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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41)화 (14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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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늘어선 나무를 살피던 레이샤는 좀 더 멀리를 내다보았다. 곧게 뻗은 전나무 길에서 낡은 원목 그네를 지나 야외 정원의 끝에 시선이 다다랐을 때쯤 그녀의 눈초리는 돌연 가늘어졌다.

저 멀리 무장한 기사들이 저택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저게 다 뭐야?’

“뭐 하는 것이냐!”

그 순간, 등 뒤에서 공작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레이샤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는 전과 다름없는 강건한 모습으로 성큼 걸어와 당장 커튼부터 쳤다.

“아버지, 저게 다…….”

-짜악!

뺨을 후리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레이샤의 고개가 돌아갔다. 공작은 무정한 얼굴로 방금 깨어난 제 딸을 내려 보았다.

한동안 말을 잃은 채 서 있던 레이샤가 입술 끝을 잘근 물었다. 입 안 여린 살이 터지기라도 한 건지 비릿한 쇳내가 퍼졌다.

“아가씨!”

새된 비명 소리가 들린 건 그다음이었다. 물컵을 내려놓은 잔느는 기겁하여 달려왔다.

“공작님! 아가씨께서는 방금 깨어나셨습니다. 아직 몸이 좋지 않으세요!”

잔느의 울먹임에도 공작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비소했다.

“내 수명을 내어 주기로 하고 흑마법을 부린 건데 아직 몸이 좋지 않을 리가. 아주 멀쩡할 텐데. 안 그러느냐, 레이샤?”

“흑마법……?”

“그래. 널 빼내려 내가 그 더러운 작자와 계약을 했다. 이제 상황이 이해가 되느냐?”

레이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공작은 분노가 서린 것 같은 냉담한 얼굴로 딸의 두 눈을 마주 봤다.

하지만 레이샤는 알고 있었다. 저 두 눈에 비친 감정은 이제 분노가 아닌 경멸에 가까웠다.

아버지가 날 경멸한다. 그 사실을 깨닫자 신기하게도 울분이 차오르던 마음이 차게 식어 갔다.

“네가 모든 것을 망친 것이야. 잘 알아두거라. 이 모든 불행은 전부 너로 인해 초래된 것이니.”

맞은 뺨이 얼얼했다. 그러나 레이샤는 평소처럼 벌벌 떨며 고개를 떨구는 법 없이 공작의 모멸 섞인 시선을 고스란히 마주했다.

아주 똑바로.

자신과 닮은 눈동자에 비친 모습이 비로소 선명해질 때까지.

“명이 있기 전까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말거라. 다시 재판정에 끌려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쥐 죽은 듯 있어.”

공작은 걱정의 기색이라곤 단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다. 또한 이전처럼 더한 말도 붙이지 않았다. 일말의 미련이나 기대 따위는 남아 있지 않다는 듯 그는 그저 돌아섰다.

재판정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그 위로 겹쳐졌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자신을 향해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매정히 자리를 뜨던 그 모습이.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잔느는 조용히 다가와 레이샤의 뺨을 쓸어 주었다.

“아프지 않으세요?”

“응, 아파.”

걱정 어린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변은 간결했다. 잔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붉어진 뺨을 어루만지다 슬픔에 젖은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해요. 제가 물을 가지러 나갈 때 공작님과 마주치는 바람에……. 요즘 공작님 기분이 많이 안 좋으시거든요.”

“그렇겠지. 그래 보이셔.”

레이샤의 시선은 여전히 공작이 사라진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아버지가 서 있던 두터운 카펫 주변,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짓밟힌 꽃 주위에서 날카로운 유리 날 끝이 반득였다.

그것을 응시하던 레이샤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내려진 커튼을 바라봤다.

잠시 본 겨울 풍경 속, 저택 주변에 늘어선 수많은 기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유모.”

“네. 아가씨.”

“밖에 기사들. 황후가 보낸 거야?”

“네…….”

