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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37)화 (137/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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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그 질문을 듣는 마르누아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아내는 모습이었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건지 궁금했다. 제 목숨에는 관심도 없는 태도더니.

한 걸음 떨어져 선 공작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그때야 마르누아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태연한 어조로 답했다.

“그것까진 저도 모릅니다.”

모른다. 그 답을 듣고 나선 더 이상 나눌 말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공작은 직접 문고리를 당겼고 그 집을 떠났다.

그는 흑마법사와의 거래를 이리 단시간에 마친 사람답지 않게 멀어지는 내내 귀족다운 우아한 품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게 마르누아를 웃게 했다.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마르누아는 아주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잠시 후 들어 올리는 등허리가 들썩였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한산한 방 안에 퍼져갔다.

“얼마 남지도 않은 목숨으로 거래라니. 이제 남은 날이 겨우 한 달이려나.”

오후의 노곤한 햇살이 휑한 거리를 비추었다. 그 아래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공작이 있었다. 점점 멀어져가는 마차를 바라보며 중얼거린 그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문을 쾅 닫았다.

* * *

열린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까맣게 물들었다.

그 하늘 위로는 하얗게 빛나는 크고 작은 별들이 무수히 떠 있었다. 근래 내가 본 하늘 중 가장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다 세어 보지도 못할 별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뭇가지를 뒤흔들고 은은히 불어오는 바람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제법 서늘한 찬기가 스민 바람이었다.

그 탓에 눈가가 조금 시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맑고 냉한 밤공기가 기분 좋게 가슴속에 퍼져갔다.

오전의 소란을 잊은 듯 세상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게 마음에 들어 입가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이제 앞으로 이 평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서서히 눈을 떠 다시 밤 풍경을 보았을 때 나는 그 사실이 주는 기쁨에 벅차올라 있었다.

“그리 오래 있으면 감기에 든다니까.”

바로 등 뒤에서 걱정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의 것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마음을 간질였다.

고개를 돌려 그를 맞이하려 했으나 그보다 뒤에서 나를 안는 그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허리를 감싼 팔이 단단했다.

“언제 오셨어요?”

“아까. 당신이 무모하게 밤하늘에 별을 셀 때부터.”

“아닌데. 저는 그런 비효율적인 일은 하지 않아요. 언제 저걸 다 세요?”

내 답에 그가 픽 웃었다. 따스한 품속에서 그의 투명한 웃음소리는 더욱 깊이 울렸다.

“에스타란토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믿어야지요.”

“정말이에요.”

나는 몸을 돌리고자 했다. 이런 내 뜻을 깨달은 그는 스르르 팔을 풀어주었다.

그런데 나와 마주 보고 선 순간 하드엘의 눈가가 살며시 찌푸려졌다.

당연하게 아까처럼 미소 지으리라 생각했던 나는 조금은 당황한 채 물었다.

“왜 그러세요?”

“추위 탓에 뺨이 붉어진 건 알고 있었소?”

“네? 정말요?”

긴 팔을 뻗어 당장 창문을 닫은 그는 내 볼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쌌다.

이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맞닿은 살결의 온도 탓에 선명해졌다.

“루안, 그 아이라도 당신 곁에 있으면 안심인데.”

“루안은 오늘 바빠요. 아마 그럴 거예요.”

“바쁠 거라니?”

“폐하께서 오신다고 연락을 주셨을 때 갑자기 자신은 오늘 밤 무척이나 바쁠 예정이라 했거든요.”

뺨을 녹여주던 하드엘의 입매가 빤히 올라갔다. 나를 담은 두 눈은 이 순간에도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웠다.

“훌륭한 시녀군. 누구와는 달리.”

“누구라니요?”

백작의 이야기겠지. 답을 알면서도 물은 것은 그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좋아서였다.

나와 눈을 맞추고 내게 말을 건네는 그의 모습도 계속 보고 싶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록 그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전혀 궁금하지 않아 보이는데?”

“궁금해요.”

눈치는 또 엄청 빠르지. 내가 빙긋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바라보자 그도 마찬가지로 뚫어져라 나를 응시했다.

“정말?”

“네 정말.”

“넬슨 백작의 이야기였소.”

“아하!”

어색하게 웃음 짓자 풋 웃음을 터뜨린 이 남자가 볼을 감싼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덕분에 입술이 삐쭉 나오는 우스운 꼴을 면치 못해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장난스럽게 그를 노려봤다.

“제 추위를 달래주시는 거 아니었나요.”

“물론 아까는 그랬지.”

“그럼 지금은 목적이 달라지기라도 하셨다는 말씀이세요?”

“아마도?”

그 말을 끝으로 하드엘은 천천히 다가왔다. 달빛이 스민 회색 눈은 은은히 빛을 냈다.

그게 꼭 저 하늘에 뜬 별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뺨에 닿아 있던 손을 내리고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당연하게 장난을 칠 줄 알았던지라 나는 조금 놀라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들려왔다. 쿵쿵 울리는 소리가 불규칙했다. 정작 날 이렇게 만든 하드엘은 태연하게 웃기만 해 그게 조금 억울해졌다.

“폐하.”

내 부름에 자신이 듣고 있었다는 답이라도 하듯 그가 눈을 들었다.

억울함을 갚아줄 방법을 생각하던 나는 가만히 미소 띤 얼굴로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 안아 그의 붉은 입술에 그대로 내 입술을 포갰다. 잠시 오간 숨결이 부드럽고 달콤했다.

