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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39)화 (139/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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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듣자마자 예상한 결과라는 듯 대법관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끝이 난 재판이었다. 이러한 변수가 생겼으니 곤혹스럽기는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나를 흘긋 바라본 대법관은 난처함 표하며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폐하.”

나는 여전한 고통에 몸을 비트는 레이샤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레이샤 너의 죽음은 너의 축복일까. 아니면 나의 축복일까.

나는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이런 식의 허무한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눈을 내리뜨며 덤덤하게 한숨을 흘려보낸 난 한참만에야 대법관의 부름에 입을 열었다.

“우선 자리를 옮기죠.”

* * *

루안이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찻잔에 찻물이 적당히 부어지는 소리가 맑았다.

곧 향긋한 차향이 황후궁 집무실 전체에 퍼졌다. 루안이 물러나고 난 보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대법관은 찻잔의 손잡이만 매만졌다.

나는 소리 없이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대에게 공녀의 소식을 들을 때부터 병보석은 이미 예측했던 일입니다.”

“하필 마지막 재판을 앞두고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법관, 그대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잔잔한 찻물 위로 마른 꽃잎 한 장이 떠다녔다. 유유히 물 위를 배회하는 꽃잎은 물을 머금을수록 색이 짙어져갔다.

잠시 이를 보던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는데.

어쩐지 머릿속에 안개가 낀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잘 흘러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실망감도 컸다. 공녀가 이런 식으로 자신이 지은 죄에서 달아나게 될 줄이야.

“법대로 처리할 생각이죠?”

“네. 그렇습니다. 불허할 이유가 없으니 공녀의 병보석은 허가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무척이나 송구스럽습니다.”

고개를 떨구는 대법관을 보며 나는 내려놓았던 찻잔을 다시 들었다.

뜨거운 찻물이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전보다 선명했다.

애지중지하던 딸이 죽는다는데 손 놓고 있을 공작이 아니었다. 병보석을 요청한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난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의원의 소견은 이미 나왔고, 공녀는 오늘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몰골이다.

그의 말처럼 아벨리움의 법이 정한 보석의 불허 사유에 해당하지 않으니 청구된 보석을 허가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끝이 나는 건 결코 내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마지막 판결을 받아야 한다.

내가 원하는 건 분명했다. 레이샤 그녀가 죽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애초에 죽음을 이유로 베풀어줄 동정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으니.

하지만 아무리 내가 그녀의 보석을 원하지 않아도 대법관은 정해진 법을 따를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떠올려야 했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의 생각을 마치고서 입을 열었다.

“대법관.”

“예, 폐하.”

“내가 그대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요?”

“네. 말씀하시지요.”

대법관이 총명하게 뜬 눈을 빛내며 내 뒷말을 기다렸다.

나는 머릿속에 정리한 내용을 차근히 읊기 시작했다.

“병보석 허가와 관련해 몇 가지 조건을 걸어줘요.”

“조건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우선 공녀의 외부 접촉을 제한하고 공작저 주위로 기사들을 더 배치하도록 하세요.”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두는 것. 그게 내 첫 번째 일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 요구를 되뇌듯 대법관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런 그를 바로 응시하며 난 말을 덧붙였다.

“또한 상태가 호전되는 대로 다시 재판을 받도록 하되 공녀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면 사후 재판을 받도록 해줘요.”

“사후 재판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는지 아까와 달리 공작은 눈을 크게 떴다. 덩달아 그의 숱 많은 눈썹도 바짝 올라갔다.

꽤 당황한 듯한 그가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 부탁하기에 나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석 허가에 앞서 조건을 거는 건 흔한 일이다. 나는 결국 내가 제시한 조건들을 대법관이 무리 없이 받아들여 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조건이든 공작이 거절할리 없다는 것도.

그가 고심하는 시간 동안 나는 차를 마시거나 주변을 느리게 훑었다.

내일까지 처리해야 하는 서류들과 한편에 쌓인 마법서, 며칠 전 하드엘이 선물한 꽃을 꽂아놓은 투명한 유리 화병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을 보니 심란한 마음이 진정되는 것도 같았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문 너머 모여 있는 시녀들의 웅성거림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루안과 부인의 걱정이 또 늘겠구나. 하드엘 그 사람도 소식을 들으면 많이 걱정할 텐데.

나는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무릎 위에 올려둔 손에 힘을 실었다.

어떻게든 견뎌질 상황이다. 그간의 일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그 생각을 되풀이하는 사이 오래지 않아 대법관의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기다렸던 답변이었다. 물론 예상했던 답변이었고.

나는 대법관에게 진심 어린 고마움을 표하며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하나 그 미소는 대법관이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얼굴 위에서 서서히 스러졌다.

* * *

「산송장이 된 공녀가 공작저로 돌아온다.」

아벨리움의 광장은 한동안 그 얘기로 들썩였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의상실이나 분수대 앞에서 제국민들은 빠짐없이 그 소문의 진위에 관해 떠들어댔다.

처음에 이 소문을 믿는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공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소문이 진실로 밝혀지게 것은 하늘이 유독 흐렸던 겨울날의 오전,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공녀가 공작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부터였다.

