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침대에 누워 있던 마르누아는 서서히 눈을 떴다.
사방으로 퍼진 햇살이 천장 위로 어른거렸다. 그것이 시야에 담긴 전부였다.
느리게 주변을 둘러보던 마르누아는 이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지나치게 생생해 현실감마저도 느껴지던 꿈.
차가운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는 밤이었다.
‘이제 나오시죠? 다 끝났는데.’
그렇게 말하고 한 걸음 다가가자 한 여자가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가벼운 발걸음과 어울리지 않게 여자의 표정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끝난 거야?’
그 질문에 고개를 까딱이며 낮게 실소하자 연갈색 눈으로 여자는 자신을 매섭게 노려봤다.
어깨를 으쓱하며 한 걸음 물러나니 그제야 여자가 눈길을 거두고 주저앉은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어둠에 익숙한 눈이었다.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건 쉬웠다.
놀랍게도 주저앉은 남자는 황제였다. 다른 누구일 수도 없었다. 제국의 문양이 금빛으로 새겨진 칼집이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이런 걸 지닐 수 있을 만한 사람이 그뿐이거니와 어쩌다 우연히 본 황제의 초상화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멀쩡한 거지? 이 사람이 다치면 당신도 죽는 거야.’
자신에게서 황제의 안전을 재차 확인한 여자가 방금까지도 염려가 묻어 있던 눈을 휘며 황제의 볼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황제의 귓가 근처로 다가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죄송해요, 폐하. 하지만 사랑하니까. 이해해 주실 거죠?’
큭큭거리는 여자의 재수 없는 웃음소리가 희미해질 때쯤 그는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검은 머리에 광기가 차오른 연갈색 눈. 흔한 얼굴은 아니었다. 취향은 아니나 꽤나 봐줄 만한 외모이기도 했다.
본 적이 있는 여자였던가? 그렇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겪지 않은 일이 분명한데 귓가에 울리던 짐승소리, 손끝을 스치던 스산한 바람결까지 생생했다.
마르누아는 기분 나쁜 꿈이 다시 떠오르려 하자 오른쪽 눈가를 찌푸렸다.
악몽이라 하기엔 자신이 웃고 있었고 그게 아니라 하기엔 깨어난 후가 불쾌했다.
설마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볼 수 있게 된 것인가. 그도 아니면 오늘 운수가 나쁘거나.
“치정은 딱 질색인데.”
그는 표정을 굳히고 이만 몸을 일으켰다. 협탁에서 가면을 주워든 그는 무심코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오후였다.
이맘때의 오후는 거슬릴 정도로 찬란했다. 높고 푸른 하늘 위에서 날개를 펼치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를 보던 마르누아는 이만 걸음을 옮겨 거울 앞에 섰다.
끔찍한 상처가 난 얼굴이 거울 위에 비쳤다.
그리고 이를 보자 어이가 없게도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얼마 전부터 새로 생긴 이상한 습관이었다.
날로 곪아가는 상처를 보는 데 무뎌지긴 했어도 그걸 보고 이리 정신 나간 듯 웃은 적은 없었는데.
한 손에 들고 있던 가면을 쓰며 마르누아는 상처가 난 왼쪽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돌아서서 그는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그림 쪽으로 다가섰다.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그림 속 여자가 검은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봐 주었다. 아이로 변해 만났던 그날처럼.
쌀쌀하지만 아직 은근한 온기가 감돌던 초가을. 칸제로스 공작이라는 자가 애타게 자신을 찾아다닌다기에 사람을 부려 적당히 사는 곳을 흘려주었다.
돈이 많고 지위가 높으신 분께서 이 미천한 흑마법사를 찾아 주신다는데 그 정도 수고스러움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유난히 날이 좋았던 그날의 외출도 공작의 얼굴이나 보러 갈까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남의 상처를 두고 같잖게 위로나 건네는 웬 여자를 만난 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네 상처 하나도 안 무서워.’