잔느는 손을 스르르 내리고 레이샤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하. 낮게 한숨을 내쉰 레이샤는 재차 질문했다.

“보석의 허가에 있어 황후가 조건을 붙였다 하더니 진짜였구나?”

그래. 플로리아 그리 독한 네가, 내가 죽는다고 눈 하나 깜빡할 리가.

잔느는 머뭇거리며 입술만 달싹였다.

“그게…….”

“말해 봐. 저 기사들이 날 저리 대놓고 감시하는 거 말고 뭐가 더 있어?”

레이샤의 눈가가 찌푸려지자 덩달아 그녀의 눈썹도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망설이는 유모가 답답하기만 했다. 결국엔 아는 바를 털어놓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 시간을 끌어 어쩌겠다는 건지.

점점 일그러지는 레이샤의 얼굴을 흘긋 본 잔느는 다행히도 레이샤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에 느리게 입을 뗐다.

“아가씨께서는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되셨어요. 그리고 깨어나시는 대로 바로 재판을 받으셔야 해요.”

“뭐?”

“또 죽음에 이르시게 된다면 사후 재판을 받는 것… 그게 보석의 조건이었어요.”

“사후 재판? 아버지가 그 모든 걸 받아들였고?”

“네.”

레이샤는 허탈함에 피식 웃음을 흘려보냈다. 사후 재판. 그런 조건을 내건 게 황후라면 놀랍지 않았다.

다만 지체되면 가문에 누가 될까 서둘러 그 조건을 받아들였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웃음만 나왔다.

딸의 죽음 앞에서는 어떤 불명예도 감수하는 아버지.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게 보였으려나.

수명을 내주고 흑마법을 쓰면서도 빨리 빼내 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내 고통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 분이신데.

“잊을 뻔했어.”

“네?”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는지 잊을 뻔했다고. 목숨을 걸어 나를 구했다며 감동이라도 받을 뻔했는데 말이야.”

레이샤는 아직도 후끈거리는 뺨을 쓸었다. 차가운 손바닥이 닿자 열감이 더욱 생생해졌다.

“아가씨, 공작님께선 아가씨를 위해 이번 재판을 잘 마무리 지으려 준비하고 계세요.”

“당연히 그러시겠지. 근데 유모, 내가 아닌 가문을 위해,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의 모든 행동의 이유는 딱 그 두 가지야.”

황태자비 내정자에서 파해진 그날 이후, 아버지는 자신에게 있어 줄곧 모진 사람이었다.

바뀔 거라 믿었지만 참 한결같은 분이었다. 오늘도 그랬고.

그래서 다행이었다.

버려질 바에 버리겠다. 지난날의 그 비참한 다짐이 헛되지 않게 되었으니까.

레이샤는 다시 침대 위에 가 앉았다. 조금 벌어진 커튼 사이로 비쳐 든 창백한 햇살 한 줌이 시트 위에 어른거렸다.

레이샤는 자신에게 허락된 그 조금의 빛을 무의미하게 움켜잡아 보았다.

잡힐 리 없는 빛은 그녀의 손등 위에 번졌다. 이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그녀는 연갈색 눈을 천천히 들었다.

허공을 배회하는 눈동자가 심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바깥과 달리 방 안에는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다.

나는 신전에서 올라온 보고 중 장로가 따로 표시해 둔 부분을 짚어 가며 하얀 종이 위 빼곡한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아직 신전과 관련된 업무를 직접적으로 나서 할 때는 아니었으나 장로는 지금부터라도 차차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며 이렇게 내게 때때로 중요 보고 문서를 넘겼다.

에스타란토 신전에서 시험 중인 마법 시약의 결과와 마법사들의 훈련 성과, 북부에 찾아올 혹한의 겨울에 백마법사들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관한 의견들. 지금까지 읽은 보고의 내용을 간추리자면 대충 그 정도였다.

여기서 내가 특별히 할 일은 마지막 안건에 대해 기존 의견을 조율하거나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옆에 펼쳐진 새하얀 종이 위에서 나는 펜을 기울였다.

