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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40)화 (14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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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표정을 굳힌 공작은 이만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회색 구름으로 얼룩진 하늘이 흐렸다. 사철이 맑은 아벨리움에서는 보기 드문 날씨였다.

곧 있으면 눈이 내릴 것 같다고 떠들던 사용인들의 말소리가 기억났다.

어둑한 회색 하늘을 함께 올려보던 수십 년 전 겨울날 눈발이 흩날리길 기대하던 아내의 얼굴도 순간 어렴풋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뱃속의 아이를 낳아 가문의 번영을 이뤄내겠다고 목숨까지 버린 여자인데. 야망에 비해 바람은 참 소박했지, 헤르안.

그런데 어쩌지.

공작은 창가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새어드는 바람이 찼다.

“당신의 목숨을 빌어 태어난 그 애는 망조였어.”

황후의 재목이 아니라 당신을 앗아가고 내게 수치를 알게 하고 가문을 무너뜨리려 하는 망할 징조.

-똑똑.

“공작님 접니다.”

“들어오거라.”

공작의 명에 따라 레이샤의 곁에 잔느를 데려다 놓은 집사는 다시 공작을 찾아왔다. 그의 명이 순조롭게 이행되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유모에겐 말씀하신 대로 일러두었습니다.”

“그래.”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간명한 답이었다.

할 말을 전했고 공작은 더한 말을 붙이지 않으니 집사는 이만 물러나기 위해 공작의 등을 바라보며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때였다. 뒷짐을 지고 창가를 보고 있던 공작은 언뜻 평온해 보이는 표정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

“마르누아, 그자에겐 딸아이가 깨어나면 대가를 치르겠다고 전하거라.”

* * *

공녀가 보석을 허가받아 옥사를 떠났다. 그 탓에 그날 종일 궁은 번잡했다.

나는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옥을 빠져나가는 레이샤의 뒷모습을 멀리에서 지켜보며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어떻게든 레이샤는 마지막 재판에 서게 될 것이다. 그녀가 죽고 나서라 할지라도.

그 사실이 내게 조금의 안도감을 부여했다.

이후의 내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들을 보내왔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리고 이런 내 옆에는 매번 하드엘이 있었다.

오늘도 예외 없이 내 맞은편에서 하드엘은 아주 진중한 표정으로 자신의 공무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마법서를 넘기다 말고 고개를 들어 그를 살폈다.

바깥의 어둠을 물리치는 선명한 불빛이 그의 얼굴 위에서 아른거렸다.

문서 위에서 바삐 눈을 움직일 때에 하드엘은 얼굴 위에 어떤 표정도 드리워내지 않았다.

다정한 눈길에 익숙해진 난 이제 그런 그의 모습이 어색했다. 그래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기다란 손끝과, 너른 어깨 그 위로 굳게 다물린 부드러운 입술에 눈이 닿았을 때 그가 시선을 들었다.

“자꾸 그리 보면 집중이 잘 안되는데.”

오래도록 열지 않을 것 같던 입술로 그가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부드럽게 새어 나온 웃음이 따스했다.

나는 턱을 괴고서 입매를 휘었다.

날 직시하는 회색 눈을 가만히 응시하는 이 순간이 내겐 큰 행복이었다.

공녀가 옥을 떠나던 날. 하드엘은 말없이 찾아와 날 안아주었다.

다른 이들처럼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그는 자신의 온기를 나눠주었다. 그리고 바라봐 주었다. 오늘처럼 이리 따스한 눈길로.

그가 있었기에 내 일상이 유지되었을지 모른다. 하드엘의 앞에 서면 불안도 눈 녹듯 사라지니까.

“언제까지 제 서재에서 공무를 보실 생각이세요? 집중도 안 되신다면서요.”

그에게 황제궁으로 돌아가라 할 마음은 일절 없었지만 나는 천진하게 장난기를 섞어 물었다. 그걸 알면서도 하드엘은 단호히 답했다.

“앞에 놓인 서류를 다 처리하면. 그 후에.”

