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네?”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꽤 커다란 목소리로 레이샤가 묻자 기사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기사의 찌푸려진 미간을 가만히 보던 레이샤는 뒤를 돌았다.
그리고 광장에서처럼, 그렇게 자신을 위해 이 자리까지 온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거짓이란 게 밝혀지면 벌을 받을까 봐 황후가 못 오는 거예요. 오늘 신전의 터에서 증명은 안타깝게도 없던 일이 되겠군요.”
「에스타란토라 주장했던 황후가 스스로 뱉은 거짓에 자책하다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
곧 마르누아 그자에 의해 거리에 파다하게 퍼질 소문을 떠올리면 레이샤는 저 오만한 기사를 얼마든지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었다.
“정말인가요?”
“황후 폐하께서 못 나오시는 거예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동요할수록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쩌나, 플로리아. 네 끝은 결국 이리 허무한데.
무엇하여 날 끌어내리려 그리 애쓰고 발버둥을 쳤는지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끝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레이샤.’
옥에 갇혀 있을 때 턱을 꼿꼿하게 치켜들고 그 말을 하던 황후가 떠올랐다.
이런 죽음을 맞이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고고한 척 나서던 황후를 실컷 비웃어 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쉽기도 했다.
‘실은 공녀가 에스타란토였다’. 그런 내용의 유서가 황후궁에서 발견되어도 신전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인정하지 않으려 하겠지.
하지만 제국민들은 다르다. 그 소식을 들으면 알아서 내 누명을 벗기려 노력하고 날 에스타란토로 세우려 할 것이다. 그런 멍청한 것들이라면 충분히.
“길을 내라는 신전의 명이 떨어졌습니다.”
그녀가 흡족하게 뒤돌아서 한 걸음을 내디딜 무렵이었다. 멀리서부터 한달음에 달려온 백마법사 하나가 신전의 터를 지키고선 기사에게 소식을 전했다.
“뭐라고요?”
레이샤는 휙 뒤를 돌았다. 그러자 한쪽 눈썹을 치켜뜬 기사가 아주 정중하게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제 길이 열렸으니 들어가시지요, 공녀님.”
그 정중한 말투에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레이샤가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무엇을 재촉하는 눈빛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겠지. 흑마법사는 계약을 어길 수가 없잖아.’
그래. 이제 와서 황후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비보를 전하며 에스타란토임을 증명해 보이라 할 리도 없다.
잔느는 난처한 표정으로 레이샤를 살폈다. 창백한 겨울빛이 떨고 있는 그녀의 작은 손 위에서 어른거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고상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래요. 들어가지요.”
말을 마친 레이샤는 걸음을 옮겼다. 땅에 끌리는 새하얀 드레스가 밤새 쌓인 눈을 훑고 갔다.
* * *
신전의 터에 꽂힌 깃발이 펄럭거렸다. 겨울 같지 않은 찬란한 햇빛 아래 금빛으로 수놓아진 신전의 문양이 번득였다.
내가 단장을 하는 동안 신전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여 준 덕에 신전 기사단의 창단식만큼은 아니나 꽤나 그럴듯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나는 돌계단을 올라 벅찬 감동을 느꼈던 단상 위에 다시 섰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느린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신전 기사단의 창단식 날, 주변을 짙푸르게 물들이던 녹음이 진 자리에 새하얀 눈꽃이 피었다.
앙상하던 나목들에 쌓인 눈이 햇빛 아래 반짝였다.
끈질긴 시간이었다. 다른 생을 살아 돌아오고, 네 번의 계절이 바뀌고.
‘이제 정말 레이샤 너와는 마지막이겠구나.’
저 멀리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누구보다 눈에 띄는 차림으로 다가오는 레이샤도 보였다.
그녀는 아주 당당한 걸음으로, 그러나 주위를 자꾸 두리번거리며 그렇게 걸어오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 제안을 받아들인 건지는 알고 있는 걸까?
흑마법사에게 날 공격하라 지시한 게 레이샤라는 건 이미 짐작한 바였다.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지만 그 사실을 깨닫는 건 상당히 불쾌한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어찌 나오려나?
내 명에 따라 신전의 터의 한 가운데엔 장작더미가 높게 쌓였다. 터의 주위를 에워싸는 나무 기둥마다 밝히지 않은 등불도 걸려 있었다.
에스타란토의 기원은 불의 힘. 그 힘을 보여 주기 위해 준비한 상징적인 것들이었다.
“폐하.”
그때였다. 단상의 양 끝을 장식한 붉은 깃발이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는 소리 사이로 아델의 나직한 음성이 번졌다.
나는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무사히 깨어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처럼 싱거운 한마디를 던지며 아델이 미소 지었다. 검은 머리칼 위로 쏟아지는 햇살처럼 아주 밝게.
“나도 고마워요, 아델 경. 여러모로.”
아델이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눈에 훤한 일이었다. 며칠 사이 마른 그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후 릭스와 바릴호움, 릴리 그리고 아직도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줄리아와 차례로 눈을 맞추었다.
신전 기사의 제복 위로 반뜻 빛나는 휘장이 참 잘 어울리는 이들이었다.
“그대들이 없었다면 이리 깨어날 수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한 게 없어요.”
“저흰 황후 폐하를 지켜 드리지도 못했는데…….”
흑마법사에게 공격당하던 그날, 자리에 함께 있던 줄리아와 릭스는 죄책감에 서려 말을 했다.
나는 그들의 말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대들은 최선을 다해 내 명에 따라 주었어요. 자책하지 말아요.”
