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오히려 플로리아는 자신을 다독여 주었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심란한 마음을 누르는 동안 그 작은 손으로 그녀는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공작이 죽었다. 공녀가 망언을 떠들어 댄다. 플로리아 그녀가 공녀를 만나러 나갔다.
회의를 끝내고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 황후궁 시녀가 차례로 전한 이야기를 듣고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황후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역시나, 언제나처럼 모든 일을 끝내고 돌아온 플로리아는 자신의 앞에서 웃고 있었다.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았다고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그렇게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며.
아마 불안함은 저런 플로리아의 말간 웃음에서 기인되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절대 자신의 입으로 힘든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니까.
매번 저리 미소 지었다. 나의 앞에서는.
‘우리 잠시 떠나요.’
그래서 플로리아가 뱉은 마지막 말은 하드엘에게 더욱 의아하게 다가왔다.
조금 지쳐 쉬고 싶으니 어디든 함께 떠나자, 그 한 마디를 남긴 플로리아의 눈은 겨울빛 아래에서 더욱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네?” 하고 부탁하는 말에 하드엘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부탁이라면 그는 뭐든 그리하겠다 답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의아했지만 어쨌든 기쁜 일이었다. 힘들다고 그리 솔직히 말을 해 주었으니까.
그 후 황후궁으로 향하는 길을 함께 거닐며 플로리아는 평온함이 깃든 따스한 목소리로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하면 좋을지 그에게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아주 멀리 바다가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기에 하드엘은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휴양지 몇 군데를 읊어 주었다.
그녀가 선택한 곳은 남쪽 끝, 트로이 왕국과 맞닿은 접경 지역에 위치한 바닷가였다. 그녀가 원하는 곳이니 아마 그곳으로 떠날 듯싶었다.
그 후에 플로리아는 평소처럼 대화하고 웃었다. 가끔씩 예쁜 입술로 하드엘, 그의 이름을 속삭여 주기도 했다.
‘공작을 살해한 남자의 행적을 더욱 꼼꼼히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대법관에게 전해 줘요.’
마샤티아 백작 부인에게 그런 명을 내린 것을 빼면 플로리아는 더 이상 칸제로스 공작가의 일을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찻잔을 들어 올리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폐하께서는 바다에 가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플로리아의 어깨 뒤로 보이는 겨울 하늘이 맑고 푸르렀다.
그보다 아름다운 검은 두 눈을 담아 내며 하드엘은 뒤늦게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뭐든. 플로리아 당신이 하고픈 걸 말하시오.”
* * *
“유모.”
“…….”
“유모!”
레이샤는 대답 없는 잔느를 재차 불렀다. 날카로운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린 잔느가 빠르게 시선을 들어 레이샤를 마주했다.
“요즘 왜 그렇게 넋이 나가 있어?”
“…죄송합니다.”
잔느는 들고 있던 커다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선 허리 숙여 그녀에게 사과했다.
묵직한 상자가 눈앞에 놓였다. 레이샤는 그것을 흘긋 내려 보았다.
이제 고인이 된 칸제로스가의 공작, 자신의 아버지의 유품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아마 저것을 어찌 처분할지 그것을 물으러 온 것이겠지.
어머니의 초상화, 어머니와 나누었던 편지, 죄다 헤르안, 헤르안. 그 어디에도 레이샤 그녀의 흔적은 없었다.
어젯밤 아버지의 서재로 내려가 본 상자와 같은 것이라면 적어도 그랬다.
“가져온 상자에 있는 물건은 버려 줘.”
“네? 하지만…….”
“참, 그 흑마법사는? 찾았어?”
레이샤는 눈앞의 상자에서 이만 시선을 떼고 굳은 목소리로 잔느를 향해 질문했다.
레이샤와 같은 곳에 눈길이 닿아 있던 잔느도 무언가 생각난 듯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게… 공녀님.”
“왜 그래?”
-똑똑.
유모가 불안한 눈빛으로 등 뒤를 힐끗거리는 사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탓에 단박에 레이샤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야?”
