에 뺨이 붉어진 건 알고 있소?’

아직도 난 그의 온기가 익숙한데.

“저기 폐하, 그게 어제 말씀하신 데르카바 말인데요.”

망설이던 루안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데르카바. 내가 어제저녁 루안에게 구해 달라 부탁한 꽃이었다. 나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 꽃이 벌써 준비되었나요?”

“네…….”

“그럼 정원사에게 서둘러 가져오라 해 줘요.”

“하지만 폐하, 가시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

루안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하드엘의 앞에 나섰다가 내가 괜한 곤욕이라도 당할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예상처럼 하드엘이 무슨 말을 해도, 내게 어떠한 상처를 줘도 난 그저 웃고 있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미련하게 보일지도 알았다. 하지만 그를 보지 못하는 것보단 그편이 나았다.

당신이 곁에 없는 것은 내겐 불행이니까.

“루안 걱정 말아요. 폐하는 폐하세요. 다른 누구일 수 없어요.”

나는 더욱 화사하게 미소를 그려 냈다. 더는 나를 말리지 못한 루안은 정원사를 데려오겠다며 무거운 걸음을 옮겨 황후궁을 나섰다.

나는 알링을 쓰다듬으며 다시 고개를 들고 창밖을 내다봤다. 저 멀리 하드엘과 함께 걷던 산책길이 보였다.

그 길 위를 나란히 걷는 당신과 내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우린 서로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을 먹었는지, 오전엔 무엇을 했는지, 함께 어떤 차를 마실지. 그처럼 별거 아닌 사소한 이야기들을 아주 재미있게.

거짓말처럼 공중엔 새하얀 꽃이 펴 나리고 호숫가에서 불어온 부드러운 봄바람이 손등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내가 맞잡은 손에 살며시 힘을 실으면 당신은 더 많이 웃어 주었다.

그런 봄날이었다. 당신과 함께해 더욱 찬란한 봄날.

다시 눈을 감았다 뜨자 그려 낸 풍경이 서서히 스러졌다.

눈에 담긴 것은 바람에 휘청거리는 얇은 가지와 누구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눈길이 전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