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폐하.”
뒤따르던 아델은 길가에 세워진 마차에 다다랐을 때쯤 입을 열었다.
“저는 공녀를 추포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임을 아시지 않습니까. 저런 마력이 에스타란토의 힘이라니요. 신전으로 끌고 가…….”
“아니요, 그냥 둬요. 그래야 해요.”
신전 기사들은 단호한 내 답에 의아해했다. 그리고 아델은 제 뜻을 굽히지 않고 다시 한번 날 설득하려 들었다.
“정말 공녀가 마력을 쓸 수 있는 것이고 그 마력을 안정시켜 열흘 후에 더 큰 힘을 보일 수 있게 된다면 큰일입니다. 물론 저희는 공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날 신전의 터에 모인 사람들은 보이는 마력에 쉽게 현혹될 것입니다. 폐하께서 곤란에 처하실 수 있으세요.”
아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았다. 어떤 점을 걱정하고 있는지도.
“아델 경.”
“예, 폐하.”
“아까 기억해요? 공녀에게서 마력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했었죠.”
아델이 내 뒷말을 기다리며 침묵했다. 하나 어떤 말이 나올지를 예상한 건지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마른 가지를 흔들어 대는 삭풍에 그의 검은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나는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신전 기사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레이샤, 그 여자의 마력에 관해, 내가 직접 본 그 빛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말문을 뗐다.
“백마법사들이 느끼지 못하는 마력은 하나잖아요. 레이샤의 마력은 사라질 거예요. 흑마법사에게 힘을 빌린 거니까. 마법사가 아니니 그 여자는 자신의 몸으로 그 마력을 단 하루도 온전히 유지시킬 수 없을 겁니다.”
“폐하, 흑마법이라니 어떻게…….”
“에스타란토는 흑마법을 느낄 수 있다 했죠? 공녀가 마력을 쓸 때 그 주위로 검은빛이 퍼지는 걸 봤어요.”
“네?!”
릭스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다른 기사들의 반응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아델만이 심각해진 얼굴로 한발 앞서 나왔다.
“그래서 공녀를 풀어 주신 겁니까?”
“맞아요.”
내 답을 들은 아델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흑마법사가 연관되었다면 레이샤와 엮이는 일은 더욱 위험하다. 그것을 말해 주듯 아델의 얼굴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레이샤의 손끝에서 일었던 빛은 마치 검은 그을음 같았다. 긴 꼬리를 가진 검은빛이 실처럼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다시금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멀리 도망쳐 왔다 생각했다. 흑마법이 하드엘을 해하고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지독한 운명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심했다. 이렇게 인내하면 반드시 봄이 오겠구나. 그 사람과 함께 할 봄을 언제부턴가 난 당연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도망친 게 아니라 제자리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던 것이란 걸 나는 오늘 깨달았다. 그 비참한 현실을 눈앞에서 확인하자 못 견디게 숨이 막혀왔다.
더욱 교묘하게, 모진 운명이 되풀이되려 하고 있었다.
[플로리아 님, 어긋난 운명은 반복될 것입니다. 같은 방법으로 아니면 또 다른 방법으로.]
수호자의 말이 맞았다. 레이샤를 당장 끌고 가 가둬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결국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겠지.
결국 이 악랄한 운명을 끊어 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레이샤, 그녀를 미끼로 흑마법사를 찾아내는 것.
그 근원을 아예 뿌리 뽑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울고 싶을 만큼 두려웠다. 겁이 났다. 그래서 차라리 이 현실이 악몽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첫눈을 맞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기를 아까의 나는 잠시 빌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보이는 건 흑마법사와 거래를 한 레이샤와 검은빛. 내 간절한 바람과는 별개로 어느 쪽이 현실인지 난 아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하드엘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그를 지켜 주겠다는 그 약속을.
외면할 수 없으니 맞닥뜨리는 수밖에.
물러설 길이 없었다.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면, 하드엘 그 사람을 구하려면, 그리고 다가올 봄을 맞이하려면 난 머물러서는 안 됐다.