“그자가 직접 제 발로 왔습니다.”
허락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닫혀 있던 문은 스르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마르누아가 입술 끝을 당겨 올리며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아가씨.”
레이샤는 한 손을 흔들어 보이는 마르누아를 가소롭게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구둣발 소리가 조용해진 방 안에 선연히 울려 퍼졌다.
창문으로 들락거리는 자이니 어떻게 공작저에 들어왔는지는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니, 이걸 오랜만이라 해야 하나?”
어느새 레이샤의 앞에 선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피식거렸다.
레이샤는 굳은 채 서 있는 유모에게 이만 나가라 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머뭇거리며 마르누아의 발밑만을 바라봤다.
그것이 바닥에 놓인 상자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마르누아는 아주 친절히 한발 물러서 주었다.
그러자 그 무거운 걸 잽싸게 챙겨 들며 잔느는 빠르게 문을 닫고 사라졌다.
“내가 찾는 걸 알고 온 거야?”
레이샤가 말을 걸어오자 마르누아는 비딱하게 서서 되물었다.
“절 찾으셨어요? 힘을 빌리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찾는 걸 알고 온 게 아니라고?”
“네. 대가는 미리 치르셨지만 손등에 새겨진 표식은 그대로니까요. 계약이 끝났으니 표식을 거두러 왔지요.”
고작 그런 허접한 마력을 줘 놓고 계약이 끝나? 레이샤는 그의 염치없는 태도에 분노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양심도 없지.”
그날 광장에서 내보인 좀스러운 마력 때문에 처지가 더욱 곤란해졌다. 흑마법사의 마력을 나눠 준다기에 제국민들과 신전 사람들을 단번에 사로잡는 엄청난 마력이라도 부릴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이 자신의 실수라면 실수였다.
황후를 가장 깔끔히 내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런데 이젠…….
열흘 후. 아니 이젠 칠 일 후, 자신은 신전의 터에 서야 한다. 에스타란토의 힘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말하기엔 일이 커졌다.
레이샤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유일한 해결책을 내어줄 수 있는 그와 마주 섰다.
밝을 때 마주하니 날이 선 마르누아의 눈매가 도드라져 보였다.
빛을 머금은 흑갈색 눈이 느슨히 휘어졌으나 마주 보고 있으면 전혀 달갑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것은 굉장히 불친절한 미소였다.
레이샤는 멸시가 짙게 깔린, 이제 세상에 없는 자신의 아버지와 똑같은 눈을 하고 그의 검은 가면을 가만히 바라보며 다시금 말문을 뗐다.
“그딴 마력을 에스타란토의 힘이라 우기라 하고 대가를 받아 가다니. 이건 좀 아니라 생각하지 않아?”
“마법사가 아닌 몸으로 제 마력을 받아 냈으니 어쩔 수 없지요. 그리고 기억으론 에스타란토의 힘이라 우기는 건 아가씨의 마음이라 했지, 제가 그리 하라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마르누아는 자신을 질타하는 말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에 다가갔다. 그리고 하얀 손등에 새겨 놓은 검은 표식을 순식간에 지워 냈다.
“계약은 끝났습니다.”
갑작스럽게 다가오고 또 갑작스럽게 물러난 마르누아가 볼 일을 다 끝내고 돌아서려 할 때였다. 레이샤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턱을 치켜든 채 한마디 말로 그를 붙잡았다.
“…계약을 다시 맺었으면 해.”
“흐음?”
“더 큰 마력을 줘. 사람들을 전부 속일 수 있을 만큼 아주 큰 마력이어야 해.”
그 허황된 요구에 놀라는 대신 마르누아는 눈을 내리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친 공녀. 자신이 내린 평이 이토록 딱 들어맞을 줄이야.
“두 번은 위험합니다, 아가씨.”
“왜?”
짜증이 가득 담긴 물음에 그가 다시금 눈을 들어 레이샤를 살펴나갔다.
