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그처럼 단순한 답을 남긴 채 그는 한 모금 마신 차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답은요?”
“내겐 플로리아 그대만 있으면 돼.”
기분 좋은 답이었지만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내가 가늘게 눈을 뜨자 하드엘은 테이블 위에 올려 있던 내 손을 잡았다.
“당신은?”
“저는……. 음, 아무래도 많으면 좋지 않을까요? 아니지. 후계 싸움이라도 나면 큰일이니 한 명? 그래도 혼자면 외로울 텐데.”
“그럼 둘은 어때?”
“아! 두 명이 좋겠네요! 나중에 나무에 그네를 하나 더 달아야겠어요.”
고개를 끄덕이고 기뻐하는 나를 지켜보던 하드엘이 돌연 질문했다.
“그런데 말이야. 플로리아.”
“네.”
“그게 계획대로 될 일인가?”
그가 특별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빤히 보는 눈길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꼭 이상한 생각을 한 사람처럼 보일까 나는 “그럼요.” 하고 당당히 답하고선 가장 가까이에 있던 피낭시에를 집어 입에 넣었다.
“난 당신처럼 이성적이지 못해 큰일이야.”
몸을 기울여 내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털어주며 그가 속삭이듯 말을 전했다.
호수에 물결이 일 듯 가을 숲은 또 한 번 잔잔히 흔들렸다.
나와 하늘을 동시에 담은 회색 눈에 따스함이 깃들었다. 하드엘은 언제나 저 눈으로 오로지 나만을 바라봤다.
“폐하께서도 절 잘 모르시네요.”
여전히 두 볼에 열감이 느껴졌지만 나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의 뒤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 속 높게 뜬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푸르스름하게 하늘이 밝아 올 무렵 난 눈을 떴다.
곧이어 방 안으로 들어온 시녀들이 묘하게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 속에서 날 단장해 주기 시작했다.
시녀들은 작은 움직임에도 조심스러웠다. 걸음을 내디딜 때에도 괜스레 나를 힐끗거렸다.
그 사실을 알아채고 나는 거울을 응시하며 말했다.
“다들 평소대로 해도 돼요. 난 괜찮아요.”
“폐하.”
“그 여자의 재판일일 뿐. 그대들이 눈치 볼 필요는 없어요.”
힘껏 고개를 끄덕인 시녀들은 다시 제 할 일을 이어나갔다.
나는 미소 띤 얼굴로 그녀들과 눈을 맞추고 잠시 밝아오는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어둠이 걷힌 하늘은 점차 환한 빛으로 물들어갔다.
다가오는 아침은 레이샤의 첫 재판의 시작을 예고하고 있었다.
며칠 전 공작의 측근 미넬 백작에게 연락을 받았다.
굳이 연락을 달라 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나서 편지까지 보낸 온 것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있던 귀족들 모두가 내 뜻을 따랐다고 전해왔다. 공작을 아주 잘 속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오늘 재판은 뜻대로 끝이 나겠지.
나는 천천히 눈을 바로 들었다.
황후의 시해와, 언론의 조작. 그 외 지금껏 밝히지 않았던 수많은 죄들까지. 아벨리움의 형법상 이번 재판이 한 번에 끝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첫 재판만 잘 마무리된다면 몇 번의 재판을 더 거쳐도 형량만 더해질 뿐, 결론은 뻔했다.
“폐하, 단장이 끝났습니다.”
“고생했어요.”
잠시 뒤 유독 가라앉은 루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창가 너머로 빛줄기가 새어들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남색의 드레스가 차르르 펼쳐졌다. 걸음에 따라 은은히 반짝이는 드레스는 짙푸른 새벽녘을 닮아 있었다.
염려가 가득 묻은 루안의 눈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인 나는 드레스의 양 끝을 살며시 잡고서 나아갔다.
“이제 출발하죠. 황제궁에 연락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건넨 말에 화들짝 놀란 내가 반문했다.
“네? 언제부터요?”
“사실 아까부터 와계셨는데 신경 쓰이게 하기 싫으니 준비가 끝날 때까지 알리지 말라 하셔서…….”
“그럼 꽤 오래 기다리셨겠네요. 서둘러 나가봐야겠어요.”
내가 문 앞으로 다가가자 무거운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 너머에서 가장 먼저 날 맞이한 건 신전 기사 다섯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깊이 숙였던 몸을 천천히 들었다.
“다들 왔네요. 신전 근무인 이들만 따라도 되는데. 바쁘지 않아요?”
“폐하의 일이 저희에겐 가장 우선입니다.”
“어제 얘들이 폐하를 위해 밤새 신전 앞에서 기도를 드리지 뭡니까.”
아델이 건네는 말에 줄리아는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신전 기사들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
“이제 가실까요?”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들이 길을 내어주었다.
긴 복도를 거니는 내 걸음 소리에 뒤따르는 이들의 수많은 발소리가 더해졌다. 출구로 나아갈수록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드레스 자락에 스며드는 선명한 가을바람이 긴장감을 풀어주는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더 나아가자 바깥이 보이기 시작했다. 은화처럼 반짝이는 오전의 햇살 아래 수많은 기사들을 거느린 하드엘이 서 있었다.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천천히 눈을 내렸다. 나를 발견한 그의 눈가에 웃음이 번졌다.
“왔소?”
“폐하. 들어오지 않으시고 왜 바깥에서 기다리셨어요.”
“이리 봐야 더 반갑지 않을까 해서.”
거짓말.
그는 내게 한쪽 팔을 내어주었다. 더한 말을 하지 않고 나는 피식 미소를 띠며 그와 팔짱을 꼈다.
