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폐하!”
황후궁에 들어서자 시녀들이 반갑게 날 맞았다.
신전의 터에서 있던 일을 모두 들었는지 그녀들은 저마다 신이 나 재잘거렸다.
주된 이야기는 에스타란토의 힘과, 알링 그리고 공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몇 분간 그녀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답을 해 주다가 겨우 자리에서 빠져나와 주변을 살폈다.
신전의 터에서 작별한 알링이 태연히 창가에 앉아 있었다. 내가 오기 전까지 시녀들에게 시달린 모양인지 몸을 웅크린 채 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알링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또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서재부터 집무실, 침실 심지어 응접실까지 샅샅이 둘러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없었다.
신전의 터에 오지 않았으니 황후궁에서 날 기다리고 있겠지, 그리 생각하며 황후궁에 먼저 걸음 했으나 이번에도 아니었다.
“아델 경.”
아델은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나는 내 뒤를 따르고 있던 아델을 부르며 몸을 돌렸다.
아무리 바빠도 하드엘이 날 이리 찾지 않을 리가 없다. 뭔가 이유가 있는 것이다. 틀림없어.
“네, 말씀하시지요.”
“폐하께서 황제궁에 계신 게 맞나요?”
“저도 루안 양에게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어제저녁 이후로는 저 역시 폐하를 뵙지 못했습니다.”
“뵙지 못했다고요?”
가슴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레이샤는 옥에 갇혀 있고, 흑마법사는 날 죽이는 데 실패했고. 그러니 더 이상 벌어질 일은 없는데 왜…….
하드엘 그 사람의 얼굴을 당장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황제궁에 가 봐야겠어요.”
나는 그 길로 곧장 걸음을 옮겨 황후궁의 출구를 향해 갔다. 투명한 햇살이 복도에 비스듬히 비쳐 들었다.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 말을 되뇔수록 걸음의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창마다 스며든 빛줄기가 얼굴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황후 폐하!”
이런 나를 멈춰 세운 것은 루안이었다. 맞은편에서 나를 발견한 그녀는 빠르게 달려왔다.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 접견실로 갔는데 그곳에 안 계셔서…….”
“길이 엇갈린 모양이에요. 그런데 루안, 미안하지만 조금 있다가 얘기해 줄래요? 폐하를 만나야 해서.”
“잠시만요!”
루안이 다급히 나를 붙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가 마른침을 삼키고선 천천히 눈을 들었다. 다시 본 루안의 눈가에 눈물이 어렸다.
“그게, 실은…….”
“루안, 말해 봐요.”
나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 서서 루안을 마주했다.
오늘 아침 하드엘의 행방을 묻는 말에 머뭇거렸던 루안의 모습이 지금에 와 이상하게 여겨졌다.
왜 그랬을까. 진작 품었어야 할 의문이었다. 그가 내 옆에 없을 때 그걸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하드엘에 관한 일일 걸 알면서도 아니기를 바랐다.
그렇게 나는 숨죽여 루안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창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가 아까보다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어제 새벽, 폐하께서 쓰러지신 채 발견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 깨어나지 못하셨어요.”
“쓰러졌다니. 그게 무슨…….”
“황후 폐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면 충격에 몸이 약해지실까 깨어나셨을 때 바로 말씀을 드리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흐흑.”
말도 안 돼. 하드엘 당신이 왜.
이제야 끝이 보인다 생각했다. 흑마법사만 찾으면 모두 끝나는 일이라고, 그렇게 기뻐했다.
행복해질 일만 남았는데. 그런데 도대체 당신이 왜…….
“폐하는 지금 어디 계세요?”
젖은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황제궁에…….”
나는 넓게 퍼진 드레스를 모아 잡고 달렸다.
“황후 폐하!”
아델의 부름에도, 루안의 부름에도 돌아볼 수 없었다. 그저 하드엘, 그 사람을 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가슴이 막막해져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시야가 뿌옇게 변하자 세상이 흐릿해졌다.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당신을 먼저 찾았어야 했는데.
내 눈앞에 없는 당신을 먼저 걱정했어야 했다 나는.
하드엘 그 사람은 매번 내게 모든 것을 내줬는데. 나는 돌아보지 못했구나.
당신은 어느 때나 나를 바라봐 주었는데 나는…….
쉬지 않고 달려 에스트라의 화원에 다다랐다. 나는 눈물을 닦아 내며 서서히 걸음을 늦췄다.
꽃이 진 자리에 눈이 쌓였다. 설원처럼 펼쳐진 화원의 한가운데에 있는 다리. 그곳에 거짓말처럼 깨어나지 못했다던 하드엘이 서 있었다. 뒷짐을 지고 선 그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폐하.”
나는 울음을 삼켜 내며 그를 나지막이 불렀다. 들리지 않으리란 걸 알지만 그래도 좋았다.
앙상한 가지 사이를 고스란히 통과한 한 줄기 햇빛이 눈을 찔러 왔다. 그럼에도 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가 무사하다. 그 사실이 안도감과 함께 마음에 뒤번진 슬픔을 사그라트렸다.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가 설수록 하드엘과 가까워졌다.
“폐하.”
나는 다시 한번 그를 불러 보았다. 그런데 여전히 하드엘은 무표정하게 날 응시했다.
