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내 말을 들은 대법관의 눈이 커다래졌다. 내 변호인도 그를 따라 눈을 번쩍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원래라면 이 자리에서 내가 할 만한 말은 없었다.
질문이 오면 답을 하는 게 내 역할의 전부이다. 사실 그마저도 옆에 앉아있는 황실 측의 변호인이 알아서 나의 답변을 대법관에게 전달해 줄 것이었다.
그저 나는 이 자리에서 시해 사건의 주동자로 몰린 레이샤가 어떻게 무너져가는지만 지켜보면 됐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라고? 저 얼굴을 보고?
그럴 수는 없지. 조용히 있다가 갈 거였다면 애초에 참석 의사를 밝히지도 않았어.
“폐하께서 직접이요?”
가볍게 턱 끝을 까딱이자 잠시 고민하던 대법관이 순순히 내 요구를 받아들였다.
나는 곧바로 레이샤를 향해 다가갔다.
흥미진진한 상황을 지켜보듯 주위를 에워싼 제국민들은 숨을 죽였다.
오전의 화사한 가을빛이 고스란히 내리쬐는 재판정에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가 명명히 울려 퍼졌다.
남색의 드레스가 쓸고 지나가는 길 위로 여유로운 햇살이 찰랑이는 물비늘처럼 일렁였다.
이렇게 좋은 날에, 이다지도 좋은 구경이라니.
“공녀.”
내 부름에 레이샤가 미간을 구겼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선 나는 그녀에게 분명히 물었다.
“시해 사건의 주동자가 아니라고요?”
“그건 폐하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폐하, 제가 정중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저의 무죄를 밝혀주세요.”
저 예의 바른 말투도 참 오랜만이네.
“그대의 무죄를 밝혀 달라?”
“네.”
깜빡거리는 연갈색 눈이 기다란 속눈썹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억울함을 드러내듯 눈썹을 살짝 찡그린 레이샤는 내 앞에서 잘도 말을 이어갔다. 가소롭게.
“혹시 공녀는 무죄란 뜻을 모르나요?”
상냥히 되묻자 레이샤의 입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공녀, 내가 묻고 싶은 건 하나에요. 식기에 담았던 음식을 조금씩 덜어낸 사실을 알자마자 왜 곧바로 수프를 뱉었던 거죠?”
“대법관님. 제가 질문에 답할 의무는 없는 거지요?”
“식사에 미리 독을 타고, 음식이 섞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먹었다가 알고 난 후에 바로 뱉은 거잖아요. 목격한 이들만 수십인데 설마 아니라 하진 않겠죠.”
불리한 질문을 아예 무시하려는 듯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재판정에서 대답하지 않아야 할 것을 아는 걸 보니 베르시트 남작보단 처신이 나았다.
하지만 지금은 공개 재판이다. 여론에 휩쓸리기 쉬운 레이샤에게 득이 될 게 하나 없는 재판.
“세상에, 뱉었다고?”
“그러면 다 알고 있던 거잖아!”
“그런 추악한 짓을 하고 어떻게…….”
“공녀님! 어서 답해주세요!”
“그래요! 결백하다면 답을 해주세요!”
지금 이 대화를 듣다 못한 이들 중 몇몇이 레이샤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제국민들은 예상대로 반응해 주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레이샤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균열이 생기듯 고운 눈매가 일그러졌다. 참관석에서 들려오는 외침이 점차 커지자 그녀는 무겁게 다물고 있던 입을 다급히 열었다.
“여러분, 저는 황후 폐하를 해하려 한 게 아니에요! 그건 전부 벨리……!”
벨리타를 죽이려 한 것인데 실수였다. 그 말도 할 수가 없겠지. 어느 쪽이든 살인 미수이니.
말을 이을 수 없던 레이샤가 결국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서 시선을 떨궜다.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그저 맛이 역해 뱉은 것뿐입니다.”
“정말?”
