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혼이 나간 듯 서 있는 레이샤만이 유일하게 대법관을 바라보지 않았다.
“황족 시해는 미수에 그쳤으나 증인의 증언으로 살해의 혐의가 명확히 밝혀진 바. 공녀는 재판중 반성의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고 황실과 신전을 모욕하는 언행을 일삼았습니다. 본 재판정은 황족 시해죄를 1차 인정, 레이샤 드망 칸제로스에게 징역 50년을 선고합니다.”
대법관을 등지고 서 있던 레이샤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헛웃음을 흘렸다. 판결이 끝에 다다를수록 얼핏 울음소리처럼 들리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커져갔다. 작은 어깨가 끊임없이 들썩거렸다.
하지만 대법관은 개의치 않고 엄숙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벨리움의 법령에 따라 황족 시해죄는 즉결 재판이 어려운 점을 고려하였습니다. 황족 시해죄에 대한 재판의 결과가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피고인은 미결수의 신분으로 지상 감옥에서 2차 공판일을 기다릴 것을 명합니다. 조속한 시일 내에…….”
“잠깐.”
그때였다. 고고하게 앉아 이 사태를 관망하던 공작이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답답할 정도로 단정히 조인 타이를 매만진 공작은 예를 갖춰 숙인 고개를 들고 늘 보아왔던 차분한 눈길로 대법관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번 시해 사건에 관하여 저희 칸제로스 가문은 불구속 재판을 지지합니다.”
흠잡을 데 없는 정중한 말투였다. 어수선한 재판정 안에서 흐트러지지 않은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그의 주변에 있던 기사들은 당황하여 그를 말리지도 않고 경악하여 쳐다만 보았다.
-탕탕!
이 상황을 정리하려 탁자를 세게 내리친 대법관은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공작을 바라봤다.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공작께선 가택 연금 처분 중에 재판에 참관한 것이 아닙니까. 이만 조용히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일곱의 가문이 불구속 재판을 지지하고 나서면 대법관께서는 이 자리에서 지금 이 주장을 재고해야 함을 알고 계시겠지요.”
“일곱의 가문이라니요?”
대법관에게서 시선을 거둔 공작은 자신의 주변을 느리게 훑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뜻을 함께할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주길 바라네.”
장엄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레이샤는 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잠시 기대에 부푼 눈으로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대법관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공작을 뒤따라 일어설 이가 누구인지 지켜보았다.
장내에 있는 모두가 숨소리를 죽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공작은 여전히 홀로 우뚝 서 있었다.
지금껏 오만했던 표정이 당혹스러움에 잔뜩 구겨졌다. 공작은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미넬 백작을 향해 소리쳤다.
“뭐 하는가!”
미넬 백작은 시선을 고정시킨 채 꿈쩍하지 않았다. 그의 뜻을 따르기로 한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작.”
나는 실소를 흘리며 그를 불렀다. 분노와 치욕감이 엉킨 눈으로 공작은 나를 마주 봤다.
“신성한 재판정에서 이 무슨 소란인가요?”
“…….”
“할 말이 더 남았나요?”
이렇게 힘 뺄 것까지야. 어차피 다음은 당신인데.
내 질문에 대한 대답 없이 공작은 잘난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미넬 백작과 주위의 귀족들을 냉한 눈으로 훑어본 공작은 레이샤에겐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고 자리를 이탈했다.
그를 따르는 수행과 그를 감시해야 하는 기사도 함께 참관석을 빠져나가 문 쪽으로 향했다.
떠나는 공작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레이샤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레스 자락을 그러쥐는 손에 푸른 힘줄이 선명히 비춰 보였다. 그러는 사이 다시금 자세를 바로 한 대법관이 공작 탓에 못다 한 말을 이어나갔다.
“조속한 시일 내에 이번 사건에 대한 사실 관계를 더욱 세밀히 조사하고 그 외 언론 조작죄와 황실 모욕죄, 폭행죄와 협박죄 등은 추가적인 조사 후 다음 재판에서 함께 판결하겠습니다. 감형은 없으며 단, 형량은 늘어날 수 있습니다.”
벨리타는 제 발로 재판정을 빠져나갔다.
문제는 레이샤였다. 기사들은 좀처럼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 레이샤를 억지로 일으켰다.
“이게 아니야…….”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끌려 나가며 레이샤가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전처럼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공허한 눈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레이샤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녀의 발에서 벗겨진 구두 한 짝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둥. 둥. 둥.
재판의 끝을 알리는 북소리가 멀리까지 힘차게 울렸다.
재판정의 거대한 출입문이 열렸지만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일어나 나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재판정에 선 황후에게 표하는 예우였다.
귓가에 은은히 울리는 마지막 북소리의 여운마저도 서서히 공기 중에 흩어졌다.
조롱과 야유가 사라진 장내는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은한 바람결을 따라 드레스 자락이 너울거렸다. 나는 고요한 참관석을 느리게 둘러보았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그렇게 먼 길을 돌아 이곳에 섰다. 레이샤 네가 무너지고 앞으로 칸제로스가의 몰락이 시작될 이곳에.
그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감격스럽다거나 놀랍다기보다는 그저 기뻤다.
더 이상 아픈 날들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토록 바라고 또 바라던 평온한 일상을 하드엘 그 사람과 보낼 수 있다는 게. 난 그게 마냥 기뻤다.