떨어지지 않은 채 고개를 올리니 하드엘이 보였다. 조금은 멍하게. 헛웃음을 흘리고 있는 그가.

“당한 것은 되갚아 줘야 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럼. 당연히.”

이런 일에 있어서는 참 관대하시지.

나는 이쯤에서 장난을 끝내려 했다. 그런데 내가 팔을 내리려 하자 오히려 하드엘은 허리를 감싸 나를 자신 쪽으로 더욱 당겼다.

무엇을 하는 것이냐 물을 새도 없이 그가 입술을 물었다. 부드럽게 여린 살을 더듬어가는 그 입맞춤은 평소보다 깊어졌다.

그의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더운 숨이 새어 나왔다. ‘당한 것은 되갚아 줘야 한다.’ 그 말에 기꺼이 동의를 표하던 하드엘이 떠올랐다.

내가 힘겨워하자 그제야 그는 긴 입맞춤을 잠시 멈췄다.

아까보다 붉어진 그의 입술을 보니 두 볼이 화끈거렸다. 이런 나를 말없이 내려 보던 하드엘은 묵직한 한숨을 흘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플로리아.”

뒷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다정하기만 한데 내려앉은 음색은 한없이 야했다.

여기서 멈춰야 할지를 묻듯 그는 변함없이 아름다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더 짙은 욕망이 묻어 있는 회색 눈이 선연히 빛났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그에게 보이는 게 부끄러워도 오늘은 마음이 가는 대로 그를 잡아두고 싶었다. 같은 마음이라면 더더욱.

망설이던 나는 그의 목을 감싸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대신 그의 셔츠 소매 끝을 잡고 조곤조곤 말했다.

“저 사실 폐하와 오늘 나눌 얘기들이 아주 많거든요.”

“얘기?”

“네. 그러니 오늘 곁에 있어주시겠어요?”

내 질문에 그의 입매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대화가 아주 길어질 것 같은데.”

“좋아요 전.”

고개를 끄덕이자 낮게 소리 내어 웃은 그는 아까의 입맞춤을 이어갔다. 짧게 보여준 부드러운 미소와 달리 입맞춤은 집요하고 거칠었다.

잠시의 틈을 둬도 식지 않은 열기가 그의 조급함에 더욱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어느새 등 뒤에 푹신한 쿠션이 닿았다. 창가에서 침대로 옮겨가자 그는 나를 조심스레 눕혔다. 이후 위에서 날 내려다보던 하드엘은 내 눈가를 쓸며 중얼거렸다.

“그대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떤 사람일까.”

방금 전 흐트러진 숨을 뱉던 사람답지 않게 차분한 어조였다.

“제 눈에 비친 폐하요?”

“궁금해. 내가 당신의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인지. 감히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말이야.”

나는 내 답을 기다리는 그를 마주 보았다. 그것이 너무나 쓸데없는 질문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을까.

“자격 같은 게 왜 필요하나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내가 환히 웃자 하드엘은 한동안 지그시 이런 날 쳐다보았다.

부서질 듯 끌어안은 것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른 후였다.

귓가를 스치는 숨결이 뜨거웠다. 그는 평소보다 붉어진 그 입술로 자그맣게 속삭였다.

“사랑해, 플로리아.”

한 마디를 남긴 채 떨어졌던 하드엘의 입술은 다시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술에서 목덜미 쇄골까지. 그의 입술이 닿은 곳은 온기가 남은 것처럼 뜨거웠다.

얇은 드레스의 리본은 풀어내는 손길은 더운 호흡과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웠다.

별이 가득 떠있는 밤은 유독 조용했다. 그래서 더욱 다정한 밤이었다.

아마도 종일 그와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은 침실 안에서 하드엘과 나의 숨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나는 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이 부디 오랫동안 빛나길 바랐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너무나 행복해 이대로 멈췄으면 했던 순간도 결국엔 지나갔다. 하지만 아쉽지 않았다. 그 순간이 지나면 더 기쁜 날이 찾아왔으므로.

그렇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모이고 모였다. 온전히 원하는 날들로만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다.

세찬 겨울바람이 창가를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스르르 눈을 떴다.

유리창을 통과한 창백한 은빛 햇살이 방 전체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저물어가던 그 가을날 함께 맞은 첫 번째 아침처럼 지금 내 옆에는 하드엘이 누워 있었다.

이미 깨어 있던 하드엘은 내 뺨을 어루만지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늘 그랬듯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일어났소?”

잠기운이 가득히 스민 목소리 사이에 잔잔한 미소가 섞여 있었다.

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자 피식 소리 내어 웃은 그가 두 팔을 벌려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단단한 몸이 밀착될수록 어젯밤이 다시금 상기되었다. 밤새 짙어졌던 향기가 그의 목덜미에서 묻어났다.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얇은 드레스가 바닥에 널브러진 걸 보고 시트까지 당겨 온몸을 감쌌던 첫날밤처럼.

“언제 놓아주실래요?”

“조금만 더.”

순순히 놓아주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사실 나도 바라던 바였고.

나는 전과는 달리 담대하게 그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내 것처럼 세차게 뛰는 심장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말이야…….”

“네?”

돌연 하드엘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침실을 하나로 합쳐야 할까 봐.”

저리 서늘한 눈으로 고심하던 게 그것이었다니. 하드엘 나름은 진지한 고민이었겠지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겨주던 그는 이런 나를 발견하고 오른쪽 눈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게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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