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뭐라고요?”
“에스타란토로 만들어 달라고. 내게 에스타란토의 힘을 줘.”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 재차 되물었던 그가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짧게 터진 그 웃음은 점점 커져 복도에 울릴 정도가 되었다. 이에 주위의 눈치를 살핀 레이샤가 이를 물며 나지막이 경고했다.
“조용히 해.”
“이상하네. 꿈에선 분명 이런 거래가 아니었는데.”
낮게 중얼거린 마르누아가 다시 레이샤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아가씨, 에스타란토가 되게 해달라니. 그건 저의 마력을 쏟아부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 찡그린 얼굴에 드리워졌다.
‘그게 안 된다면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 레이샤가 그 말을 전하기 위해 붉은 입술을 열려는 찰나 마르누아가 끼어들었다.
“대신.”
“?”
“제 마력을 아주 조금 나누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단, 인간의 몸으로 받아 낸 마력은 오래 유지될 수 없으니 효력은 하루. 에스타란토의 힘이라 우기든 그것은 아가씨의 자유이고요. 어떠세요? 대가를 치르고 계약을 하실래요?”
“대가는 뭔데?”
“아가씨께는 아주 많이 받아도 되겠는데… 7년의 수명. 어때요?”
흑마법사의 마력이라…….
에스타란토의 힘. 그것을 누구도 실제로 목격하지 못했다. 책으로 전해오는 설화가 다이니 그 마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충분히 속일 수 있어.’
앞으로의 날들을 그려 내며 그녀는 얼핏 미소를 띠었다.
얼마나 놀랄까. 황후인 줄 알았던 에스타란토가 나라면. 제국민들도 그리고 폐하도 모두 황후를 버릴 것이다.
짧은 고민도 없이 레이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스듬히 올라간 입매 끝을 흐릿한 달빛이 비추었다.
“좋아.”
그 한 마디에 마르누아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웃음이 깃들었다. 그는 이후 공작에게 했듯이 공녀의 손등에 검은 표식을 새겼다. 그리고 말했다. 계약이 성사되었다고.
그러자 레이샤는 이제 그만 나가라는 그 짤막한 한마디를 던졌다.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제 아비와 닮기도 힘들지 않을까.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려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마르누아는 그녀의 뜻대로 물러나려 걸음을 돌렸다.
그는 이 공작저에 들어설 때처럼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살에 닿자 레이샤는 황당하게 그를 지켜봤다.
“거기로 간다고?”
“몰래 나가기엔 이쪽이 더 편하거든요. 그런데, 아가씨.”
창문을 열어 놓고 미적거리며 자신에게 말을 더하려 하는 그를 레이샤는 못마땅하게 지켜보았다.
그 짜증스럽게 구겨진 미간을 보며 마르누아는 자신의 꿈의 한 장면을 되새겼다.
에스타란토의 힘을 달라. 그때는 내게 그리 빌지 않았는데. 그 꿈이 앞날을 보여 준 게 아니었다면 뭐지?
“혹시 우리 만난 적이 있나요? 낯이 익어서.”
“내가 너 같은 걸 어떻게 알겠어. 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나가. 네 힘을 빌리는 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야.”
“수작이라니.”
물끄러미 연갈색 눈동자를 응시하던 마르누아는 불쾌하다는 듯 피식거렸다.
매끄럽게 휘어진 입술을 연 것은 그다음이었다.
“미안하지만 아가씨는 제 취향이 아닙니다. 저는 검은 머리보단 검은 눈동자를 더 선호하는 편이라.”
자신을 빤히 보며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불쾌해진 레이샤는 그를 밀어 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다가왔다. 하나 레이샤가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하얀 입김이 흩어지듯 그렇게.
이를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던 레이샤는 제자리에서 그가 사라진 창문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귓가에 메아리치듯 울리는 희미한 웃음소리와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뿐이었다.
* * *
“폐하!”
나는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번쩍 눈이 뜨이고 한동안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새벽빛이 하늘을 짙푸르게 적신 시각이었다.