우중충한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눈이 나릴 듯한 추위 속, 드레스 위에 얇은 숄 한 장을 걸친 공녀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대며 걷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공녀를 바라봤다. 그들은 저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돌아온 공녀를 우연히 마주해서, 그 놀라움 때문이 아니었다. 산송장이 되었다는 소문이 과장이 아니어서. 그래서였다.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할 만큼 바싹 마른 공녀의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한 송이 꽃처럼 싱그럽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핏기 없는 입술과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 빛을 잃은 눈동자. 숨조차 내쉬기 버거워 보이는 지금의 공녀에게서 예전의 모습을 찾긴 힘들었다.

누군가 보다 못한 안타까움에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안 그래도 비틀거리며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딛던 공녀가 픽하고 쓰러졌다.

“레이샤!”

공작저의 입구에서 딸이 다가오길 기다리던 공작이 정신없이 뛰어왔다.

방패 같은 기사들을 뚫고 미친 듯 내달린 공작은 오열하듯 소리쳤다.

“당장 안으로 들여라! 당장!”

바닥에 주저앉아 딸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은 공작의 목소리가 애절했다.

곧 공작저의 사용인인 듯한 우람한 남자 하나가 달려와 그녀를 등에 업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한바탕 소란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겨울 냄새를 실은 바람이 날카롭게 불어왔다.

공녀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이제 황궁의 기사들뿐이었다.

공녀가 쓰러져 업혀 갔으니 당황할 법도 한데 기사들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마치 정해진 자리를 찾아가듯 각이 잡힌 걸음으로 나아가 저택의 주위를 에워 썼다.

사람들은 추위 탓에 코끝이 붉어진 줄도 모르고 눈만 끔뻑거렸다. ‘산송장이 되어 공녀가 돌아왔다.’ 그리고 뒤늦게 그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장면에 관해 떠들기 시작했다.

유난히 매서운 바람이 앙상한 가지를 뒤흔들었다.

우울한 잿빛 하늘 아래에서 다소 고조된 사람들의 말소리가 어수선하게 퍼져갔다.

한편, 저택의 내부는 한없이 고요했다.

집으로 돌아온 공녀가 집사의 등에 업혀 있었다. 힘없이 늘어진 가는 팔다리를 보고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걱정스러운 듯 눈썹 사이를 좁혔다.

공녀가 벌인 짓들. 그리고 열린 수많은 재판. 그때마다 거론되는 충격적인 죄명에 공작가는 한동안 혼란을 겪었다.

언제나 상냥한 아가씨. 사용인들에게 레이샤는 딱 그 한 문장이면 설명이 되는 사람이었다.

물론 귀족의 품위를 저버리는 과한 친절은 베풀지 않는 분이기는 했지만 여린 꽃잎 같은 아가씨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시해죄로 시작하여 황실 모욕죄에 언론 조작죄 등. 그런 아가씨의 이름 뒤에 하나 둘 불측한 죄명이 더해졌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그들은 공녀가 의심스러웠던 순간을 되짚어보았다.

아주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던 유일한 순간은 공작이 공녀를 방에 가둔 그때뿐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공작이 아끼는 딸의 사소한 잘못으로 평소답지 않은 과한 체벌을 한다고만 여겼다.

그 외엔 아무리 떠올려 봐도 서늘하다고 할 만한 점이 없었다. 말갛게 웃던 아가씨의 모습만 생생히 생각났다.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거리에 들려오는 공녀의 소문을 여전히 믿지 못했다.

광장을 지날 때마다 ‘공녀는 살인자다.’ 그런 이야기가 들려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반박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아냈다.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저마다 작게 한숨을 뱉었다.

그렇게 그들이 차마 말로 뱉지 못할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그들의 무리에 껴 있던 잔느는 입술을 꾹 다물며 억지로 울음을 참아냈다.

눈물에 부풀어 오른 두 눈 위로 서서히 멀어져 가는 레이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 * *

“어찌할까요, 공작님.”

“의원은 부르지 말고 유모를 붙여둬. 깨어나는 즉시 내게 알리고.”

한 달 전에 비해 지나치게 초췌해진 모습으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레이샤를 보며 공작은 냉랭한 얼굴로 명을 내렸다.

방금 전까지 떨리는 목소리로 제 딸의 이름을 수차례 불러대던 사람답지 않은 침착한 태도였다.

온기가 깃들어 있지 않은 눈이 잠시 더러워진 레이샤의 드레스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는 무표정하게 뒤를 돌아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한 장의 종이가 눈에 띄었다.

천천히 나아간 공작은 그 종이를 오른손에 집어 들었다.

“보석의 대가가 사후 재판이라…….”

거기 쓰인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공작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창문 너머 새카만 복장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저택을 에워싼 게 보였다.

‘황후 폐하께선 참 꼼꼼도 하시지.’

공작의 손끝에서 종이가 북북 찢어졌다. 길게 찢어진 가벼운 종잇조각이 공중에서 바닥으로 느리게 떨어졌다.

“앞으로 많이 바빠지겠어.”

눈치 빠른 우리 폐하께서 아시기 전에 대법관의 손에 있는 증거를 반박할 자료를 모조리 만들어내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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