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달칵.
서재의 문고리가 돌아갔다.
‘참 오래도 기다리시게 하시지.’
꽤 오래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뜬 마르누아가 서서히 열리는 문을 바라봤다.
이 밤중에도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모습을 한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겨짐 없는 셔츠와 끝까지 채워진 소매의 단추, 조여 맨 타이까지. 집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의 차림새라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정갈한 걸음을 빤히 보던 마르누아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공작님.”
온기 없는 방 안에 마르누아의 낮은 목소리는 선연하게 울려 퍼졌다.
“너!”
한밤중 예고도 없이 나타난 마르누아를 발견한 공작은 경악했다.
“이제 약속을 지켜 주시지요.”
마르누아는 창가에 기대어 서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짙게 깔린 어둠 속을 천천히 거닐어 오는 그는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이 무슨 무례한……!”
-휘잉.
어디선가에서 찬바람이 휘불었다. 등골을 선득하게 하는 바람이 스치자 공작은 뒤늦게 창문을 확인했다.
단단히 잠가 놓은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젖혀진 커튼은 세차게 펄럭거렸다.
“이렇게 갇혀 계시는데 어찌 무례를 범하지 않고 찾아온단 말입니까.”
어느덧 마르누아는 공작의 앞에 섰다. 그의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가면이 작은 움직임에도 반뜩 빛났다.
어둠 속에서 마르누아의 인상은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갸름한 턱선과 비딱하게 올라간 입매가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하여튼, 네놈 같은 것들이란.”
공작은 그를 마주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위아래로 마르누아를 훑는 표정에서부터 멸시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딸아이가 깨어나면 대가를 치르겠다, 그리 연락을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때가 된 것 같은데요?”
마르누아는 고개를 까딱이며 질문을 던졌다.
휘어진 그의 눈을 빤히 보던 공작은 마르누아의 어깨를 밀치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힘을 주어 걸음을 내딛듯 구둣발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쾅!
뒤이어 열려 있던 창문이 세게 닫혔다. 유리창이 산산이 조각나진 않았을까 걱정이 될 정도의 과격한 소음이 들려왔다.
공작은 주변을 살피고 커튼까지 꼼꼼히 내린 후에야 다시 몸을 돌려 다가왔다.
“하여간, 걱정도 많으셔라.”
“어떻게 왔지?”
“잘 왔습니다. 기사들을 피해 날아왔다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뭐, 날아와?”
공작의 반응에 마루누아의 입가에선 큭, 웃음이 새어 나왔다. 뱉은 말이 거짓임을 알게 된 공작은 이를 으득 갈며 하찮은 미물을 바라보듯 그를 응시했다.
하나 그런 시선에도 별다른 타격감이 없는지 마르누아의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이 날씨에 날면 얼어 죽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알아서 잘 왔으니 염려 마세요.”
“같잖은 농은 집어치우고 원하는 것이나 가져가지.”
마르누아는 공작이 원하는 대로 무례하지 않게, 정중히 예를 차리는 시늉을 내며 양해를 구하더니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하나 그 행동 또한 조롱처럼 여겨져 공작은 이맛살을 구겼다.
비위를 맞추어 드리기 참으로 힘든 귀족 나리이네. 픽, 실소한 그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표식이 새겨진 손을 주시지요.”
마르누아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공작도 이 더러운 거래가 서둘러 끝나길 바라며 별말 없이 그 위에 손을 올렸다.
마르누아가 공작의 손등을 감싸고 눈을 감는 그 찰나의 순간, 지난번 손등에 새겼던 표식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암흑 속에서 더욱 희미하게 보여 착각인가 싶은 광경이었다.
마르누아는 감았던 눈을 스르르 떴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괴괴히 빛났다.
“계약은 이제 끝났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공작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닿았던 손을 닦아 냈다.
손가락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닦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르누아는 장난스럽게 눈가를 찌푸렸다.
“누가 보면 오물이라도 묻을 줄 알겠습니다.”
“허튼소리 말고 당장 나가거라.”
-사락.
“이런,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 주실…….”
그때였다. 얇은 천이 스치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마르누아는 공작의 등 뒤를 가는 눈으로 바라봤다. 아주 조금 열린 방문 사이로 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마르누아는 하던 말을 잊었다.
“어?”
꿈에서 보았던 그 여자다. 그걸 확신하는 순간 재미있는 놀이를 발견한 듯 마르누아의 표정이 아주 환해졌다.
자신의 꿈속에서 재수 없는 웃음을 흘리던 여자는 당황한 눈빛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곤 황급히 그러나 소리 없이 멀어져 갔다.
“아, 그래서 닮았던 거구나?”
공작에게로 시선을 돌린 마르누아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누군가 찾아왔었음을 눈치채지 못한 공작은 엉뚱한 반응을 내비치는 마르누아를 향해 날이 선 시선을 던졌다.
“나가라 하였다.”
“네. 그러지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마르누아가 앞으로 걸어 나아갔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방문을 열고 나서 그는 뒤돌아선 공작을 향해 상냥한 인사를 건넸다.
“참, 공작님. 오늘이 마지막이겠네요. 부디 평안하십시오.”
* * *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쿵쿵. 불안한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까지 선명하게 울렸다.
레이샤는 빠른 걸음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를 지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그 사람.”
레이샤는 소름 끼치게 웃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다 괜히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겨울밤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레이샤는 손톱을 깨물며 침대 옆을 맴돌았다.
‘날 보고 웃은 거야, 분명.’
항상 예고치 않게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자신이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은 이 밤이 유일했다.
