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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34)화 (134/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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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나는 어설프게 웃는 벨리타를 응시하며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용서. 그런 걸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재판정에 서서 그토록 숨기던 비밀을 덤덤히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니 그저 위로해 주고 싶었다.

한참 벨리타와 눈을 맞추던 난 이만 시선을 내려 의외로 조용한 레이샤를 살폈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뜬 레이샤는 한 마디 반박도 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계속해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서야 그녀의 시선은 하드엘에게로 옮겨 갔다. 나를 바라보는 하드엘은 공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비어 있는 황제의 옆자리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그녀를 보니 기가 막혔다.

“증인이 죄를 시인하고 공범임을 인정했습니다. 공녀의 변호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까?”

“…….”

“변호인?”

레이샤의 변호인은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끝이 나지 않을 침묵 속에서 대법관의 목소리만 무의미하게 허공을 떠돌았다.

“한 가지 더.”

그 고요를 가장 먼저 깬 건 나였다. 한 걸음 다가서자 그 발걸음 소리에 반응한 레이샤가 내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기자를 매수해 언론을 조작하려 든 것 역시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겠죠.”

“언론을 조작했다니요?”

“엘리움의 특집 기사.”

내 말을 단숨에 알아들은 레이샤가 눈썹을 찡그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저를 범인으로 몰아가세요?”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나는 뒤에 있던 황실 측의 변호인을 향해 즉시 명했다.

“서류 제출하세요.”

“네?!”

“준비한 서류.”

“앗! 네!”

입을 벌리고 나를 보고 있던 황실 측 변호인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나의 명을 따랐다.

그로부터 받아든 서류를 증거로 채택한다는 말을 마친 대법관이 종이를 넘기는 사이 내가 필요한 말을 더했다.

“아틴 왕국과의 무역거래서입니다. 맨 아래에는 아틴 왕국으로부터 들여온 귀금속을 아벨리움의 상단에서 어느 가문과 거래했는지, 그 내역이 상세히 적혀 있죠. 아틴 왕국의 특정 광산에서만 채굴되는 특별한 귀금속이 아주 많이 거래되었더군요.”

“특별한 귀금속이라니요? 이건 또 무슨…….”

아예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레이샤의 변호인이 힘없이 물었다.

“베릴바이트. 이렇게 말하면 공녀는 알겠죠?”

“무슨 소리세요?”

“잊어버렸어요? 기자 엘리움을 매수해 내게 불리하게 언론을 조작하려고 그대가 건넨 보석이 베릴바이트잖아요. 이렇게 자세히 말해줬으니 이젠 기억이 나려나?”

거짓 울음으로 붉어진 눈가가 움찔거렸다. 레이샤의 눈은 이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칸제로스가가 사들인 베릴바이트가 십 캐럿인데 전부 어디에 있죠?”

“제가 왜 그걸 말씀드려야 하죠.”

“대답하세요, 공녀.”

그녀의 답을 재촉한 것은 내가 아닌 대법관이었다. 궁지에 몰린 레이샤가 자신의 변호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짓을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입을 열 수 없는 것이다. 저지른 죄를 전부 털어놓지 않았으니 도움을 줄 수 있을 리가.

“삼 캐럿은 그대로 보관 중입니다. 나머지는 선물했고요.”

너무 멀어 보이지 않는 공작의 표정을 흘끗 살피고서 레이샤는 결국 마지못해 답했다.

“누구에게 선물했나요?”

“그건…….”

계속되는 추궁에 레이샤의 변호인은 작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변호하기를 완전히 포기했다는 의지를 내비치듯 그가 떨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녀. 답할 수 없는 건가요?”

“아무튼 저는 그런 짓을 벌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짓을 벌인 적이 없다?”

나는 품에 지니고 있던 주머니를 꺼내 레이샤의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이래도요?”