그런 말을 꺼내며 그 여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게 우스워 그만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그게 다였다.
집에 와서 이렇게 그림까지 그려 남길 정도로 그 상황이 재미있진 않았는데.
그저 이상하리만큼 잊히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렸고. 매번 눈에 띄기에 보았다. 이유는 없었고 괜히 복잡한 이유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마르누아는 정성 들여 그린 그림을 유심히 보며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이마 아래로 흘러내렸다.
깨어나자마자 이름도 모르는 여자를 보는 것이 일상이 된 것처럼 그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누굴까.”
궁금했지만 지금은 저 여자를 애써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구태여 번거롭게 그런 일을 해야 하나? 나중에 마음이 바뀐다면 혹시 또 모를까.
-똑똑똑.
그때였다. 아주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 것은.
이쪽에서 답이 없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기다렸던 이의 방문임을 알아챈 마르누아는 입가에 씨익 웃음을 그려냈다.
검은 천으로 그림을 덮은 그는 손을 빗 삼아 머리를 쓸어 넘기고 빠르게 침실을 빠져나가 문 앞으로 나아갔다.
“안에 있으면 나오시게.”
목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한 남자가 놀란 듯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의 알 바는 아니었다. 자신의 목적은 공작이었으므로. 흑마법을 필요로 하고 그 대가를 치러줄 수 있는 공작.
“오랜만입니다, 공작님.”
마르누아는 로브로 얼굴을 가린 공작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잔뜩 휘어진 눈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남자를 경계하며 공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오랜만이라니? 날 본 적이 있나?”
“이렇게 마주 뵙는 건 처음이지요.”
공작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는 사이 마르누아는 공작의 어깨 너머를 불현듯 응시했다.
얼마 안 가 마르누아의 입술 사이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여기까지 사람을 너무 많이 달고 오셨네요.”
그의 말에 집사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공작 역시 눈썹을 치켜뜨며 고개를 돌렸다.
인적이 드물다 못해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거리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만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누구도 마르누아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외출을 감시하는 기사들의 눈을 피해 지하 출구로 빠져나왔으나 황후가 자신에게 따로 붙인 감시가 더 있었다면 이 정도의 미행이야 어려울 게 없었을 것이다.
“황후가 감시를 붙였나 보군. 그자들이 여기까지 날 쫓은 모양이야.”
“저들의 기억은 지워뒀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해 주시지요. 이러면 제가 곤란해지거든요.”
“앞으로라니? 네놈 같은 것을 찾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똑바로 알아두게. 난 이런 더러운 흑마법에는 관심조차 없어.”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마르누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아두겠습니다. 어쨌거나 들어오시지요.”
따라온 남자를 밖에 세워 두고 그의 안내에 따라 문턱을 넘은 공작은 집 안을 천천히 훑었다.
책장과 술병, 낡은 탁자와 의자가 전부인데 뭘 저리 꼼꼼히 살피는지.
사찰이라도 하는 듯한 공작을 응시하던 마르누아가 돌연 고개를 갸웃거렸다. 꿈에서 나온 여자와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였다. 특히 저 눈매.
시선을 느꼈는지 공작이 몸을 틀었다. 자연스럽게 그를 마주한 마르누아가 방금 전의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며 물었다.
“제가 차라도 내어드려야 하나요?”
“되었네. 오래 머물 생각 없네.”
집주인이 앉으란 말을 하기도 전에 공작은 방 한편에 놓여 있는 의자에 가 앉았다. 그 순간마저도 모든 행동이 자로 잰 듯 정확했다.
“그렇다면야 뭐. 무슨 일로 절 찾으셨습니까?”
공작과 마주 보는 자리에 털썩 앉은 마르누아가 턱을 괴고 물었다. 적당히 예의를 차리는 것 같았지만 이제 보니 한없이 오만한 태도였다. 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공작은 한발 늦게 입을 열었다.
“흑마법이 필요하네.”
“흑마법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그건 알고 오신 것이지요?”
