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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31)화 (13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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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난 드레스의 양 끝을 잡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의 금빛 머리칼이 담뿍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내가 가까워지자 하드엘은 두 팔을 벌렸고 그대로 난 그의 품에 안겼다.

“잘 다녀왔소?”

따스한 품속에 얼굴을 묻자 다정한 그의 목소리가 더욱 깊이 울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럼요. 믿어주신 덕에 아주 잘 다녀왔습니다. 제가 아무 일도 없을 거라 했죠?”

눈썹을 들썩이며 보란 듯 말을 하자 그는 느릿한 손길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아델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뒤였다.

아델도 함께였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던 나는 민망해 빠르게 하드엘에게서 멀어졌다.

하드엘은 아델의 등장이 못마땅한지 턱 끝을 까딱여 아델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괜히 그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잡은 손은 마지막까지 놓아주지 않아 나는 어쩔 수 없이 하드엘의 곁에 바짝 붙어 서 있어야 했다.

“공녀에게 다녀오는 길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여기서부터 황후는 나와 함께 갈 테니 이만 가보게.”

아델은 나를 잠시 바라보는가 싶더니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물러나보겠다. 그 한 마디 말만 남긴 채 그는 멀어져 갔다.

“내가 같이 가주겠다고 할 때는 싫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드엘이 내 손을 살며시 잡아끌며 물음을 던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절대 알 수 없겠지만 이건 분명 토라진 어투였다.

“폐하께선 오늘 바쁘셨잖아요. 제가 방해가 될 수는 없지요.”

“방해라니. 당신이 허락만 해줬다면 오늘 새벽까지 남은 업무를 처리하고 갔을 텐데.”

“넬슨 백작이 들으면 기겁할 말이네요.”

하드엘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아델이 물러난 자리를 흘끗 쳐다보았다.

“게다가 하필 저자라니.”

“지금 질투하시나요?”

“질투를 안 할 수가 있나?”

피식 웃은 나는 맞잡은 하드엘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폐하가 이리 나와 주시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습니다.”

“그럼 더 할까?”

“더 있나요?”

“글쎄. 아마도?”

“제가 폐하의 질투를 돋울만한 일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아닌데.”

“플로리아, 당신은 나를 몰라.”

뭘 모른다는 거지?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하드엘이 대뜸 잡히지 않은 손을 뻗었다. 서슴없이 가까이 다가오기에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예상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뜨니 붉은 나뭇잎을 든 하드엘이 나를 빤히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뭐 하신 거예요?”

“이게 머리 위에 떨어져 있었소.”

“아…….”

나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눈치가 꽤 빠른 그는 이미 내 속을 훤히 꿰고 있는 듯했지만.

“플로리아.”

“어서 가요.”

황후궁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당장 걸음을 옮기고자 했으나 그가 도무지 움직여 주지 않았다.

“나 좀 봐.”

“저 지금 조금 창피한데 그냥 가면 안 될까요?”

하드엘은 내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결국 못이긴 척 돌아서서 그를 보았다.

“앞으로 오해하게 하지 마세요.”

“오해라니.”

그가 몸을 숙였다. 이마에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코끝에 그의 향기가 여운처럼 남아 맴돌았다.

“오해라면 당신이 한 것 같은데? 난 원래 이럴 생각이었소.”

바람에 부드럽게 흐트러진 백금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회색 눈이 어느 때보다도 맑게 빛났다.

내가 뚫어져라 자신을 보자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손을 꽉 잡아 나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황후궁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가보면 알게 될 것이오.”

* * *

제자리에 멈춰 선 아델은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 걸음을 따라 물결처럼 나부끼는 붉은 머리칼이 아름다웠다.

빛 속으로 사라져가는 플로리아의 뒷모습을 아델은 오래도록 응시했다.

경쾌한 발걸음도, 옆얼굴로 보이는 환한 웃음도 전부 그의 시야에 담겼다.

“봄.”

그녀의 입술이 흘려보낸 말을 조용히 따라 읊조려 보는 아델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번졌다.

좋아하는 계절을 꼭 닮은 분이었다. 그 찬란한 날과 어울리는 분이었고.

아델은 다음 해의 봄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분의 옆에 있을 자신의 모습도 떠올려보았다.

그래. 이대로라면 나쁘지 않은 날들이었다.

더한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이 나쁘지 않은 세상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분의 곁에서 그분을 지키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을 입 밖에 내지 말아야지. 황후 폐하를 위해. 아니 나를 위해.

다짐하며 돌아서는 아델의 손등 위로 잘 마른 나뭇잎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지에 매달린 붉은 나뭇잎이 작은 바람에도 위태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비쳐 보이는 하늘이 지나치게 맑고 아름다웠다.

작게 숨을 내쉰 그는 이만 시선을 바로하고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더 이상 웃지 않는 얼굴 위로 무르익은 가을빛이 어른거렸다.

* * *

하드엘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황제궁 뒤편에 있는 정원이었다. 루이 왕자와 함께 놀던 그곳.

처음에는 나도 헷갈릴 뻔했다. 인적이 드물었던 그때의 정원이 아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하드엘을 바라봤다.

