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가까이 다가가자 숨죽여 울고 있는 레이샤가 보였다. 그녀의 볼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카펫을 적셨다.
정신을 잃은 게 아니란 걸 깨닫고서 안도한 잔느가 뒤늦게 숨을 몰아쉬었다.
“에스타란토? 하!”
공작은 한 걸음씩 걸어왔다. 그는 그렇게 울고 있는 레이샤 앞에 섰다. 유릿가루가 그의 구둣발 아래서 와작거리며 밟혔다.
무릎을 굽히고 앉은 공작은 레이샤의 턱을 들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황후가 에스타란토가 아니라니. 이젠 호사가들조차 믿지 않는 그 소문을 참으로 꿋꿋하게도 믿고 있구나. 이제 보니 네가 그 하찮은 것들보다 나을 게 없어.”
젖은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투명한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공작의 말을 듣고 레이샤는 곧 두 눈을 들었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이 일그러지고 입술 끝이 잘게 떨렸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황후가 에스타란토라는 건 이쯤 되면 알아서 눈치를 챘어야지. 그렇게 눈이 어두우니 모든 일을 이딴 식으로 그르치는 게 아니냐.”
붉어진 딸의 눈시울을 보고 혀를 찬 공작을 이만 몸을 일으키며 구겨진 셔츠를 털어 냈다.
그리고 알아서 레이샤를 달래 침대에 눕혀 놓으라는 뜻으로 잔느에게 눈짓했다.
그러나 공작이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레이샤가 그의 바짓자락을 거머잡았다.
“기다려 보세요. 그러니까 황후가 진짜 에스타란토라고요?”
공작이 입을 다물고 있자 레이샤는 탁자를 짚고 섰다.
그녀는 복부를 부여잡고 잠시 윽, 하는 신음을 뱉었지만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그간 제게 거짓말을 하신 거네요?”
“네가 그리 믿고 싶다 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네가 한심한 꼴로 미쳐 날뛰지만 않았다면 그것이 사실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
“하.”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레이샤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눈물이 묻어난 옷소매가 짙붉게 젖어 들었다.
“절 왜 속이신 건데요?”
“그편이 보기엔 좋았으니까. 답이 되었느냐? 쓸모없는 얘기 말고 이제 가서 눕거라. 기사들이 닥치기 전에 그 화장도 전부 지워.”
“보기가 좋다라…….”
그 말을 읊자 숨을 쉬는 게 답답해졌다. 난 이렇게나 망가져 가는데. 난 이렇게나 힘든데. 여전히 반듯한, 어느 때라도 완전히 망가지지 않는 아버지를 마주 보는 게 힘들었다.
난 정말 이렇게나 아픈데…….
아버지는 모조리 거짓이었구나.
아주 어렸을 적 내게 보여 준 미소들 전부.
황후가 되어야 한다. 그리 속삭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다정한 손길도.
바로 지금의 모습이 아버지의 진심이라는 사실에 못 견디게 허무해졌다. 실은 진작 깨닫고 있었으면서.
아버지는 이미 날 버렸다고. 내가 아버지를 버리겠다 생각한 날, 그날보다 훨씬 전부터 아버지는 이미 날 버렸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이번 재판이 끝나는 대로 북부의 영지로 떠나거라. 더 이상 너로 인해 가문에 해를 끼칠 수 없음이야.”
레이샤는 텅 빈 눈으로 깨진 화병을 바라보고 다시 공작을 바라봤다.
“아버지.”
그리고 불러 보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그 이름을.
“여전히 제가 광장에 나가는 걸 말리실 생각이세요?”
“아까 말했을 텐데? 죽은 듯 지내는 게 답답하더냐? 가문을 나락으로 끌고 갔으면 응당 견뎌야지.”