마른 가지를 흔들어 대는 바람 소리가 굳게 닫힌 창에 맞부딪혀 들려왔다. 그 사이로 사각거리는 펜촉의 소리가 섞여 들렸다.

잠시 후, 글씨로 다 채운 한 장의 종이를 걷은 나는 새로운 보고를 읽기 전 잠시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뻐근한 어깨를 움직였다. 팔도 쭉 뻗으니 피로가 한결 풀리는 느낌이었다.

“폐하, 피곤하세요?”

옆에서 쌓인 책들을 정리하던 루안은 이런 나를 발견하고 물었다.

“조금요.”

“장로님도 참. 폐하께서 일도 많으신데 보고는 조금만 줄여 주시지.”

루안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내며 미간을 좁혔다. 나는 입이 삐쭉 나온 그녀를 보고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신전에 들어갈 준비를 미리 해야 한다니 별수 없죠, 뭐.”

“매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시니 걱정입니다.”

자그마한 한숨을 내쉰 루안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후, 나와 몇 마디를 더 나누고 돌아선 그녀는 다시 책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보고서로 눈을 돌리려다 문득, 투명한 유리창 너머에 시선을 빼앗겼다.

올겨울 아벨리움에 눈이 많이 내린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한밤중에 하드엘 그 사람과 함께 본 첫눈 이후 몇 번이나 더 보슬거리는 눈이 내렸다.

오늘처럼 햇볕이 찬란히 내리쬐는 날에도 그것은 좀처럼 녹지 않았다. 그와 거의 날마다 걷는 산책길에도 순백색의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뽀드득. 어제 눈길을 밟던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밤사이 또 눈이 내렸으니 어제 남긴 발자국은 사라졌을까? 나는 멀리에 있는 산책길을 내다보며 그런 궁금증을 품었다.

하드엘의 회의가 끝나고 오늘 다시 가보면 답을 알 수 있겠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서 나는 이만 눈길을 돌렸다.

옆에서 열심히 제 할 일을 해나가던 루안이 “아!” 소리와 함께 무언가 생각난 듯 다급히 말을 건건 내가 오른손에 다시 펜을 쥐었을 때였다.

“폐하, 마샤티아 백작 부인께서 오전에 폐하를 찾으셨어요! 굉장히 급해 보이셨는데!”

‘공작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감시하는 기사들이 불시에 공녀의 방을 확인하고 있으나,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루안의 목소리에 이른 아침, 부인이 전해 준 말들이 상기되었다.

레이샤. 그녀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다는,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날 이후로 들려온 매번 같은 소식.

마샤티아 백작 부인은 오늘 아침에도 내게 그 이야기를 똑같이 전했다. 나는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였고.

다만 오늘은 한 가지 내용이 덧붙여졌다.

‘어제 기사와 함께 공녀를 진찰한 의원이 말하길 혈색이 좋아졌으니 곧 깨어날지 모른다 합니다.’

‘정말인가요?’

‘네, 맥박도 안정이 되어 있다고 해요.’

내게 있어 나름은 희망적인 소식이었다. 레이샤, 네가 재판에 직접, 두 발로 걸어올 수 있다는 거였으니까.

죽음으로 죗값을 치른다면 그건 너무하잖아.

“부인이라면 만났어요.”

들려온 답에 루안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그런 루안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 새 종이를 보고서 옆에 내려놓았다.

봄이 오기 전에 깨어났으면 좋겠는데, 레이샤, 부디.

소리 죽여 그 바람을 속삭이며 나는 신전의 새로운 보고서를 펼쳤다. 이번 봄, 신전에서 열릴 축하 연회에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에스타란토의 힘을 깨워 내기도 전에 그 힘을 다스리게 된 나를 축하하는 게 그 취지라고.

기어코 장로와 하드엘이 일을 냈구나. 나는 설핏 미소를 띠며 펜을 움직였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다시금 조용한 방 안에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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