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줄리아와 릭스가 나를 둘러싸고 그들에 눈엔 보이지 않을 마력에 맞섰으나 나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순간, 세상은 한없이 조용해졌다.
고요한 침묵에 휩싸인 풍경이 점점 어둠에 물들어 갔다.
“프, 플로… 플로리아, 제발…….”
그래도 당신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야.
흐릿한 의식 속에서 붉게 젖은 하드엘의 눈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내 뺨을 감싼 그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울지 말라고. 그리 말을 해 주고 싶은데 눈이 무겁게 감겨 왔다.
‘플로리아, 내가 포기하지 못한 건 당신이야.’
하드엘과 함께 보낸 날들이 짧은 장면처럼 떠올라 머릿속을 스쳐 갔다.
창밖에 나리는 첫눈을 보며 대화를 나누었던 밤, 함께 낙엽 길을 거닐었던 오후, 녹음이 짙은 호숫가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고 웃던 당신의 모습.
잔잔히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가만히 마주 보았던 아주 오래된 기억까지. 하나둘, 영원히 간직하고 싶던 순간들이 되뇌어졌다.
‘풍경이 지루하시면 절 계속 보세요. 특별히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허락해 줘서.’
봄날, 찬란한 햇빛 아래서 반짝이는 물결처럼 그가 미소 지었다.
‘사랑해, 플로리아.’
뜨거운 숨결 사이로 흘러나오던 그 한 마디를 난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 봄이 찾아오면 에스트라의 화원을 함께 거닐자 약속했다. 그러니 눈을 떠야 하는데…….
뺨을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람이 차서 그 따스한 느낌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눈 좀 떠봐, 제발……! 안 돼. 안 돼, 플로리아!”
미안해요. 미안해요, 폐하.
나는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삼켜냈다. 몸에 힘이 풀렸다. 절절하게 부르짖는 하드엘의 목소리가 점점 아득해졌다.
시린 바람이 눈물이 흐른 뺨을 훑고 지나갔다. 겨울이었다.
내 생에서 가장 눈부셨던, 그래서 더욱 비참한 겨울.
* * *
오늘도 흑마법사를 찾지 못했다. 그 소식을 들고 다시 궁으로 돌아가는 아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황후 폐하께서 실망하실 텐데…….’
아무리 공녀의 뒤를 밟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자는 그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자신의 마력을 다른 이이게, 그것도 마법사도 아닌 이에게 나누어 줬다는 건 그만큼 그의 마력이 강하다는 뜻이었다. 지금껏 그런 마력을 지니고 숨죽여 살아온 것도 같은 맥락에서 가능한 일이다.
위험한 자다.
그러니 더더욱 내 손으로 잡았어야 했는데.
아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메마른 겨울 가지가 시름이 가득한 그의 눈동자에 비추어 휘청거렸다.
유일하게 흑마법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건 황후 폐하뿐. 그러니 흑마법사를 찾아내기 위해서라면 폐하를 그자와 맞닥뜨리게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그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몇 날 밤을 지새우며 돌아다녔으나 손에 잡힌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델은 웃음기 없이 굳은 얼굴로 점차 가까워지는 황후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넋이 나간 얼굴로 달려가고 있는 장로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장로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여전히 장로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황후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느리게 한 발씩 내딛던 아델은 점차 빠르게, 숨이 가빠 오도록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주저앉아 울고 있는 황후궁 시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델 경!”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줄리아와 릭스가 그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화, 황후 폐하께서……. 흐윽. 흑.”
아델은 줄리아의 울음 섞인 말을 다 듣지 않은 채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서서히, 걸음을 내딛을수록 주먹을 쥔 손에 힘이 풀렸다.
흐트러진 붉은 머리가 보이고, 창백하게 질린 새하얀 얼굴이 보이고, 힘없이 늘어뜨린 가는 팔이 보였다. 아델은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온몸이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믿기지 않아서, 그래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당장 방법을 찾아라.”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수를 써서든 살려내.”
장로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명령을 내렸다. 모두가 숨죽여 우는 방 안에 한없이 싸늘한 음성이 퍼졌다.
붉어진 황제의 눈가 아래로는 한 줄기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델은 멍하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플로리아, 언제나 아름답게 미소 지어 주던 자신의 주군을 응시했다.
* * *
플로리아의 손목을 짚고 있던 장로가 오래도록 감았던 눈을 서서히 들었다. 주름이 깊어진 눈가에 눈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플로리아의 손을 내려놓았다. 초점 없이 흐릿해진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말하거라.”
“…….”
“어떠한 상태인지, 언제 깨어날 수 있는 것인지 말하라. 당장.”