그 고요한 공기 속에서 내 거친 숨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괜찮소?”
하드엘의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는 달리 옷을 갖춰 입은 하드엘이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뒤로 펼쳐진 익숙한 침실의 풍경이 차츰 눈에 들어왔다.
“악몽이라도 꾼 것이오?”
“모르겠어요…….”
호흡을 진정시키며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악몽? 그래, 이렇게나 기분이 불쾌한 것을 보면 악몽을 꾼 것 같기는 했다.
그런데 어떤 꿈이었지?
평소와 달리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꿈의 내용을 떠올려 보려 했으나 그럴수록 머릿속이 까맣게 물들었다.
“날 부르며 깨던데.”
“제가 폐하를 불렀다고요?”
“불렀지, 그것도 굉장히 큰 목소리로.”
“생각이 나질 않아요.”
하드엘에 관한 악몽을 꾸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더욱 찜찜했다.
괜히 심각해져서 인상을 쓰고 있자 하드엘이 몸을 기울였다. 그는 다정히 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잔잔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러모로 피로했던 탓이지. 어서 다시 눈을 붙이시오. 플로리아, 당신이 잠들 때까지 옆에 있을 테니.”
“오늘은 아침부터 바쁘시다 하셨잖아요. 안 가 보셔도 돼요?”
함께 아침을 맞지 않고 새벽부터 옷을 갖춰 입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하드엘은 내 질문에 담백하게 웃어 보였다. 머리칼에 스치는 긴 손가락의 움직임이 느릿했다.
“내게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이제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새벽의 남빛 어스름을 품은 눈이 다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을 오래도록 마주 보다 머리에 가 있는 손을 내려 잡았다. 단단히 얽은 손에 따스한 온기가 퍼졌다.
“그럼 딱 잠들 때까지만 곁에 있어 주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 약속을 믿고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은 악몽이 아니고 아주 좋은 꿈이길.
이왕이면 하드엘. 그 사람과 함께하는 아주아주 기분 좋은 꿈.
고른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벽난로에서 장작은 타닥타닥 불꽃을 튀기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맞잡은 손에 어느 순간부턴가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아침이 밝지 않은 새벽, 깊은 바닷속처럼 한없이 안온한 분위기 속에서 또다시 두 눈은 무겁게 감겼다.
* * *
아직 어둠이 물러가지 않았으나 곧 여명이 밝아올 무렵이었다.
무엇도 깨어나지 않은 세상, 하나 곧 모든 게 깨어날 세상이 어슴푸레한 물빛 속에 잠겨 있었다.
침대에 앉아 천장만 바라보던 레이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거울 앞에 섰다.
붉은빛이 연하게 감도는 드레스가 발아래로 길게 퍼졌다.
레이샤는 거울에 비친 가는 허리에서 목으로 서서히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약간의 생기가 돌아온 얼굴을 천천히 쓸었다가 빠르게 뛰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달음박질이라도 한 듯 세찬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뒤이어 전신에 아릿한 통증과 묘한 울렁임이 전해졌다.
이는 몸이 아파 느끼던 고통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마력이란 거구나 이게.”
레이샤는 손끝을 움직여 보다 이내 주먹을 꽉 쥐었다.
단 하루. 오늘밖에 시간이 없었다.
이 마력을 지니고 제국민들 앞에서 보여 줘야 했다. 내가 에스타란토라는 것을.
그 후 마력이 사라지면 권위만 유지하면 되는 일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에스타란토의 힘이 또 갑자기 사라졌다 한들 누가 거짓이라 하겠는가.
‘사실 공녀가 에스타란토였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황후의 표정은 어떨까. 꽤 봐 줄 만할 것 같은데.
“아가씨! 이렇게 계시면 안 돼요!”
그때,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잔느가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누군가 볼까 노심초사하며 주변을 살피는 일도 잊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기사들이 의원을 데리고 아가씨를 살피러 올 거예요.”
“유모, 나 광장에 가야겠어.”
“네?”
