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제가 무엇을 잘못해서 도망을 가야 하나요? 여러분, 제가 에스타란토입니다. 칸제로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먼저 에스타란토의 힘을 보여 드린 것도 저예요. 다들 보셨잖아요!”
레이샤는 계속해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랭하기만 했다.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레이샤는 그들의 따가운 눈총을 견뎌 내며 꿋꿋이 제 망상을 떠들어 댔다.
몸을 숨기고 머나먼 왕국으로 도주라도 하는 편이 네게 가장 최선의 결말이었을 텐데.
결국 야욕을 버리지 못해 자신이 어찌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저리 서 있구나.
녹은 눈 탓에 그녀가 입은 순백의 드레스 자락이 지저분하게 젖어 들어갔다.
흙탕물이 튄 구두도 더러워지긴 매한가지였다.
나는 단상 위에서 레이샤의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망가진 그녀를 비추는 햇살은 어느 때보다 눈부셨다.
구겨진 이맛살, 투명하게 부푼 눈, 이 와중에 분노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추악한 칸제로스의 공녀다운, 그래, 레이샤. 이제야 너다운 얼굴이었다.
참 멀리 돌아왔지. 결국 이런 끝을 맞이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기사들에게 그녀를 추포하라 명하며 미련 없이 뒤돌았다. 신전 기사들도 앞서가는 날 호위하며 뒤따랐다.
그렇게 몇 걸음 내디뎌 단상의 계단을 향해 나아 갔을 때였다.
“폐, 폐하!”
경탄하는 장로의 목소리에 난 자리에 멈춰 서야 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머리 위에 비쳐 들던 햇빛이 사라지고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주변이 온통 어스레한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멀리에서 맑은 새소리가 아렴풋이 들려왔다. 숲길에서 메아리쳐 울리듯 그 소리는 하늘 아래 은은히 번져 들렸다.
장로가 떨리는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저, 정령조 입니다! 에스타란토의 빛을 쫓아 정령조가 왔습니다!”
감격에 벅차올라 말을 하는 장로의 목소리를 듣고 신전 기사단과 자리에 모인 이들이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 또한 서서히 눈을 들었다.
찬 공기를 가르고 날아오는 붉은 새 한 마리가 보였다.
그 새가 커다란 날개를 우아하게 너울거릴 때마다 땅에 내리쬐는 은빛 햇살이 자취를 감추었고 숲길에 늘어선 마른 가지가 바르르 울어 댔다.
멀리에서부터 일어나는 바람에 신전의 터 한가운데에 솟은 불기둥이 춤을 추듯 거불거렸다.
‘정령조는 어마어마하게 크거든요. 하늘을 날면 그 날개가 태양을 가릴 정도라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죠.’
아델이 했던 말이 문득 상기되었다.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말이었구나.
나는 반짝이는 붉은빛 날개를 멍하니 바라보다 점점 가까워지는 새와 눈을 맞추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어우러진 검은색 눈동자. 그 시선이 오롯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그런데 왜 낯설지가 않지?’
내가 미간을 좁히고 한 걸음 나아가자 새는 더욱 빠르게 날아 신전의 터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곧 내 머리 위에서 원을 그렸다.
그 날갯짓에 세찬 바람이 연달아 불어왔다.
“감축드립니다, 폐하! 정령조가 에스타란토인 폐하를 알아본 것입니다!”
장로의 하얀 머리칼이 바람에 헝클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개의치 않고 눈시울을 붉힌 채 감탄하여 말하였다.
다들 경외심에 휩싸인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가운데 나만이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정령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눈. 그리고 저 붉은 빛깔. 무엇보다 날 저리 보는 새라면 다른 새일 수가 없는데.
“장로, 혹시 저 새…….”
“네?”
나는 더한 말을 붙이는 대신 한 발 앞으로 걸어가 휘파람을 불었다.
‘알링이라면 반응할 거야.’
휘익. 맑고 청청한 휘파람 소리가 짧게 울렸다.
그러자 내 주변을 맴돌던 정령조가 곡선을 그리다 돌연 진로를 바꾸어 내게로 날아왔다.
저 멀리 있는 해를 뒤덮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몸집이 순식간에 점점 작아졌다.