이번엔 분명 내 목소리가 들렸을 텐데. 날 담은 회색빛 눈에 어떠한 감정도 깃들지 않았다. 기쁨도, 반가움도. 날 마주 보면 웃어 주던 날들의 따스함도 없었다.
다리 위에 올라서서 나는 그와 점차 거리를 좁혔다. 하드엘은 제자리에서 날 찬찬히 훑고 있었다. 발끝에 닿았던 시선이 내 눈동자로 느리게 옮겨 왔을 때 난 알 수 있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것만 같은 회색 눈이 어둠에 물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모든 짓을 누가 벌였는지까지.
“폐하……!”
“비켜라.”
하드엘은 내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들은 적 없는 시린 음성으로 물러설 것을 명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는 날 이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살리지 말라. 그리 명하던 순간마저도…….
차가운 바람에 살갗이 아려 왔다. 달려오는 길에 낮은 나목에 스친 손등이 욱신거렸다.
나는 드레스를 꽉 그러쥐었다.
“비키라 하였을 텐데.”
그의 손등에서 검은 표식이 반뜩였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아 내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 아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후 폐하!”
“아델 경…….”
결국 난 하드엘을 지키지 못한 걸까.
그리도 노력했는데, 닿은 결말은 고작 이런 거였나.
“괜찮으십니까?”
아델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나와 하드엘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도 무언가 이상함을 직감한 것이었다. 시야를 가리는 아델의 어깨가 가쁘게 오르내렸다.
“지금 신전의 마법사가 황제의 앞에서 누구를 보호하려 드는 것이냐?”
“황후 폐하이십니다. 제국의 에스타란토이시고요.”
“뭐?”
하드엘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도 들은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 사이 황제궁 쪽에서 달려온 넬슨 백작은 내게 인사를 건네며 이 상황을 어리둥절하게 지켜봤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넬슨.”
“예, 폐하.”
“저자의 말이 사실이더냐? 저 여자가 에스타란토라고?”
그가 아델의 어깨너머에 있는 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던 백작의 얼굴은 점차 굳어졌다.
“폐하… 그게 무슨…….”
“진짜인가 보군.”
“지, 지금 농을 하시는 것이지요?”
“황후가 에스타란토라…….”
하드엘은 낮게 실소했다. 그 주변엔 하얀 입김이 서렸다가 금세 흩어졌다. 비스듬히 올라간 입매 끝에 자조적인 웃음이 걸렸다.
“에스타란토라면 어떻게 내가 이제껏 저 여자를 살려 둔 거지?”
“폐하!”
“시끄럽다.”
“저, 정말 기억이 없으신 겁니까? 어떻게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잊고 싶은 사람이니 이리 쉽게 잊은 것이겠지.”
잊고 싶은 사람.
진심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의 한 마디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견뎌 냈다. 여기서 무너지면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절대 여기가 우리의 끝이어서는 안 되는데.
넬슨 백작의 낯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나는 아델의 호위를 뚫고 나아가 무슨 말인가를 더하려 하는 넬슨 백작을 말렸다.
어차피 소용없었다.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을 테니.
“그만. 그만해요, 백작.”
“황후 폐하.”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하드엘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날 보고 있는데, 그 눈엔 여전히 내가 담겨 있는데 눈빛은 온기 없이 차게 식어 있었다.
숲길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드레스 자락이 흔들렸다.
날이 선 고요 속에서 사락거리는 소리가 세상 소리의 전부인 양 들려왔다.
목에서 울컥거리는 뜨거운 덩이를 삼켜 내며 나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울분을 토해 내고, 억울하다 소리치고 싶었다.
하드엘 당신과 함께 아침을 맞고,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보내고. 그래, 내가 바란 것은 그처럼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는데 왜 내겐 그마저도 힘이 드는 건지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죄다 쏟아 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니 그의 앞에서 비참하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냥 난 울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악을 써도 결국 여기에 다다랐다. 원래의 운명처럼. 하드엘을 지키지 못했다는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게 내가 맞이해야 하는 결말이었다면 애초에 내가 다시 돌아오지도 않았겠지.
이 세계에서의 내 운명은 이미 바뀌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어떻게든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드엘도, 내 삶도,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까지도.
“저를 기억하지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꿋꿋한 자세로 그를 마주 보며 입매를 휘었다.
‘사랑해.’
그리고 그처럼 다정히 속삭여 주던 하드엘의 모습을 떠올렸다.
뺨을 어루만져 주던 부드러운 손길도, 쓰러지던 날 안으며 울부짖던 그의 모습도 빠짐없이 하나둘 그려 보았다.
내 앞에 있는 이는 하드엘이었다. 다른 누구일 수도 없는 하드엘, 그 남자였다. 날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준 사람.
그러니 당신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해.
“제가 폐하를 기억하니까요. 그거면 됩니다.”
하드엘은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한참 날 빤히 보았다. 처음처럼 나를 훑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 들었던 시선을 다시 내려 내 눈을 마주 보다 그는 돌아섰다.
“앞으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익숙하지 않은 냉혹한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그는 마지막 순간 그 한 마디만을 남긴 채 멀어져 갔다.
넬슨 백작은 나와 하드엘을 번갈아 보다 급히 그를 뒤따라갔다.
정갈한 구둣발 소리가 아득해졌다. 나는 시야에서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