맛이 역했다니. 너무나 단순해 지루하기까지 한 답변이었다. 조소를 흘리자 레이샤는 가는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뒤에서 이 상황을 보다 못한 그녀의 변호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대가를 받았으니 당연히 그는 변호인의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제가 한 가지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조심스럽게 입을 떼는 남자의 눈은 내가 아닌 대법관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질문은 당연히 나를 향한 것이었다.
“폐하께서 사건이 벌어진 당시 에스페톡에 중독된 공녀님께 해독제를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날 어떻게 해독제를 지니고 계셨던 건지 자세한 경위를 듣고 싶습니다.”
레이샤는 변호인의 날카로운 물음에서 한 줄기 희망이라도 본 건지 대답을 재촉하듯 방금까지 날 흘겨보던 눈으로 내 두 눈을 빤히 바라봤다.
“내가 왜 경위까지 설명해야 하죠?”
“떳떳하시다면 설명하지 못할 이유도 없으시겠지요. 폐하께서 이 일과 연관이 있던 게 아니라면 왜 하필 그날 그 자리에서 에스페톡의 해독제를 들고 계셨던 거죠?”
“공녀, 과한 억측은 삼가는 게 좋을 텐데. 누가 들으면 내가 공녀를 몰아가기 위해 이번 사건을 조작한 줄 알겠어요.”
“제가 억측을 하는 건가요? 이곳은 신성한 재판정입니다. 부디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폐하.”
멀쩡히 나와 대화를 나누던 그녀가 끝에 가서는 돌연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듯 목소리에 물기를 머금고 말을 했다. 저것도 거짓. 모든 게 연기겠지.
지금 진실한 하나는 그녀의 눈빛뿐이다. 날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저 눈빛.
“그날 폐하께서는……!”
물러나 서 있던 내 변호인이 변론을 하려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그를 막아 세우고서 직접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그날 난 해독제를 지니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죠?”
“당연히 문제가 있지요. 우연이라기엔 너무 이상하잖아요.”
“그저 요즘 독약에 관련된 흉흉한 기사들이 많이 쏟아지기에 시녀에게 부탁해 해독제를 구해 지니고 다닌 것이 전부에요. 오히려 이 부분은 추궁이 아닌 감사 인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감사 인사라니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며 되묻는 그녀의 태도에 난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다시 본 레이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구겨져 있었다.
“그대는 날 죽이려 들었지만 결국 내 덕에 목숨을 구했잖아요.”
“그건……!”
“그날 내가 아니었다면 공녀는 지금 이 자리에 설 수도 없었겠죠.”
은근히 공녀를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은 이젠 아예 혀를 끌끌 찼다. 서둘러 주변의 반응을 훑은 레이샤가 눈시울을 붉히고서 세차게 고개를 휘저었다. 보란 듯 눈물까지 쥐어짜는 모습은 차마 보기가 힘들었다.
“아니에요! 사실 이 사건은 황후 폐하께서 조작하신 거예요! 여러분 모두 속고 있는 거라고요!”
“또 헛소리.”
“뭐, 뭐라 하셨습니까?”
“입만 열면 거짓을 말하고, 앞에서는 가식을 부리고.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살 생각이에요?”
“폐하! 거짓이라니요? 거짓을 말씀하고 계신 건 폐하 아니십니까?”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는 이제 밝혀지겠죠.”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시선을 들었다.
“대법관.”
“예, 폐하.”
“증인 신청합니다.”
분노를 꾹 누르고 떨고 있던 그녀가 증인이라는 한 마디에 순간 굳어 참관석을 바라봤다.
벨리타가 증인이 될 건 당연히 알고 있었을 텐데. 아마 공작이 손을 써 상황이 조금은 다르게 흘러갈 거라 예상한 모양이었다.
누군가를 찾는 두 눈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에 공작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제 딸을 애타게 바라볼 줄 알았더니 의외로 공작은 침착했다. 너무 차분한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끼이익.