잔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되물었다. 그에 레이샤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광장에 가야 한다고.
어제보다 생기가 도는 레이샤의 두 눈이 서서히 밝아지는 하늘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아가씨 안 돼요!”
“비켜.”
레이샤가 정말로 문을 열고 나서려 하자 잔느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정말 안 돼요! 들키면 다시 옥사로 돌아가셔야 해요!”
“옥사?”
레이샤는 울먹임으로 가득한 유모의 눈을 마주하며 짧게 비소했다.
“내가 왜 옥에 갇혀?”
“그야 아가씨께서는 지금…….”
“에스타란토는 아벨리움의 법령에 제한받지 않아. 나의 뜻이 곧 신의 뜻이니까.”
“에스타란토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유모도 날 따라와. 가 보면 알아. 지금 바로 나가서 황궁의 기사들을 막을 수 있는 호위를 대기시켜. 마차도 준비해 놓고.”
턱 끝을 고고하게 치켜든 채 그녀가 명령했다.
내딛는 걸음에 맞추어 레이샤의 쇄골에 걸쳐진 붉은빛 목걸이가 은은한 빛을 발하였다.
“안 됩니다, 아가씨.”
그러나 이번에는 잔느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물러설 수 없었다. 잔느는 바닥을 딛고 선 두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자신의 명을 따를 줄 알았던 유모가 그리 나오자 레이샤는 이제 미간을 구겼다.
“유모,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안 돼요. 이번만큼은 절대 못 비켜 드려요!”
“광장에 가야 한다고 했잖아.”
“어딜 간다고?”
잔느가 가로막고 선 문은 바깥에서 열렸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챈 잔느는 기겁하며 물러섰다.
문턱을 넘은 공작은 소리 없이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어제보다 그늘진 얼굴로 서늘하게 눈을 내리떴다.
“말하거라. 쥐 죽은 듯 있어야 할 네가 지금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란을 피우고선 뭐? 어딜 가?”
창을 두드리는 새벽바람처럼 냉기가 서린 음성이 귓가에 꽂혔다. 모든 감정을 억누르는 눈동자도 차갑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런 아버지의 눈을 마주 볼 때마다 두려움이 깃들었던 순간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달라야 했다.
에스타란토가 될 거니까.
황후의 거짓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저 지금 광장에 갈 거예요.”
“네가 정녕 미친 것이냐?”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시겠지. 하지만 저런 말들을 뱉은 건 내가 에스타란토가 되면 많이 후회하실 텐데.
후. 짧은 숨을 뱉고서 공작을 마주 보며 레이샤는 자신 있게 분홍빛 입술을 열었다.
“지금 제게 닥친 문제를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생겼어요.”
“시끄럽다. 당장 옷부터 갈아입어.”
“오늘 전 에스타란토가 될 거예요.”
“…뭐?”
“제가 마르누아 그자와 거래를 했어요. 그의 마력 일부가 오늘 하루 동안 제 몸에 있을 거예요. 그 힘으로 제가 에스타란토가 되면 플로리아 그 여자의 간악한 거짓을 모조리 밝혀낼 수 있어요.”
레이샤의 말을 끝까지 들은 공작의 얼굴은 아예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제 와 미안하다 말해도 소용없어요, 아버지. 하고픈 말을 삼켜 낸 레이샤는 문 앞으로 꿋꿋이 나아갔다.
“멈추어라. 당장.”
“싫습니다. 전 황후가 아니라 먼저 신이 될 거예요. 그렇게 된다면 원래 제 것이었던 황후의 자리 또한 저절로 되찾아지겠지요. 순리대로.”
레이샤는 아랑곳 않고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공작은 제 딸의 머리채를 움켜잡더니 팽개치듯 내던졌다. 탁자에 복부를 부딪치고 레이샤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잔느가 새로 올려 둔 화병은 바닥에 떨어지며 또 한 번 와장창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깨부수어졌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물이 점점 밀려와 레이샤의 손끝을 적셨다.
잔느는 입을 틀어막고 움직임이 없는 레이샤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아,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