넬슨이 하드엘의 명에 따라 옮겨놓은 서류 뭉치가 책상 위에 산처럼 높이 쌓여 있었다. 적어도 며칠간은 계속 내 서재에서 공무를 처리하겠다는 뜻이었다.

눈짓으로 서류를 가리키던 그의 눈초리가 돌연 가늘어졌다.

“그런데 플로리아, 당신은 내가 돌아갔으면 좋겠소?”

“제 의견을 물으시는 건가요, 지금?”

그 물음에 내가 할 답이야 뻔했다. 대체로 하드엘은 원하는 답이 듣고 싶을 때 저리 질문을 던졌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저리 잘난 얼굴을 내세우며.

그와 보낸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그의 사소한 습관이나 대화 방식은 머릿속에 저절로 새겨졌다. 그가 지금 듣고 싶은 답이 무엇인지도 난 알 수 있었다.

“글쎄요?”

일부로 빙빙 돌려 말하자 그의 한쪽 눈썹이 찌푸려졌다. 잔잔한 웃음을 머금은 입가는 그대로였다.

“글쎄?”

그가 또박 또박 내 말을 되짚었다.

그럼에도 내가 뱉은 말을 수정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하드엘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조용한 서재 안은 터벅거리는 그의 발걸음 소리로 채워졌다. 의자에 앉아 다가오는 그 남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곧 커다란 그림자가 내 위에 드리워졌다.

금세 거리를 좁히고 내 앞에 선 하드엘은 두 손을 감싸 잡으며 나와 눈을 맞추었다.

은은한 불빛을 머금고 빛나는 회색 눈동자가 영롱했다.

“이래도?”

미남계를 쓰시겠다?

그의 행동이 귀여워 풋 웃음을 터트리자 내가 웃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듯 그가 미간을 좁혔다.

나는 하드엘에게 잡힌 손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그의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원하는 답이 되었나요?”

그는 자신의 손등을 내려 보던 눈을 천천히 들었다. 나른한 웃음이 입가에 선명하게 띄워져 있었다.

“원하는 답이라 하기엔 부족한 것 같은데.”

아쉬운 듯 말하며 그가 허리를 숙여 짧은 입맞춤을 건네려는 순간이었다.

“어? 폐하!”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창밖 풍경을 가리켰다. 멈칫한 하드엘도 고개를 돌렸다.

“눈이 와요!”

달빛 아래 하얀 눈송이가 느리게 흩날리고 있었다. 하얀 솜털 같은 것이 바깥 창틀에 사뿟사뿟 내려앉았다.

올겨울의 첫눈이었다.

나는 홀린 듯 몸을 일으켜 창가 앞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겨울 특유의 그 차고 맑은 공기가 기분 좋게 밀려들어왔다.

“루안이 곧 눈이 내릴 거라 말하더니 진짜였네요. 예쁘다.”

나는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탐스러운 눈송이가 손바닥 위로 가벼이 날아와 앉았다.

맞닿은 눈송이는 금세 푸스스 허물어졌다.

“예쁘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하드엘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렇죠? 저 눈송이는 꼭 예전의 폐하 같아요.”

“뭐?”

눈이 나리는 풍경 속에서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이 순간이 마치 달콤한 꿈처럼 여겨졌다.

첫눈을 함께 보고, 이처럼 시린 계절을 따스하게 보내며 다음 봄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게.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꿈만 같은 나날이었다.

간절히 깨지 않기를 빌 만한, 그 정도로 너무나 행복한 꿈.

편안히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봐 주는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 한편에도 소복이 눈이 쌓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을 것 같아요.”

“내 생각은 다른데.”

“네?”

“다음 계절이 찾아오면 이보다 더 행복할 테니까, 그러니 난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소.”

그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시렸던 손끝에 따스한 기운이 전해져왔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저도 그래요. 공녀의 마지막 재판이 끝나면 서랠에 방문하기로 폐하와 약속도 했으니까요.”

하드엘의 말에 동의를 표하며 나는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와 함께 만들어갈 날들은 분명 지금 이 순간보다 벅차고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매번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겠지. 가끔씩 사소한 문제로 다투기도 하고, 투정도 부리고. 평범한 연인처럼.