공작은 아무런 표정 없이 돌아섰다. 레이샤는 끝까지 그 입에서 원하는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사실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그녀 또한 몰랐다. 나가서 에스타란토가 되어라.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그럼 나는 아버지에게 어떤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레이샤는 한 걸음씩 멀어져 가는 공작의 등을 빤히 보며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젠 그 입으로 듣고 싶은 말이 없었으니까.
레이샤는 허리를 숙여 깨진 화병의 기다란 입구를 움켜잡았다. 날카롭게 벼른 칼날처럼 번뜻 빛을 발하는 유리 날이 아름다웠다.
레이샤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공작과 가까워졌다.
“아, 아가씨……! 아악!”
고막을 찢을 듯한 유모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공작이 의아함에 뒤를 돌아보았다. 공작의 시야에 담긴 레이샤는 울고 있었다.
아주 슬프게.
투둑, 툭.
이후 사방이 조용해졌다.
매끄러운 유리면을 타고 흐른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병의 입구를 잡고 있는 레이샤의 팔에도 붉은 피가 흘러들었다.
“컥!”
레이샤가 공작의 목에 박힌 화병을 빼내는 순간 공작은 피를 토해 냈다. 뜨거운 붉은 액체가 그의 입에서 한가득 쏟아졌다.
공작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스르르 주저앉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 느릿하게 감기는 눈, 바닥에 흥건한 피. 그렇게 완전히 망가진 아버지의 모습을 레이샤는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눈물이 어린 흐릿한 시야 속에 입을 벙긋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레이샤는 몸을 낮췄다.
‘헤르안.’
아마 그 이름을 부르고 싶은 것 같았다.
레이샤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곧 사랑하는 부인의 곁으로 갈 아버지의 눈을 직접 감겨 주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붉어진 눈으로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공작을 향해 속삭였다.
“가문을 위한 일이니 이해해 주실 거죠?”
아마 이해해 주시겠지. 가문의 영광을 그토록 꿈꿨던 분이시니까.
레이샤는 들고 있던 화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제자리에서 떨고 있는 유모가 보였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공작을 내려 보던 잔느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레이샤를 한동안 멍하니 응시하다 바들거리는 입술을 힘겹게 뗐다.
“어, 어서 나, 나가세요. 제가 벌인 짓입니다. 제가…….”
“무슨 소리야, 유모.”
레이샤는 방금 전 두 뺨을 다 적시며 울던 사람답지 않게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긴 소매 끝에 맺힌 붉은 피가 툭툭 떨어졌다.
“그보다 집사는 어디에 있어?”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잔느는 당장 무엇도 생각할 수 없어 답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자 레이샤가 재차 물었다.
“어디 있냐고.”
뒤로 보이는 공작의 모습은 너무나 끔찍했다. 축 늘어진 팔다리와 피로 범벅이 된 형체를 다시 보자 속이 울렁거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명을 수행 중이라 바, 밖에, 외출을…….”
“집사와 차를 한 잔 마시고 싶은데. 준비해 줄래? 아, 그리고 아까 명한 호위와 마차. 그것도.”
그 말을 남긴 채 레이샤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유리 화병에 꽂혀 있던, 겨울날에도 온실에서 활짝 봉오리를 터트린 예쁜 꽃송이가 자신의 발아래서 짓뭉개져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아버지에게 뺨을 맞은 저번처럼.
레이샤는 그것을 지르밟고서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일정하게 울리던 구두굽 소리는 창가 앞에 다다라서야 그쳤다.
그녀는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완전히 젖혔다.
어느새 아침이었다.
어설프게 비쳐드는 겨울 햇살이 붉은 피가 묻은 손 위에 내려앉았다.
* * *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달라는, 그 약속을 하드엘은 지켜주었다.
잠들기 직전 무거운 눈을 깜빡일 때까지 그는 내 손을 잡아 주었고 그렇게 곁에 머물러 주었다.
그래서일까. 완전히 잠이 들고 나서는 바람처럼 행복한 꿈을 꾸었다.