단상 위를 올려다보자 미소를 그리고 있는 하드엘이 보였다.
그는 나를 마주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뜻대로 되었다. 그러니 더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이.
나는 그를 따라 입매를 올렸다.
그와 단둘이 있을 때만 이토록 편히 웃었는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커다란 재판정의 한복판에 서서 난 마음 놓고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래도 되는 날이니까.
“폐하. 이만 가시지요.”
어느새 멀리 떨어져 있던 신전 기사들이 내 앞으로 걸어왔다. 기사들의 뒤에는 날 따라온 황후궁 시녀들도 함께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재판정의 전체를 눈에 담고서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재판정을 빠져나가는 내내 참관석 쪽에선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흘러드는 새소리만이 오전의 햇살과 어우러져 고요히 퍼졌다.
난 기사들을 거느린 채 정면을 응시하며 출구로 난 길을 따라 계속해 걸었다.
* * *
“바로 판결이 나야지! 미결수라니!”
“뭐 어떡해. 법이 그렇다는데. 옛날에 어떤 사람이 살인자로 몰려 사형을 당했다가 뒤늦게 아니라는 게 밝혀진 이후로 시해죄나 살인죄는 여러 차례 재판을 받도록 법이 개정된 거래. 그래도 감형은 없다니까 다행이지 뭐.”
“아니 그래도! 이번은 증인이 확실하잖아. 공녀가 저렇게 뻔뻔한 얼굴로 헛소리를 떠들어대는데 이걸 옆에서 지켜보는 황후 폐하께서는 한결같이 침착하셨어. 심지어 나서서 변론까지 하셨다고. 그걸 보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알아?”
“너 몇 달 전만 해도 공녀님이 황후가 되셨어야 한다면서 따지고 들지 않았었냐?”
“그건 그때고! 신전 기사단 창단식 이후로 내가 그런 소리 한 적 있어? 그리고 공녀가 저런 여자인 줄 알았다면 편을 들지도 않았지.”
황후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하나둘 고개를 들었고 재판정을 빠져나갔다.
그들 중 몇몇은 가슴을 쿵쿵 때리며 그동안의 자신의 태도를 회개하거나, 공녀를 추앙했던 과거를 되새기며 저들끼리 공작가의 흉을 보았다.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내젓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황후가 사라진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역시 대부분은 울분이 터져 숨 쉴 틈도 없이 공녀를 향한 힐난의 말들을 떠들어댔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공녀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 때부터 뭔가 찜찜하다고 했지?”
“아까 재판 중에 공녀가 웃었던 거 생각하면 소름 끼쳐 진짜. 베르체늘 고아원 원장은 공녀가 무죄라고 그렇게 떠들고 다니더니. 그 사람도 오늘 와서 재판을 봤겠지? 이제야 그 입을 좀 다물겠네.”
“잠깐 조용히.”
“아, 왜!”
어느 순간 사람들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들의 눈길이 향한 곳엔 칸제로스 공작이 있었다.
누구보다 먼저 이 재판정을 빠져나간 공작은 기사들을 등지고 수행의 호위를 받으며 세워진 마차에 서둘러 오르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금세 마차 안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질타 섞인 숙덕임을 뒤로한 채 공작가의 마차는 한참을 내달렸다.
빠르게 회전하는 바퀴 아래에서 마른 잎은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사랑스럽고 바르게 자란 공녀의 추락.
배신감에 분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도, 한순간 악마가 된 공녀에게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표하는 사람들도 저마다 아주 흥미로운 화젯거리를 나누듯 그렇게 오늘 열린 재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재판에 참석한 사람들이 곧 돌아와 판결이 어떻게 났는지 말을 덧붙이면 저 목소리들은 더욱 커져갈 것이다.
그리고 입 모아 이야기하겠지. 그동안의 칸제로스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앙상해진 나뭇가지가 만든 볼품없는 그늘이 공작의 옆얼굴 위로 빠르게 흘러 지나갔다.
아무 말도 않던 공작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창밖 풍경을 응시했다.
언제나처럼 단정한 자세였지만 치욕감에 떨리는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한 순간마저도 그랬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 마차가 멈춰 서고 조용한 공작에게 마차 바깥에 선 집사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공작님. 도착했습니다.”
그가 답하지 않아도 마차의 문은 저절로 열렸다.
짙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웅장하게 늘어선 공작저가 보였다.
정중히 고개 숙인 집사의 뒤로 줄지어 선 사용인들이 쭈뼛대다가 허리를 굽혔다.
공작은 평소와 다름없이 꼿꼿이 고개를 들고 앞을 보며 걸었다. 그런 그가 돌연 멈춰 선 것은 주변에 자신을 뒤따라오는 집사만 남았을 때였다.
“마르누아. 그자가 지금 아벨리움의 수도 어디에 있다고 했지?”
“마르누아라면…….”
“아니다. 답은 필요 없으니 오후가 되면 기사들의 감시를 피해 외출을 준비하고 네가 나를 그곳으로 직접 안내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미결수의 신분일 때 빼와야만 했다. 이번이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공작은 집사의 답을 듣고서 다시금 걸음을 내디뎠다. 비쳐드는 햇빛 탓에 더욱 밝아진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