그렇게 보낼 수많은 계절을 떠올리자 입가엔 환한 미소가 번졌다.

나는 다시금 고개를 바로 하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입김이 하얗게 흩어지는 아득한 어둠 속에서 날리는 새햐얀 눈이 은은히 반짝이고 있었다.

* * *

긴 잠에서 깨어나듯 레이샤는 스르르 눈을 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곳이 어디인지를 떠올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수차례 재판이 거듭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다녀간 황궁 의원들은 죄다 원인 모를 병이라 했다. 원인을 모르니 처방해 줄 약도 없다고.

진통제를 몇 알씩 먹으며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보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렸고, 누군가 목을 옥죄듯 숨이 쉬어지지 않던 순간도 있었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을 때에는 곧 죽겠구나. 그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았다.

옥에 찾아와 연민조차 깃들지 않은 뻔뻔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는 황후를 마주하니 살고 싶었다.

아직 저 여자의 간악한 거짓말도 밝혀내지 못했으니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무엇보다 이런 오명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은 죽어도 견딜 수 없는 치욕이다.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살게 해달라고.

그렇게나 간절했던 탓일까. 아니면 신이 내 편이었던 걸까.

지금 자신은 이상할 정도로 멀쩡했다. 지난날의 고통이 다 허상인 듯 느껴질 정도였다.

레이샤는 자신의 팔을 천천히 들어 보았다. 나날이 말라보기 싫게 앙상한 팔은 그대로였다. 그게 지금껏 겪은 고통이 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한 줄기의 아침 햇살이 생기가 되돌아온 그녀의 연갈색 눈 위에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그녀는 도로 손을 내리며 자그맣게 웃음을 지었다.

-쨍그랑!

그때,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음이 울렸다.

“아, 아가씨?”

잔느의 떨리는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레이샤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깨진 화병의 유리 파편이 사방에 튀어있었고 놀란 유모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온실에서 가져온 꽃을 한 아름 안고 있던 잔느는 레이샤와 눈이 마주치자 그것마저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유모 왔어?”

“아가씨!”

잔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시울을 붉히고 천천히 걸어왔다. 그간 이를 악물어가며 간신히 참고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왜 울고 그래.”

“언제 깨어나신 거예요?”

“방금.”

레이샤는 갈라지는 목소리 끝을 가다듬어가며 말을 했다. 일어나려는 의지를 내비치자 서둘러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낸 잔느가 그녀가 침대 위에 앉는 것을 도왔다.

푹신한 침구가 등에 닿았다. 손바닥에 닿는 시트의 감촉도 부드러웠다.

딱딱한 벽에 기대어 잠들던, 그 말도 안 되게 수치스러운 날들은 끝이 났다는 생각에 레이샤는 이제야 안도했다.

이곳은 공작저이니 플로리아 그 여자의 손도 닿지 못할 터였다.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매번 고통이었던 날들도 이리 되짚어보니 행운인가 싶었다. 어쨌든 자신은 멀쩡하고, 그 덕에 옥에서 빠져나왔으니.

“공녀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안 아프세요?”

잔느는 뼈가 도드라진 레이샤의 손목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목소리엔 여전히 울먹임이 묻어났다.

“응 괜찮아. 그보다 유모, 나 물 좀.”

“네. 얼른 가져다드릴게요.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코끝이 시큰거렸다. 다시금 눈시울도 뜨거워졌지만 잔느는 벅차오는 제 감정을 누르며 부리나케 방을 나섰다.

허둥대는 유모의 뒷모습을 보던 레이샤는 픽 웃음을 흘렸다. 오늘만큼은 저 어설픈 태도도 모두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남은 그녀는 세찬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을 보고 싶은데 커튼이 쳐져 있었다. 한 줄기 새어드는 빛이 보이는 전부였다.

레이샤는 침대를 짚으며 일어섰다. 가는 다리가 잠시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거렸지만 금세 바로 설 수 있었다.

창에 드리워진 커튼을 젖히자 눈부신 햇살이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무에 새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얇은 가지는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휘늘어졌다.

자신이 그런 수모를 겪는 사이 계절이 바뀌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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