“물론.”
만족스럽게 웃어 보인 마르누아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는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서 무엇이 이뤄지길 원하십니까?”
“옥에 갇힌 딸아이가 있네. 죽기 직전까지 가되 얼마 뒤면 문제없이 일어날 수 있는 눈속임을 부려야 하는데 그런 걸 할 수 있겠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할 수야 있지요. 기간은 대략 한 달. 괜한 의심을 피해야 하니 천천히 말라죽는 쪽으로 하죠.”
마르누아의 오른쪽 입꼬리 끝이 보란 듯 올라갔다.
“단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느냐가 먼저입니다.”
“얼마인가?”
“글쎄요.”
공작의 질문에 그는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연속적으로 두드렸다. 계산이라도 하듯 눈을 굴리는 모습이 아주 즐거워 보였다. 경쾌한 소음을 거슬려 하는 건 공작뿐이었다.
“바로 답하게.”
“그럼 3년?”
“3년이라니?”
“흑마법은 제 수명을 사용해 부리는 마법입니다. 게다가 옥에 있는 공녀에게 마력을 써야 하니 더욱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니 이번 일에 마땅한 대가로 공작님께서는 제게 그 정도의 수명을 내어주셔야겠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예상했다는 듯 공작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시선을 들었다. 마르누아는 자신의 모습이 비친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 똑 닮았단 말이지.
“그러니까 내게 3년의 수명을 달라? 내가 너의 무엇을 믿고?”
귓가에 싸늘한 목소리가 꽂혔다. 마르누아는 방금까지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을 지우고 코웃음을 쳤다. 의자 깊이 몸을 기댄 그의 눈가 주위가 찌푸려졌다.
하나 느긋하게 공작을 응시하는 눈은 변함없이 여유 넘쳤다.
“그냥 믿으셔야지요. 달리 방법이 없으니 여기 오신 게 아닙니까?”
“뭐라?”
“제 말이 틀렸습니까?”
공작은 시건방진 흑마법사를 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에 개의치 않고 마르누아는 대화를 이어갔다.
“걱정 마십시오. 대가를 받고 계약하면 흑마법사는 계약에 묶입니다. 의뢰가 실패하면 계약자가 원하는 대로 값을 치러야 파기가 가능하지요. 정 불안하시면 일이 끝나고 대가를 내주셔도 됩니다.”
마르누아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곧 욕지거리라도 뱉을 듯 날카롭게 눈을 뜨고 있던 공작에게서 나지막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약간의 짜증스러움과 분노, 체념이 묻어 있는 그 무거운 숨결에 탁자 위에 내려앉아 있던 먼지가 일어났다. 직선으로 뻗은 빛 속에서 먼지는 부옇게 반짝거리며 부유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묻는 것이었다. 달리 선택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고작 3년,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보단 낫지. 그렇게 생각한 공작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입을 열었다.
“대가를 지불하지. 단, 일이 완벽히 끝난 후에.”
“뜻대로 하시지요. 참, 공작님께서 외출이 어려우신 듯 보이시니 대가를 치를 때는 제가 직접 찾아가지요.”
마르누아는 아주 훌륭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이라도 건네듯 환히 웃었다.
동시에 그는 손바닥을 펼쳤다. 공작의 손등에 검은 표식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피부에 스며들 듯 그렇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놀랄 새도 없이 공작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그 말이 들려오자마자 더러운 무언가라도 닿은 것처럼 손등을 북북 문질러 닦은 공작이 몸을 일으켰다.
우스운 장면이었다. 흑마법을 빌리기 위해 자신을 샅샅이 찾아다닐 땐 언제고.
마르누아는 소리 없이 실소하며 앞서가는 공작을 배웅하기 위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마르누아의 손이 이제 막 문고리에 닿으려는 찰나 단 한 번도 돌아보지도 않고 예의상의 인사말조차 건네지 않던 공작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도 되나?”
“얼마든지요.”
“내 명이 얼마나 남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