“신전 기사단인 그대들에게 명하겠습니다. 지금부터 공녀를 쫓아요. 반드시 다시 흑마법사를 찾아갈 겁니다. 그리고 하나 더, 지금 내가 내린 명은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선 아니 됩니다. 장로에게도, 폐하께도 알려선 안 돼요.”
장로가 알게 되면 하드엘 또한 이 사실을 알게 될 터. 나는 그들에게 주의를 주는 것으로 말을 맺었다.
기사들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내 명을 따를 것임을 알렸으나, 아델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날 붙잡으려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결국 허공에 머물렀다.
날 말리려 하는 것일까. 하지만 아델이 건네려는 말이 무엇이든 내 결정이 번복되는 일은 없다.
나는 돌아서서 마차에 올랐다.
휘파람새의 울음소리 같은 바람 소리가 겨울날의 오후에 더욱 스산하게 들려왔다.
* * *
“저 여자가 황후였단 말이지.”
나무에 기대 서 있던 마르누아가 등을 떼고 몸을 바로 세웠다. 가는 눈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그의 시야 안에서 황실의 마차는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그 마차를 타고 떠난 여자의 얼굴을 그리며, 마르누아는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아득해질 때까지 길 저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침마다 마주한 그림 속 얼굴이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공녀가 무슨 짓을 벌일지 꽤나 궁금해 뒤를 밟았을 때만 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런 우연이, 어이없게 이런 식으로 일어날 줄이야.
‘날 에스타란토로 만들어 줘.’
공녀는 정말 그 터무니없는 바람을 이루리라 작정한 건지 해가 뜨자마자 광장에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인 여자답지 않게 순진한 눈을 깜빡이며 자신이 에스타란토이다, 무고한 얼굴로 그리 외쳐 댔다.
과연 미친 여자였다. 상황이 꿈처럼 흘러가지 않았지만 공녀만은 정신이 나간 듯 웃던 꿈속 여자와 똑같았다.
마르누아는 느슨히 팔을 꼬고 분수대에서 열변을 토하는 공녀를 지켜봤다. 또 어떤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지려나 들떠 있던 무렵, 황궁의 기사들이 달려와 그녀를 포박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저 발악이 끝난다면 더 지켜볼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 펼쳐질 상황이야 지루할 게 뻔하니.
그런데 그가 돌아서려 할 때였다. 황실의 마차가 도착하고 한 여자가 내려섰다.
백마법사들이 그 여자를 호위하며 분수대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얗게 비치는 햇살이 그녀의 머리 위로 찬란하게 쏟아졌다.
가까워질수록 붉은색 머리카락은 선명해졌다. 긴 속눈썹 아래 검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뭐야.’
마르누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공녀가 그녀를 황후라 부르며 인사할 때 즈음엔 그는 이 우연이 믿기지 않아 얼마간 헛웃음을 흘렸다.
굳이 찾을 마음은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알게 되었으니 이걸 뜻밖의 수확이라 해야 하나.
에스타란토. 공녀가 그토록 훔치고 싶어 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저 여자였다. 머릿속에서 저 얼굴이 유달리 잊히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마르누아는 자리를 떠나려던 마음을 바꾸었다.
그렇게 서서 두려움에 떠는 플로리아의 두 손을. 또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드는 모습을, 제 할 말을 또박또박 해내 가는 그녀의 입술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지금으로부터 열흘 후, 신전의 터에 서서 온 제국민들의 앞에서 그대가 에스타란토임을 증명해 봐요.’
주제넘은 위로를 건네며 부드럽게 웃어 주던 그때와는 달랐다. 그 여자는 공녀의 앞에서는 아주 서늘하고 대담해졌다.
마르누아는 더욱 흥미로운 것을 좇아 나섰다.
그래서 발길을 돌리는 플로리아를 따랐고 신전 기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마차에 오르는 동안 그녀를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공녀께서는 저 여자를 어찌 상대하려 하시나. 상대가 안 될 것 같은데.”
이제는 텅 빈 거리를 바라보며 마르누아가 피식거렸다. 마차가 지나간 자리에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나저나 날 찾겠다니. 골치 아프게 됐네.”