재촉하는 하드엘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장로는 메마른 입술을 힘겹게 뗐다.
“폐하께서는 깨어나지 않은 에스타란토의 신성한 힘을 이미 다스리고 계셨습니다. 분명 일전엔 그 힘이 선명하고 잔잔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그는 끝을 맺지 못한 장로의 말을 잇게 했다. 빛을 품은 그의 두 눈은 이제 매섭게 반득이고 있었다. 그 아래 불그스름해진 눈시울이 더욱 선명히 보였다.
“에스타란토의 힘이 아주 미약하게 느껴집니다. 황후 폐하의 상태가 위독합니다.”
“아니.”
“폐하.”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침대의 시트를 움켜쥐는 오른손에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하드엘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플로리아, 당신이 날 떠날 리가 없는데.
저자가 헛소리를 하는 게 분명하다. 미동도 없는 그녀를 보며 하드엘은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날 보고 웃어 주며 괜찮다고 그렇게 속삭여 줄 것 같았다. 언제나 그랬듯 봄바람 같은 부드러운 손길로 뺨을 쓸어 주며 그렇게.
하지만 다시 눈을 떠도 플로리아 그녀는 여전히 무겁게 감은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 현실이 하드엘을 더욱 미치게 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삼키며 명령했다.
“통제권, 그걸 가져가. 신전 마법사들을 모두 불러내 플로리아를 살려내라.”
장로는 침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울음이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폐하, 할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황후 폐하를 구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원인을…….”
하드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의자가 둔탁한 소음을 내며 나뒹굴었다.
그는 장로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형형한 눈빛과 어울리지 않는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장 방법을 찾아라. 무슨 수를 써서든 살려내.”
하지만 그의 명에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살리겠다는 그 쉬운 한 마디를 누구의 입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흑마법 때문입니다.”
불현듯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하드엘의 시선이 옮겨졌다.
장로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뒤돌았다.
아델. 그래, 아델이었지.
황후가 아끼던 신전 기사임을 기억해 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흑마법?
“아델, 흑마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장로도 모르는 일이었는지 새하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그에게 물었다.
“에스타란토의 힘이 미약해졌다 하셨지요. 황후 폐하께선 흑마법에 공격당하신 겁니다.”
아델, 그자는 플로리아에게 닿아 있던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단단한 눈빛으로 도무지 예측하지 못한 말을 읊어댔다.
“황후 폐하께서 흑마법사에게 공격을 당했다니? 도통…….”
뒤에서 울고 있던 줄리아와 릭스는 그제야 아델의 뒤로 다가와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말을 더했다.
“흐흑, 보호 결계를 깨는 굉음이 들려왔습니다. 누군가 황후 폐하를 공격한 게 확실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곳에서 어떠한 마력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황후 폐하께서는 무언가를 보시더니 다급히 폐하를 보호하라 명하셨어요.”
장로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어떤 상황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 예측하기란 어려웠지만 적어도 흑마법사가 황후 폐하를 공격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한 듯싶었다.
에스타란토의 힘은 흑마법을 가뿐히 이길 수 있다. 하나 그것은 그 힘이 깨어났을 때의 이야기였다.
목숨을 걸고 황후 폐하를 살릴 것이다. 그의 다짐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장담할 순 없었다.
어느 정도의 고통이 동반될지, 언제 깨어날 수 있을지. 쉽사리 꺼낼 수 없는 이야기를 두고 장로는 아까보다도 절망스러운 눈빛으로 황제에게 할 말을 찾으려 했다. 그 사이 아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실은 황후 폐하께서 며칠 전 저희에게 비밀리에 흑마법사를 찾으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뭐?”
“공녀를 만나러 갔던 날, 그 자리에서 황후 폐하께서는 검은빛을 보셨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폐하께서 곁에 계시면 안 된다며 두려워하셨고요. 그래서 폐하를 멀리 보내신 후, 그자를 쫓으려 하셨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아델을 응시하던 하드엘이 그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섰다.
규칙적인 걸음 소리가 아델의 앞에 다다라서 멈추었다.
정적에 휩싸인 방 안은 조용했다. 아델의 눈을 마주한 하드엘이 먼저 그 침묵을 깨고 나섰다.
“그러면 네가 황후를 살릴 수 있겠느냐?”
저자가 그것을 왜 숨겼는지, 플로리아가 어떤 생각으로 나를 멀리 보내려 했던 것인지 전부 궁금하지 않았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하나였다. 그녀가 지금 살 수 있는가.
“네.”
아델은 확실한 답을 내어놓았다. 하드엘이 그토록 듣고 싶던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갈라진 목소리로 힘주어 그는 다시 한번 하드엘을 향해 이야기했다.
“반드시 그리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