줄리아는 코를 훌쩍이더니 품 안에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꾹 누르며 재빠르게 눈물을 훔쳤다.
나는 부드럽게 입매를 휘며 그런 줄리아를 바라보다 문득 그녀의 어깨너머를 흘긋거렸다. 아직 하드엘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루안이 말을 전하겠다 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나에 관한 일이면 당장이라도 달려오고 남았을 그가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단장을 끝내고 가는 길에도, 신전에 터에 다다른 순간에도 그가 없었다.
단상 위에 올라서면 저번처럼 그가 날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웃으며 날 살며시 안아 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 역시 아니었다.
내가 발꿈치를 들고 더 멀리를 내다보려 했을 때였다.
“어, 어떻게……!”
레이샤의 절망적인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어느덧 신전의 터에 가까워진 인파 속에서 레이샤가 뛰쳐나와 삿대질을 해 대며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얼굴빛은 공포에 질려 새하얗게 변했고 날 가리키는 손끝은 얇은 가지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내가 여기에 있어선 안 될 존재라도 되는 듯이 반응했다.
왜 죽지 않고 여기 있냐며 묻기라도 할 건가?
어느새 신전의 터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 넋이 나가 서 있는 레이샤가 있었다.
나는 조소하며 그녀를 응시하다 앞으로 한 발 나아갔다. 그리고 아주 나긋한 태도로 그녀를 환대해 주었다.
“공녀, 어서 와요.”
내가 말문을 열자 사람들은 당연한 수순을 기다리듯 레이샤를 바라보았다.
오늘 이곳에서 에스타란토의 힘을 증명해 보이겠다 큰소리친 공녀가 어떤 힘을 보여 줄까. 모두가 궁금해하는 건 그 하나였다.
‘이제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재미난 구경거리를 선사해 줘야지, 레이샤.’
“자, 공녀. 이제 그대가 지녔다는 에스타란토의 힘을 보여 주시지요.”
메아리친 목소리가 넓은 터에 크게 울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옥사에 갇히기 싫어 거짓을 꾸민 거 아니야?”
“그런데 거짓이면 어떻게 신전의 터까지 올 수가 있어?”
사람들은 그녀를 흘긋거리며 한 마디씩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공녀?”
“사, 사라졌습니다!”
레이샤를 대신해서 입을 연 건 그녀의 옆에 있던 유모였다.
“사라졌다?”
“네! 제가 봤습니다! 분명 마력이 어젯밤까진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공녀, 저 말이 사실인가요?”
장로도 가늘게 눈을 찌푸리며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에스타란토와 신전을 모욕한 죄를 물으려면 이 자리에서 그녀의 입을 직접 열게 해야 했다.
“…맞습니다.”
기다렸던 답이 흘러나왔다. 나는 실소하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정말?”
“네, 직접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번만 회피하면 날 다시 죽이면 된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나는 장로를 바라봤다. 이제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눈짓을 보내자 그가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을 벗어나 단상의 끝에 다가가 섰다.
“에스타란토 신전의 장로로서 그대들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낮고 엄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은 일제히 단상 위를 올려다보았다. 소란함이 잦아든 곳에 평온한 고요가 깃들었다.
“오늘 황후 폐하께서 에스타란토의 힘을 깨워 내셨습니다.”
모인 이들은 충격인지 기쁨인지 정의하지 못할 감정에 사로잡힌 것처럼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먼저 그러한 침묵을 깬 건 레이샤였다.
“뭐, 뭐라고?”
“말 그대로예요, 공녀.”
그 한 마디를 끝으로 나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아델의 말대로 눈을 감고 마력을 느끼자 부드러운 바람이 스치고 손끝에 따스한 열기가 모였다.
캄캄한 시야 속에서 붉은빛은 갈수록 선명해졌다. 그 빛이 온 시야를 뒤덮었을 때 나는 감았던 눈을 스르르 뜨고 손을 펼쳐 힘을 실어 보냈다.
그 순간, 붉은 궤적을 그리며 조용히 하늘을 가르고 날아간 빛이 땅으로 떨어졌다.
신전의 터를 뒤덮은 선명한 붉은빛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기름을 부어놓은 장작더미가 화르르 타오르는 동시에 나무 기둥에 달려 있던 등불이 저마다 환하게 빛을 밝혔다.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입을 벌리고도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그들은 단 한 마디도 뱉지 못했다.
나 또한 감미로운 전율에 휩싸인 채 내가 깨워 낸 에스타란토의 힘을 지켜보았다.
지금 내보인 것은 상징적인 힘일 뿐이다. 그 이상이 어느 정도일지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한참 만에야 붉은빛은 사그라졌다. 햇빛이 비쳐 드니 다시 하늘이 맑게 개었다.
아무렇지 않게 평화로운 오전으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방금 벌어진 일이 현실임을 보여 주듯 사람들의 발밑에 쌓여 있던 눈은 모조리 물이 되어 있었고, 가지마다 탐스럽게 피었던 눈꽃도 녹아 사라져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다시금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나부꼈다.
“세상에!”
단상 아래에서 뒤늦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 짤막한 한 마디를 시작으로 신전의 터는 곧 감격과 환희로 뒤덮였다.
“아니야!”
다만 레이샤 하나만이 이러한 분위기를 깨고 나섰다.
“다 눈속임이야! 다들 모르시겠어요? 이 정도는 신전과 짜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에요!”
울먹임 섞인 목소리로 악을 쓰는 그녀를 바라보며 난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차라리 도망을 치지 그랬어요, 공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