그는 자신의 얼굴의 반을 덮은 가면을 잠시 매만졌다. 어쩐지 발길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 * *
마차는 황후궁 근처에서 멈추어 섰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서 직선으로 뻗은 길을 일정한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소복이 쌓여 있는 눈을 밟을 때마다 발아래서는 보드득 소리가 났다. 적요한 침묵을 흐트러뜨리는 유일한 소리였다.
주변을 둘러싼 공기는 아까부터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차라리 공녀가 에스타란토 흉내를 내고 있다, 그 얘기를 듣고 궁을 나설 때의 분위기가 지금보단 훨씬 더 나았지 싶었다.
“황후!”
저 멀리서 초조하게 제자리를 맴돌던 하드엘이 날 발견하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지금까지는 분명 잘 참아 냈는데, 오히려 멀쩡해졌다, 아무렇지 않다 생각했는데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콧날이 시큰해졌다.
“왜 말도 없이 떠난 것이오.”
하드엘이 나를 와락 껴안았을 때는 정말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앞으로 내가 당신을 지켜 내야 하는데. 꼭 그래야만 하는데…….
나는 그의 속삭임에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목을 가다듬고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은 모습을 지워냈다 확신하고 나서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폐하께선 회의를 잘 마무리 지으셔야죠.”
하드엘은 등허리를 감싸던 팔을 풀었다. 대신 내 어깨를 잡고 찬찬히 내 얼굴을 살펴나갔다.
느리게 움직이던 그의 회색 눈동자는 아주 오래도록 내 눈 주위에 머물렀다.
“플로리아.”
그가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나는 환하게 웃는 것으로 그의 부름에 답했다.
“왜 그러세요?”
“플로리아.”
또 한 번.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이름 탓에 두 눈 위로 떠오를 것만 같은 잔잔한 슬픔을 난 다시 힘겹게 지워 내야 했다. 이를 위해 나는 더욱 활짝 웃었다.
“폐하, 그렇게나 제가 보고 싶으셨습니까? 자꾸 부르시니 제 이름이 닳겠어요.”
나는 그의 눈가를 천천히 쓸었다. 이런 나를 보던 하드엘은 마지막엔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내게 이 일을 먼저 알렸어야 했소.”
“폐하께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던 제 마음도 이해해 주세요.”
“말했지 않소. 내게 그 무엇도 당신보다 우선이 될 순 없어. 황제이기 이전에 난 당신의 남편이고 플로리아 그대를 그런 곳에 혼자…….”
“제가 해결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아주 잘 해결되었고요.”
그 단호한 한 마디에 하드엘은 무어라 답을 하지 못했다.
이후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설명해 나갔다. 열흘 후, 신전의 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후의 공녀가 어떻게 될 것인지.
흑마법. 그와 연관된 이야기만 빼놓고.
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번만큼은 난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당신은 정말…….”
하드엘은 다가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표정이 어떠한지 나는 볼 수 없었다.
햇빛 아래에서 더욱 밝아진 옅은 금빛 머리칼만을 빤히 응시하던 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느리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뜻 은빛으로 빛나고 있는 백금발 머리칼은 손끝에 무척이나 부드러운 감촉 남겨 주었다.
이제 마차에서 되뇌었던 말을 해야 할 차례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기 위해 오는 길 내내 연습한 그 말을 계속해 떠올렸다.
아무렇지 않게, 태연히 그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마지막이 될 아주 큰 거짓말은 하드엘 그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참, 폐하.”
그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겨울날에도 따스한 빛으로 물들어 있는 그의 눈을 마주 보자 예상외로 쉽게 입술이 벌어졌다. 그것도 아주 뻔뻔히 입가엔 미소까지 곁들일 수 있었다.
“우리 잠시 떠나요.”
내 말을 듣고서 그는 눈가를 찌푸렸다.
“플로리아, 지금 뭐라고?”
“어디로든 함께 떠나 있어요. 앞으로 열흘. 그 전까지 돌아오면 되는 거잖아요. 저 조금 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