하드엘과 나, 그리고 우리의 아이가 함께 나란히 에스트라의 화원을 거니는 꿈이었다.
새하얀 꽃이 만개한 봄날의 정원 속에서 까르르거리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밝게 번졌다.
아이를 안고 걷던 하드엘은 자신과 똑 닮은 그 아이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봐 주었다.
부드러운 실바람이 불어오자 에스트라의 화원은 사르르 물결쳤다.
나는 그의 왼팔을 감고 있던 손을 풀고 잠시 자리에 서서 바람에 흐트러진 하드엘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밝은 금빛 머리칼을 이마 위로 빗어 넘겨 줄 때마다 순순히 자신을 내맡기고 선 그가 곧은 입매를 휘며 웃었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그 웃음은 한층 밝아졌다. 그런 아빠의 얼굴이 보기 좋은지 아기는 배시시 미소 지었다.
‘다 되었어요.’
그 말을 건네자 하드엘을 숙였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런데 대뜸 아기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이려는 것처럼 끙끙거리며 짧은 팔을 들어 올렸다.
앙증맞은 손가락이 보드라운 머리칼을 겨우 스쳤다.
‘푸흡.’
하드엘과 나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마주한 시선 속에 서로가 있었다.
그 후, 어리둥절해하던 아이의 것까지 더해져 한층 더 산뜻해진 웃음소리는 한참이나 귓가에 맴돌았다.
깨어나서도 계속.
하드엘과 아기의 얼굴 위를 비추던 봄볕처럼 따스한 꿈이었다.
마음이 간지러운 그런 꿈.
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신문을 덮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새벽 사이 또 눈이 내린 건지 햇빛이 비치는 날임에도 공기가 찼다. 창가 근처에 있으면 약간의 한기가 전해져 올 정도였다.
저 멀리 입김을 호호 불며 빠른 걸음으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시녀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나저나 부인이 보고를 줄 때가 되었는데.”
나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 하루 일과의 시작은 요즘 대부분 레이샤, 그녀에 관한 소식으로 시작되었다.
아침이든, 오후이든 보고에 시간을 정해 두진 않았으나 부인은 대부분 날이 밝으면 나를 찾았다.
그러니 지금이 점심이 가까워지는 시각임을 고려하면 오늘은 부인이 조금 늦는 편이었다.
부인을 기다리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 다시 신문을 펼치려는데 마법서 위에 서 있던 알링이 포르르 날아와 그 위에 대뜸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날이 추워져서인지 알링은 요즘 부쩍 황후궁에 있는 시간이 잦아졌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내 주위를 맴돌며 읽고 있는 책이나 신문, 마법서에 떡하니 앉아 있는다.
“알링 이러기야?”
-짹짹. 짹.
장난 섞인 투정에 알링은 동그란 얼굴을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그에 나는 못 이기는 척 픽 웃으며 부드러운 붉은 깃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엉덩이가 무거운 새이니 자신의 의지로 떠나지 않는 이상 움직이게 하기는 힘들 것이다.
아침 신문을 마저 읽는 걸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알링이 좋다면 신문쯤이야.
알링에게 순순히 읽던 신문을 양보하고 난 미지근해진 찻잔을 다시 들었다.
그런데 차를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문 너머에서 날 부르는 아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무슨 일이지?
평소의 아델답지 않게 목소리에 여유가 깃들지 않았다. 상당히 초조하고 불안한. 그런 어투였다.
그래서 의아해진 나는 그를 곧바로 안으로 들였다.
그런데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아델 혼자가 아니었다. 가쁜 숨을 내쉬는 장로와 백작 부인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다들 무슨 일이에요?”
나는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심각하게 물었다.
이들이 한꺼번에 나를 찾은 경우는 처음이다. 그들의 입에서 나올 말이 심상치 않은 것임을 직감하자 마음 한편이 뒤숭숭해졌다.
“폐하, 지금 서둘러 나가 보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