주머니를 열어 털어내자 손바닥 위로 굵은 보석 알이 툭 떨어졌다. 오랜만에 빛을 품은 붉은 보석이 매끄럽게 반짝였다.

“나머지 삼 캐럿은 엘리움을 협박할 때 보냈던 여자에게 있겠죠? 대법관, 내가 가진 베릴바이트를 증거품으로 넘깁니다. 그리고 당시 상황을 묘사한 엘리움의 진술조서와 엘리움에게 베릴바이트를 건넨 여자의 얼굴을 그려낸 몽타주를 서류의 가장 마지막에 첨부했으니 보세요.”

“아니야! 내가 벌인 짓이 아니라고!”

“당시 엘리움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내 분노를 돋우기 위해 황후궁 시녀를 납치해 폭행까지 해놓고 뻔뻔하게 그런 적이 없다?”

루안의 일을 언급하자 레이샤가 실핏줄이 선 눈을 번뜩이며 코앞까지 다가와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와중에도 체면이 걱정인지 구겨진 얼굴을 숨기려 애쓰고 있었다.

“약속과 다르잖아요? 뺨까지 때리고 어머니가 묻혀 있는 영지까지 회수했다면 그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게 도리 아닌가요?”

“도리라니. 그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싶어, 공녀. 그리고 단단히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 너 같은 사람과는 도덕적인 의리 같은 걸 내세우며 싸우지 않아.”

“공녀.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이 전부 사실입니까?”

대법관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녀는 지은 죄를 반박하려 직접 나섰다.

“폐하의 분노를 돋우기 위해 황후궁 시녀를 납치해 폭행했다니 너무 억지스러워요, 제가 왜 그런 짓을 벌이겠어요.”

그러나 허접한 변명에 아까와 같은 질문이 그녀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위 내용이 전부 사실이냐 물었습니다.”

“아니라고요!”

참다못한 레이샤가 대법관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증거가 있는데도 어떻게 저리 뻔뻔한!”

“공녀님에 대한 소문만은 끝까지 믿지 않았는데.”

“공녀를 이 제국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날선 제국민의 목소리를 듣던 내 변호인은 뒤에서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제가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폐하.”

머쓱하게 미소 짓는 그를 발견한 나는 턱짓으로 그에게 앞서가라 명했다.

“여기서부턴 그대가 나서줘요.”

“하지만 이번 재판은 폐하께서 맡아주시는 것이 더 나을…….”

“아니요. 내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 변호인으로 온 것이 아니니까요.”

그제야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변호인이 대법관의 앞으로 나갔다.

한 번 숨을 고르고 그는 유창한 언변으로 그녀의 죄를 낱낱이 읊었다.

“황족 시해죄는 목격한 이가 많은 바. 더불어 확실한 증거까지 발견되어 공녀가 사건의 범인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녀는 반성의 태도를 보이기는커녕 연관된 모든 범행을 부인하고 황후 폐하를 욕보이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는 황실과 신전을 우롱한 일입니다. 살인이 미수에 그쳤으나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공녀에게는 무거운 형벌을 내리셔야 마땅합니다.”

“변호인.”

대법관이 레이샤의 변호인을 바라보며 이에 반박할 말이 있냐는 듯 물었다. 그의 입에서 나올 답을 뻔했다.

“인정합니다.”

투명하게 부푼 레이샤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희미하게 떨리는 입술 위로 눈물이 타고 흘렀다.

“아니요. 인정 못합니다. 내가 아니라는데 누구 마음대로 인정하나요?”

“증거가 너무 명확합니다. 여기서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셔야 다음 재판에서 형량이 줄 수 있습니다.”

레이샤의 뒤에 서있던 그녀의 변호인은 대법관에게 들리지 않게 속닥였다. 그러나 그녀는 변호인의 마지막 조언까지 무시하며 참관석의 가까이로 천천히 걸어갔다.