나란히 걸어가는 길에 우린 서로 레이샤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어제처럼 지극히도 평온한 날들에 대한 얘기만 오고 갔다.
재판이 끝나고 나면 서랠 왕국을 방문해 보자는 내 바람도 그에게 이야기해 보았다. 하드엘은 그 바람에 응하며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재판정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앞으로 펼쳐질 행복한 날들만을 그려냈다. 하드엘이 나를 마주 보고 내가 그를 마주 보는 시간 동안은 그럴 수 있었다.
하나 재판정에 들어서서는 달라져야 했다.
나는 참관 자리를 가득 메운 인파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열렬한 환호성으로 뒤바뀌어 재판정을 뒤흔들었다.
단상 위에 서 있던 대법관은 정중히 허리 숙여 내게 인사했다.
‘이 재판정에 이렇게 다시 찾아오게 되다니.’
나는 재판정을 천천히 훑고선 하드엘을 올려봤다.
“전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더 이상 하드엘과 함께할 수 없었다. 하드엘은 단상 위에서 이 재판을 참관해야 했고 이 사건의 중점에 서 있는 나는 대법관의 앞으로 가야 했다.
말없이 날 지켜보던 하드엘은 자신과 떨어져 선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언제나처럼 따스한 하드엘의 품속에서 난 그를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따 봐요 폐하.”
-둥. 둥. 둥.
내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판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장내는 정적에 휩싸였다.
대법관의 눈짓에 기사들은 참관석 아래에 난 철문을 열었다.
이윽고 몰골이 수척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샤였다.
양팔이 잡힌 채 대법관의 앞으로 끌려오는 그녀를 보고 대다수 제국민들은 탄식했다. 그 속에 야유와 조롱을 보내는 몇몇 이들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나는 눈을 들어 참관석을 살폈다. 얼굴이 낯익은 귀족들과 연금된 탓에 황궁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공작만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그리고 레이샤를 바라보았다.
“이거 놓으세요. 내 발로 걸어갑니다.”
“공녀님, 이게 원칙입니다.”
“놓으라니까.”
재판정의 소란 속에서 단호하고 고상한 그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몇 걸음 안 가 멈춰 선 레이샤가 자신의 양 팔을 잡은 기사들을 보며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못마땅한 눈으로 그들을 위아래로 훑으며 레이샤는 나름대로의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귀족의 품위는 잃기 싫었는지 내 앞에서처럼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기사들은 그녀의 요구에 어찌하면 좋겠냐는 듯 난처한 눈빛을 보내왔다.
잠시의 고민도 없이 난 풀어주라 고갯짓을 해 보였다.
풀어달라면 풀어줘야지. 레이샤 너의 마지막 자유인데 기꺼이.
억압에서 벗어난 레이샤는 이제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걷기 시작했다.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보았던 구두를 신고서 정말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그렇게.
얼굴을 들지 못하는 건 이런 레이샤를 뒤따르는 변호인이었다.
공작이 큰돈을 주니 변호를 맡았겠지만 시해 사건에 대한 변호인 데다가 황실뿐 아니라 내가 에스타란토이니 어찌 보면 신전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사건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울 만도 했다.
대법관의 앞까지 다가온 레이샤는 잠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공작이 자신을 구해줄 거라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태도일 수가 없었다.
아니면 끝까지 제국민들의 앞에선 선량한 공녀인 척 연기하고 싶다거나.
무표정하게 레이샤를 응시하던 나는 재판을 시작한다는 대법관의 말에 먼저 눈길을 거두었다.
“공녀, 앞으로 나오세요.”
한 걸음 앞서 나가는 레이샤를 따라 그녀의 변호인도 걸음을 옮겼다.
“지금부터 이 재판정에서의 진술이 그대에게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여유롭게 웃음을 그려낸 레이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눈을 맞추지 않고 서류를 넘기던 대법관이 낮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칸제로스가의 레이샤 드망 칸제로스. 그대는 황후 폐하의 식사에 에스페톡을 타서 아벨리움의 황후 폐하이신 분의 목숨을 앗으려 했습니다. 시해를 주도한 사실을 인정합니까?”
“아니요, 인정할 수 없습니다.”
“폐하의 식사에서 검출된 독약과 같은 독약이 공작저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누군가 저를 궁지로 몰아넣으려 수작을 부린 것입니다. 이번 사건 자체가 저를 매장시키려는 모함입니다.”
레이샤는 계속해 대법관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했다. 한결같이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였다.
입을 벙긋거리던 그녀의 변호인은 결국 단 한 마디도 뱉지 못했다.
“공녀는 지금 황족 시해죄를 전면 부인하는 겁니까?”
“네.”
아주 간결한 답이었다. 그녀는 와중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이마 위로 쓸어 빗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
공녀의 뻔뻔한 행동에 오히려 재판정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뭐지?”
“혹시 진짜 뭔가 오해가 있던 거 아니야?”
“그럴지도. 무려 칸제로스가잖아. 아쉬울 게 없는 분이 뭣 하러 그런 짓을 꾸며?”
“결백하지 않고서야 저리 당당할 리가 없지.”
야유와 조롱이 잦아든 자리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문을 던졌다.
미묘하게 바뀐 여론의 흐름을 읽어낸 그녀가 슬며시 곁눈질을 하여 내 쪽을 흘긋거렸다.
부드럽게 휘어진 입매 끝에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잠시만.”
언제까지 저 표정일 수 있으려나. 곧 발악하게 될 텐데, 레이샤. 창살에 갇혀 내게 고래고래 소리치던 어제처럼.
마침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픽 웃음을 흘린 나는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내가 공녀에게 질문해도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