“벨리타!”
대법관의 명에 곧이어 작은 철문이 열리고 벨리타가 걸어 나왔다.
참관석에서 데보니안 백작과 그의 아들들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벌떡 일어섰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 탓에 눈살을 찡그린 벨리타는 아버지와 오라비의 부름에도 시선을 주지 않고 계속해 걸음을 내디뎠다.
잠시 후 하드엘을 향해 그다음을 나를 향해 마지막으로 대법관을 향해 정중히 예를 표한 벨리타는 말없이 증인석에 섰다.
“증인. 허위로 증언을 할 경우에는 위증의 처벌을 받을 것을 맹세합니까?”
대법관의 질문에 피딱지가 앉은 메마른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네. 맹세합니다.”
“증언 시작하세요.”
“제가 공녀님의 명으로 독약을 구매했습니다.”
벨리타가 던진 첫마디는 충격적이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장내에서 대법관은 일정한 어조로 그녀를 향해 물었다.
“여긴 재판정입니다. 스스로의 죄를 시인하는 겁니까?”
“네. 그리고 그간 황후 폐하를 둘러싼 소문 모두 저와 공녀님의 짓이었습니다. 거리에 떠돌던 추문과, 가십지에 실린 신전 기사와의 염문설까지 전부요.”
“세상에!”
“어쩜 그럴 수가!”
레이샤를 향해 노골적인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겠는지 레이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마를 짚었다.
옆에 있던 레이샤의 변호인은 아예 사색이 되어 있었다. 추문과 가십지. 이에 관해 처음 듣는 사람처럼 반응하는 걸 보니 공작이나 레이샤 둘 다 변호인에게 그간의 일을 솔직히 말해주지 않은 것 같았다.
차라리 죄를 인정하고 형량을 줄이는 쪽으로 변호인과 입을 맞춰두는 게 득이었을 텐데.
뭐, 공작은 자신의 편에 선 귀족들을 믿고 있으니 변호인에게 굳이 제 딸의 죄를 밝힐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변호인을 세워둔 건 그 딴엔 그저 최소한의 구색을 갖추는 일에 불과했을지도.
“그대는 어째서 그런 일을 꾸민 겁니까?”
“제가 살인자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마른침을 삼킨 벨리타가 대법관을 마주 보고 흔들림 없이 답했다. 하지만 떨리는 손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요한 침묵에 휩싸인 재판정의 한가운데서 고른 숨을 천천히 내쉬며 마음을 다잡듯 주먹을 꽉 쥐었다.
“아기는 곧바로 세상을 떠났으나 공녀님이 살인자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지금껏 저를 협박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알게 된 게 아니겠네요. 저의 약점을 잡고 이용하기 위해 제게 접근하라 그 남자에게 명한 것이 공녀님 본인이시니. 모든 것이 잘못된 행동인 줄 알았지만 저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공녀님의 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약을 구입하라 시킨 그날 역시도 그랬습니다.”
참관석에서 벨리타를 부르짖는 소리가 커져갔다. 데보니안 백작은 이제 오열하며 딸의 이름을 외쳐댔다.
“아버지.”
애써 무시하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쳐다보지 않던 벨리타도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벨리타의 말소리가 재판정에 선연히 울리자 제국민들은 이제 백작과 벨리타를 번갈아 바라봤다.
“전 더 이상 데보니안의 이름으로 살아가지 않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절 버리는 것이 당연하…….”
“누가 너를 버린단 말이냐! 누가 너더러 가문을 지키라 했더냐! 누가! 솔직히 말을 했어야지. 이 아비에게 뭐든 도움을 청했어야지!”
숨이 넘어갈 듯 오열하며 힘겹게 말을 잇던 백작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끝내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아들들이 옆에서 그런 백작을 부축했다.
벨리타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 두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소매 끝으로 닦아냈다. 그 후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간 억울한 일들을 겪으신 폐하께 진심을 다해 사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