“제가 벌인 짓이 아닙니다. 벨리타, 그 여자의 증언은 죄다 거짓이에요. 폐하를 시해하려 한 것도, 폐하의 시녀를 폭행한 것도, 언론을 조작하려 한 것도 전부 제가 벌인 짓이 아니라고요. 모두 황후 폐하의 자작극입니다.”

제국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공녀를 힐난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그에 레이샤는 더러워진 드레스를 끌며 더욱 앞으로 나아갔다.

“제가 알고 있던 진실을 이 자리에서 모두 밝히겠습니다!”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그녀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눈물로 범벅이 된 눈가에 찰나 비웃음이 스쳤다. 곧이어 오른팔을 들어 올린 레이샤는 손가락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사실 폐하께선 가짜 에스타란토에요! 에스타란토인 척 여러분들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래서 자신의 거짓을 덮기 위해 진실을 아는 저를 파렴치한 죄목으로 엮어 매장하려는 거예요.”

“정숙하세요, 공녀!”

대법관은 재판과 관련 없는 이야기를 떠드는 공녀를 엄하게 다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욱 소리 높여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아시잖아요. 저는 칸제로스가의 공녀입니다. 선망 받는 칸제로스의 레이샤 드망 칸제로스. 그대들이 알고 있는 그 공녀가 저예요. 제가 무엇이 부족해 저런 끔찍한 짓을 꾸미겠어요?”

단상 위에서 하드엘은 공녀를 죽일 듯 쳐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올 듯 대기 중인 아델과 신전 기사들도 보였다.

나는 괜찮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그들과 잠시 동안 눈을 맞췄다.

후. 깊이 한숨을 내쉬고 다시 본 자리에서 여전히 레이샤는 헛소리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눈물로 호소라니. 게다가 말도 안 되는 망상까지. 공녀도 참 피곤하겠어요.”

나는 내리뜬 눈을 천천히 들었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말소리를 귀신같이 알아챈 레이샤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망상이라니요? 더 이상 억울한 이를 만들지 마시고 이제라도 털어놓으세요! 폐하의 진짜 정체를! 제국민들을 기만하는 행위는 옳지 못합니다.”

“지금 내게 명령하는 건가요?”

“충언을 명령이라 생각하신다면 제가 할 말이 없네요.”

“과연 나만 그렇게 생각할까요?”

나는 눈짓으로 제국민들을 가리켰다. 그녀의 등 뒤로 사람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참다못한 이들은 일어나 삿대질을 하며 레이샤를 깎아내렸다.

“감히 폐하께 뭐 하는 짓인지!”

“공녀의 형량을 늘려야 합니다!”

“그래요, 이건 신전까지 욕보인 발언입니다!”

레이샤의 맑은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덜덜 떨었다. 다가올 겨울 추위라도 먼저 느낀 듯 가녀린 어깨가 바들거렸다.

말했잖아, 레이샤. 끝난 건 너라고.

“판결하시지요, 대법관.”

레이샤가 조용해지자 재판정 전체가 숙연해졌다. 소르르 불어오는 바람이 장내를 훑고 지나갔다.

대법관은 사람들이 완전히 입을 닫았을 때 말문을 뗐다.

“판결하겠습니다.”

그의 시선은 먼저 증인석에 서 있는 벨리타를 향했다.

“벨리타 엔느 데보니안. 그대는 황족 시해를 도왔다는 사실이 1차 인정되는 바이나 증인으로 나선 점, 지난 일을 충분히 반성하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 황후 폐하께서 재판부에 직접 선처를 요구하신 점 등을 고려해, 징역 6년을 선고합니다.”

벨리타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순순히 자신에 대한 판결을 받아들였다.

곧 공작이 나설 때가 오겠구나.

나는 참관석에서 미넬 백작을 찾아냈다. 조마조마하는 게 눈에 띄어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의 주변으로는 일전에 보았던 귀족들이 퍼져 앉아 있었다.

“레이샤 드망 칸제로스.”

대법관이 레이샤의 이름을 부르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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