가는 발목과 허리를 조인 리본, 그리고 굳게 다물린 입술.
마르누아의 마지막 눈길이 닿은 곳은 오만하나 절박한 레이샤의 깊은 눈동자였다.
분명 아름답기는 매한가지인데. 그 고귀한 에스타란토와 이 미친 공녀는 서로 너무나 다른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왜냐고.”
기다림에 지친 레이샤가 재차 물었다. 마르누아는 그에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죽어요.”
“뭐?!”
“죽는다고요. 마법사가 아니면서 몸에 마력을 담아 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요, 아가씨. 그러니 그 허접한 마력을 한 번 담은 것도 기적이었지요.”
“그럼 나는?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하라고!”
레이샤가 마르누아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그러나 마르누아의 표정은 한결같이 평온했다. 제 알 바가 아니라는 듯 그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레이샤는 치가 떨리는 기분으로 어금니를 꽉 물었다. 손톱을 뜯적거려 딱딱거리는 소리가 초조하게 들려왔다.
폐하가 황후를 버리고, 제국민들이 황후를 외면하고, 에스타란토의 자리에서 자신이 황후를 처단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플로리아는 아직 제대로 힘을 깨워 내지 못했으니 그렇게 사라져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아버지의 말씀대로 거짓이 사실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되었다면…….
레이샤는 실핏줄이 서 붉어진 눈으로 눈앞에 흑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아가씨, 누가 보면 제가 아가씨께 나쁜 짓이라도 한 줄 알겠어요.”
“네가 다 망쳤어, 전부 다!”
“이거 억울해지려 하네.”
마르누아는 눈가를 찌푸렸다. 하나 입가엔 여전히 웃음이 마르지 않았다. 그럴수록 레이샤의 눈은 더욱 붉어졌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그 어둡고 축축한 옥사로 돌아가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아버지를 죽이는 게 옳은 선택이 아니었나. 바닥에 흥건하게 쏟아진 피를 본 그날 이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레이샤는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아버지도 이 상황엔 할 수 있는 게 없었겠지.
만약 아버지가 살아 있었더라면 오히려 자신은 더욱 비참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불쌍한 공녀로.
‘잠깐, 죽음?’
신전에 터에 만약 황후가 나타나지 못한다면 어떨까?
레이샤는 돌연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리고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해 나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눈을 굴리는 그녀를 마르누아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거래해.”
공녀가 다시 입을 연 건 한기 섞인 바람이 창을 세차게 두드릴 무렵이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발이 묶여 있어야 하나 따분해지기도 하던 참이었다.
그녀는 다시 거래를 제안했다. 마르누아는 그녀가 잊은 것 같은 말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
“죽는다니까요?”
“아니, 그쪽이 아니라.”
“?”
“황후를 죽여 줘. 일주일 후, 자신이 에스타란토라 주장했던 황후가 결국 스스로 뱉은 거짓에 자책하다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 그렇게. 진정한 에스타란토는 공녀였다며 인정하는 유서도 남겨 주고. 그건 가능하겠지?”
마르누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레이샤를 응시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레이샤의 인상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비록 빈정대는 웃음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의 입가에 줄곧 감돌던 미소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에스타란토를 죽여 달라…….
에스타란토. 그래 맞아. 그 여자가 에스타란토지.
마르누아는 잠시 황후의 얼굴을 떠올렸다. 뒤이어 가을날 그 찬연한 햇빛 아래 마주했던 검은 눈동자도 떠올렸다.
그리고 답했다.
“좋습니다.”
레이샤의 표정은 그제야 환해졌다. 불그스름했던 눈시울은 이제 환희에 젖어 든 것처럼 보였다.
“정확히 일주일 후,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대로 황후를 죽여 드리지요.”
“대가는?”
무엇이라도 다 내줄 듯 그녀가 물어왔다. 마르누아는 그에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없어요.”
그는 평소처럼 검은 표식을 새기는 대신 레이샤를 향해 선선히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황후의 약점은 뭔가요? 일을 꾸미려면 하나쯤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