그래서 누구도 깨어 있지 않은 깊은 밤, 종일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언제까지 이리 송장처럼 지내야 하는지 그걸 묻고 싶어서였다.
가뜩이나 방 안에만 갇혀 숨이 막혀오는 차에 깨어나지 못한 척 이리 오래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은 곤욕이었다.
아버지를 버리자 맘먹었다 치더라도 당장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이는 아버지뿐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 시간에 아버지를 만나러 간 것을 이리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줄이야. 조금만 더 빨리 자리를 빠져나왔어도 들키지 않았을 텐데.
누구지? 이 시간에 기사들의 눈을 피해 찾아온 걸 보면 아버지의 측근이겠지. 설마 황후에게 가서 내 상태를 불진 않을 거야.
그래, 그럴 거야.
그녀가 조마조마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사이, 멀리에서 터벅터벅 복도를 거닐어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했던 걸음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뚜렷해졌다. 불길한 느낌에 레이샤는 다시 휙 뒤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아무도 없던 자리에 하늘을 물들인 어둠보다도 짙은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당신, 뭐야?”
레이샤는 주춤 물러났다. 그러자 도리어 그는 큰 보폭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왔다.
어둠에 얼룩져 아른거리며 보이던 형체가 한층 또렷해졌다.
키가 큰 편이어서인지, 저 날렵한 인상 때문인지 문을 막고 선 그는 상당히 위압적으로 보였다.
“다들 마르누아라고 부르던데.”
“이름을 물은 게 아니잖아. 날 왜 쫓아와? 내가 깨어났다고 황실에 고하기라도 할 생각이야?”
“아, 아가씨, 모르셨군요. 제가 아가씨를 빼내 드린 흑마법사인데.”
어린 양처럼 벌벌 떠는 레이샤를 보며 그는 눈가를 찌푸린 채 미소 지었다.
마음을 헤아리는 너그러운 미소인 듯 보였지만 분명한 비웃음이었다.
“뭐?”
상황을 파악한 레이샤는 깊게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인상을 썼다.
자신이 이리 겁먹을 필요가 없는 자였다. 물론 예의를 갖춰 대해야 할 상대도 아니었고.
그걸 깨달은 레이샤의 태도가 급변하였다. 레이샤는 한없이 거만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흑마법사 주제에 날 겁주려 했다?”
“겁이라니요. 그것은 아가씨의 생각이시고.”
마르누아는 자신의 앞에 선 레이샤를 천천히 뜯어 봤다. 저 반반한 얼굴. 꿈에 나와 황제의 볼을 쓰다듬으며 웃던 그 미친 여자가 맞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지금껏 대가로 받아온 수명으로 나름은 긴 생을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신기한 현상이었다.
자신을 훑어보는 눈길에 기분이 나빠진 레이샤는 문을 가리키며 누군가 깰까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힘을 실어 이야기했다.
“당장 나가지?”
“공작님과 아주 똑 닮으셨네요.”
“시끄러워. 무슨 이유로 날 찾아왔는지 말하지 않을 거면 나가.”
“흠, 이유…….”
짧게 고민하는 듯 보이던 마르누아가 불현듯 꿈을 떠올리곤 상냥히 입을 열었다.
제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의 태도였다.
“혹시 아가씨, 흑마법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흑마법……?”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레이샤는 미간을 좁힌 채 가만히 서서 자신의 눈앞에 있는 흑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묻는 거였다. 때문에 잠시 흔들렸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짜고짜 흑마법이라니. 그런 위험한 것을 내가 왜! 절대 안 된다. 흑마법사와 함부로 거래를 했다간 큰 낭패를 볼 게 뻔하다.
하지만 거절의 의사를 표해야 하는 레이샤의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아버지는 흑마법으로 자신을 감옥에서 빼 왔다. 잘만 이용하면 득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이미 경험으로 체득한 사실이었다.
“웬만한 건 뭐든 이뤄 드립니다. 단, 대가만 지불한다면 말이죠.”
“내가 당신의 무엇을 믿고 대가를 주지?”
“이렇게 무턱대고 의심하는 것까지 부녀가 똑같다니. 아가씨, 흑마법사는 의뢰가 실패하면 계약자가 원하는 대로 값을 치러야 한답니다. 그래야 묶인 계약을 파기할 수가 있어요.”
한 자 한 자 친절히 설명하는 마르누아의 목소리가 나긋했다. 고민하는 레이샤를 지켜보는 흑갈색 눈동자가 좀 전보다 선명해졌다.
레이샤는 그런 마르누아의 눈길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흑마법. 어찌 보면 가장 간편하고 쉬운 방법이다.
흑마법사와의 계약이 위험하긴 하지만 자신이 대가를 주겠다고 결정을 내려야 계약이 되는 것이고, 의뢰가 실패하면 계약자가 원하는 대로 값을 치러 줘야 한다니 상당히 공평해 보이기도 했다.
그동안의 재판을 뒤엎고 이 곤경을 단숨에 헤쳐 나갈 방법.
동시에 황후까지 밀어낼 수 있는 방법.
황후가 가짜 에스타란토라는 사실을 밝히는 게 어렵다면 내가…….
‘내가 에스타란토가 되면 된다.’
레이샤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마르누아는 그녀의 답을 기다리며 여유롭게 눈을 깜빡였다.
진작 저자를 찾았다면 그간의 수모는 겪지 않아도 되었을까. 이제 와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의 아쉬움마저 들려 했다.
“어떻게, 흑마법이 필요하신가요?”
레이샤는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날 에스타란토로 만들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