정령조의 몸집이 내 주먹의 크기와 비슷해졌을 때 비로소 내가 아는 동글동글한 눈매가 나타났다.
설마 했던 마음에 확신이 섰다.
“알링!”
-짹! 짹!
나는 두 손을 모아 팔을 뻗었다. 알링은 언제나처럼 내 손안에 들어와 앉았다.
따스한 온기가 손안에 퍼지는 동시에 보드라운 깃털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너 정령조였어?”
-짹!
알링의 지저귐이 들리자 오늘 아침 날 깨우던 수호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새소리를 듣고 따라간 곳에서 만난 그 빛의 목소리.
맞아, 그러고 보니 수호자가 나타났던 모든 순간마다 알링이 있었어.
“뭐, 뭐야……! 알링? 어떻게 네가 정령조야?”
넋을 잃고 정령조를 바라보던 아델이 빠르게 달려와 내 손 안을 살폈다.
뒤늦게 장로와 신전 기사들도 달려와 날 에워쌌다.
알링은 아델에게만 유독 살갑게 반응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허!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었다니! 진작 주인을 알아본 모양입니다.”
조그마한 알링을 빤히 쳐다보던 장로가 한 걸음 물러나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서 그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내게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벨리움의 빛이신 에스타란토님을 뵈옵니다.”
아델을 포함한 신전 기사들은 알링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그런 장로를 뒤따라 저마다 엄숙한 인사말을 건넸다.
이를 시작으로 단상 아래에선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봤어? 폐하께서 정령조를 이미 다루고 계셨어!”
그들은 북받치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환호했다.
귓가를 얼얼하게 하는 환성에 나는 미소 짓는 것으로 화답했다.
“다들 미쳤나 봐. 플로리아 너같이 천한 몰락 귀족을 신처럼 받들다니.”
그런데 그때, 열띤 분위기 속에서 차게 식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단상 아래 사람들은 여전히 기쁨에 취해 있었다.
신전 기사들과 장로 그리고 나만이 등 뒤에서 들린 꺼림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역시나. 그 자리엔 레이샤가 있었다.
기사들이 넋을 빼놓고 하늘을 바라보는 사이 계단을 올라 단상에 선 것이었다.
신전의 터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
뒤늦게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그녀의 유모가 레이샤의 드레스 자락을 붙들고 애원했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아가씨!”
그러나 그녀는 매정히 자신의 유모를 떨치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신전 기사들은 내 주위를 호위하며 그녀와 마주 섰다. 하지만 레이샤는 기사들과 나를 스쳐 지나가 단상의 끝에 발을 딛고 섰다.
“플로리아.”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유모에게 잠시 시선을 던진 레이샤가 다시 고개를 들며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이 지루한 연극의 끝을 예감한 듯 그녀의 말투는 담담했다.
“내가 네 손에 잡힐 것 같아? 그런 치욕은 두 번 다신 안 당해.”
레이샤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울고 있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활짝 올라간 입매 끝이 작게 떨렸다. 아슬아슬하게 단상의 끝을 딛고선 발도, 주먹을 쥔 손도 마찬가지였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봐. 네가 내 인생을 빼앗아 나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너 때문에 몇 사람이 목숨을 잃는지. 평생 이 장면을 되뇌며 죄책감을 가져.”
레이샤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발 디딜 곳 없는 곳으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악!”
그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단상 아래에서 쏟아지던 환호성이 곧 끔찍한 비명으로 바뀌어 들려왔다.
메마른 겨울을 비추는 한 줄기 햇빛은 더없이 찬란했다.
비명에 놀란 새들이 그 찬연한 빛 속으로 퍼드덕 날아오르자 앙상한 가지 끝에 간신히 매달린 나뭇잎 한 장이 느리게 추락했다.
* * *
“깨워요.”
내 명에 레이샤의 얼굴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기절하여 누워 있던 그녀가 켁켁 고통스러운 기침을 해 대며 번쩍 눈을 떴다.
“참 공녀다워. 그리 높은 곳에서 추락이라니.”
나는 의자에 앉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는 레이샤를 바라봤다.
제 몸을 더듬거리던 레이샤는 뒤늦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야! 내가 왜……!”
“살아 있어서 놀랐나 봐?”