“폐하! 이걸 다 준비하신 거예요?”

“마음에 드시오?”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자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에 햇빛을 온전히 머금은 그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정말 다른 곳 같아요.”

난 정성스레 꾸며진 정원을 느리게 훑었다.

정원 한편에 가득 심어진 새하얀 국화꽃들, 다듬어진 낮은 수목들, 그 한가운데 놓인 다과가 차려진 테이블까지. 흩날리는 낙엽과 어우러진 작은 정원은 봄날 에스타란토의 화원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원래 잘 정돈되어 있던 곳이기는 했지만 누군가의 애정 어린 손길이 닿은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절 위해 이렇게 꾸며 놓으신 건가요?”

“당신을 위한 게 아니라면 누굴 위한 것일까?”

소리 없이 웃은 하드엘이 손을 당겨 날 새하얀 테이블로 이끌었다.

날 의자에 앉히고서 그는 마주 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떨떨하고 벅찬 기분에 사로잡힌 채 나는 그와 눈을 마주 보며 앞에 놓인 찻잔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저 지금 많이 감동받은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턱을 괴고 있던 그가 여유롭게 뜬 눈으로 빤히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야 당신이 웃었으면 좋겠으니까.”

그의 대답을 듣고 나선 작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좋았다.

“그런 거라면 성공하셨네요.”

나는 찻잔을 감싸 쥐었다. 식은 찻물이 담긴 찻잔은 차갑기만 했다.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앞에 있는 이 남자가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진한 꽃향기가 입안에 맴돌았다. 그 향기를 음미할 새도 없이 하드엘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무얼 했소?”

“내일이 재판이니 방금 전 공녀를 만나고…… .”

“아니. 공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아침 일어나 당신이 무얼 하면서 보냈는지. 난 그게 궁금해.”

“오늘 아침 이야기요?”

“그래. 플로리아 당신 이야기.”

내 이야기라. 오늘 내가 무엇을 했더라? 난 곰곰이 오전의 일을 되새겨 보았다.

“아! 창문을 열었다가 루안에게 잔소리를 들었어요.”

“잔소리?”

“네. 바람을 쐬면 감기에 걸린다고 걱정을 해서 어쩔 수 없이 금방 문을 닫아야 했죠.”

“그건 그 애의 말이 맞아. 바람이 차니 문을 오래 열어두지 마시오.”

“네. 이제 몰래 열어둬야겠네요. 폐하와 루안의 눈을 피해서 말이죠.”

“플로리아.”

그가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다그치듯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기에 난 금세 눈을 젖혔다.

“장난이에요.”

가늘게 미소 지은 하드엘은 회색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다시 질문했다.

“또?”

“또요? 음… 서랠 왕국의 사신이 보내준 도자기 화병에 폐하께서 주신 꽃을 새로 꽂아 넣었어요. 꽃잎 색이 붉어 화병과 아주 잘 어울리던데요?”

나는 눈을 굴리며 아침에 있던 일들을 떠올렸고 그의 앞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레이샤를 만나러 갔다가 온 일이 전부라 생각했는데 아침 사이 내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웠다.

내가 웃을 때면 따라서 입매를 휘는 그를 지켜보는 일도 즐거웠다.

그러다 문득 하드엘의 어깨너머에 있는 그네가 눈에 띄었다.

두꺼운 나뭇가지에 묶여 있는 그네 아래 낙엽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지난봄, 저 그네에 앉아 신나게 놀던 루이 왕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참 많이 흘렀네요.”

하드엘은 내 시선을 따라 몸을 돌렸다. 그네를 발견한 그도 나와 같은 날을 떠올린 건지 은근히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고개를 바로 해 나를 보았다.

“왕자의 그네를 밀어주던 폐하의 모습 참 보기 좋았는데요.”

“조그마한 게 어찌나 무겁던지.”

“왕자가 무거우셨어요? 저는 무겁지 않다고 하셨잖아요.”

“그거야 당신이니까.”

“뭐예요 그게.”

나는 장난스럽게 콧잔등을 찌푸렸다.

선선해진 바람결에 나뭇가지가 흔들리자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선명해졌다. 덩달아 매달린 그네가 작게 흔들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며 가을바람이 훑고 간 정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젠가 하드엘과 나의 아이가 이 정원에서 뛰어놀 날이 올까?

마주 보고 웃고 지금처럼 아무랄 것 없는 이야기를 떠들 수 있는 일상. 그 평온 속에서 우리를 닮은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그런 행복이 내게도 올까?

불현듯 찾아든 생각이었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이뤄질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난 그를 보고 웃을 수 있었다.

“폐하. 나중에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 그 아이가 탈 그네도 밀어주세요.”

찻잔을 들어 올리던 하드엘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우리 아이?”

“네. 우리 아이요. 참, 폐하께서는 아이가 몇 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나를 담은 두 눈이 고요했다.

“폐하?” 하고 부르자 그가 낮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조용한 풍경을 뒤흔드는 웃음소리는 오전의 햇살만큼이나 투명했다.

“왜 웃으세요?”

“그냥. 기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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