그녀의 턱선을 타고 흐른 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옥사 안의 접견실을 빠르게 훑어보던 레이샤는 상황을 파악했는지 눈을 반뜩대며 날 노려보았다.
나는 그런 레이샤를 마주하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 마력 덕분에 이렇게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아 놓고선.”
“날 왜 살렸어! 왜!”
그녀의 고함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마지막 재판을 받아야 하니까.”
“뭐……?”
“너만큼은 반드시 살아서 죗값을 치러야 하니까 살려 냈다고. 이제 답이 되었나? 그보다…….”
레이샤가 치가 떨린다는 표정으로 득달같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신전 기사들에게 붙잡혀 두 팔이 묶였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나무 널을 밟고 가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에서 더욱 선명하게 울렸다.
“너와 계약한 흑마법사의 거처를 말해.”
내가 그녀에게 물어야 할 건 그 하나였다.
흑마법사. 그의 이야기가 나오자 레이샤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싶은 듯도 했지만 지금에 와 모두 소용이 없는 질문이었다.
그걸 깨달은 레이샤도 결국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어서 답해.”
내 재촉에 레이샤는 눈을 내리떠 더러워진 자신의 새하얀 드레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곧 내가 입은 새틴 드레스에서 붉은 머리칼, 쇄골에 걸쳐진 가넷 목걸이로 찬찬히 옮겨졌다.
말갛게 빛나는 연갈색 눈동자는 시간이 갈수록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걸 알면 내가 먼저 그자를 찢어 죽일 거야.”
영문 모를 말을 건네며 그녀는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날 죽이라 했다가 실패했으니 저러는 건가?
어쨌든 저리 억울해하는 걸로 보아 그자의 위치를 그녀도 모르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렇다면 굳이 얼굴을 보고 있을 이유가 없지.
더 이상 캐물어도 들을 말이 없다고 판단해 나는 뒤돌아섰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등 뒤에서는 레이샤의 원망 어린 말들이 들려왔다.
무시하고 또 무시하며 걷다 문 앞에 다다라서야 나는 그녀에게 짧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고 여전히 날 저주하고 있었다. 내게 일어날 온갖 불행을 제 입으로 쏟아 내며 그렇게.
“내 자리를 빼앗고, 내 사람을 빼앗고. 내 모든 것을 앗은 네가 과연 잘 살 수 있을까?”
나와 눈이 마주치자 레이샤는 그런 질문을 던졌다.
잘 살 수 있겠느냐고?
나는 웃음기가 짙게 배어 있는 한숨을 흘리며 부드럽게 입매를 휘었다.
“걱정 마. 아주 잘 살 테니까.”
“아니, 내가 그렇게 안 둬.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할 거야. 영원히 지옥 불 속 같은 고통을 견디며 살아.”
죄책감이라. 누가 누구에게 할 말인지 모르겠네.
붉은 드레스의 소매 끝이 적갈색으로 물들어 있던 그날을 떠올리며 실소를 흘리자 레이샤의 눈매가 더욱 일그러졌다.
“죄책감은 내가 아니라 공작을 죽인 네가 지녀야 할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그게……?”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나는 그런 레이샤를 찬찬히 뜯어 보다 입을 열었다.
“몰랐어? 같이 잡힌 네 유모가 그러던데? 네가 공작을 죽였다고.”
“아니야. 유모가 그럴 리 없어……!”
레이샤는 세차게 고개를 휘저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
“아니야.”
불안정해진 숨을 몰아쉬며 계속해서 했던 말을 반복하는 레이샤가 난 그저 우스웠다.
“거짓이었는데.”
“뭐?”
“이렇게 표정에서 다 티가 나면 어쩌나.”
“네가, 네가 어떻게…….”
“이제 흑마법사에게 대가를 치르듯 내게도 대가를 치러야지, 공녀. 걱정 마. 난 그자처럼 무자비하진 않거든. 적어도 인도적인 편이지. 이런 네게도.”
나는 접견실의 문고리를 직접 잡고 밀었다. 눈부신 정오의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입김이 서리는 이곳과는 달리 겨울치고 바깥은 제법 따스했다.
“거기 서!”
부디 오래, 아주 오래 살아남아 주길.
나는 주저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길의 가장자리에 쌓여 있는 눈이 투명한 햇살 아래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