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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30)화 (13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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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날씨가 참 좋았다. 선선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춥지는 않은 그런 날이 연이어 계속되고 있었다.

창가에 기대 서 있던 나는 다채로운 빛으로 물든 산책길의 나무들을 바라보다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제는 당연하게 시원스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뺨을 부드럽게 쓸고 지나간 바람은 얼마 전보다도 더 찬 기운을 품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면 맑고 냉한 공기가 몸 안 깊숙이 들어와 퍼졌다.

새삼스럽지 않게 가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다가 정말 감기 드시겠어요.”

뒤에서 나를 지켜보던 루안이 걱정스레 말을 건네 왔다.

아벨리움의 가을은 봄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처럼 무척이나 짧다. 그게 아쉬워 요즘은 창문을 자주 열어 놓는데, 그 탓에 루안에게서 저런 종류의 근심 어린 말을 많이 듣곤 한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천천히 뒤를 돌았고 그녀를 보며 입매를 휘었다. 그리고 루안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폐하랑 똑같은 말을 하네요. 그런데 루안, 아무래도 난 감기 들 일은 없겠어요. 이렇게 열렬히 날 걱정해 주는 이들이 많으니까.”

“에이, 설마요.”

“정말.”

루안은 배시시 웃고 말았다. 하지만 다른 날과는 달리 그 웃음이 오래가진 못했다.

그녀의 입꼬리는 얼마 안 가 축 처졌다. 그 이유를 알고 있던 난 가만히 루안을 쳐다보기만 했다.

“폐하.”

“말해요, 루안.”

“오늘 공녀를 만나러 꼭 다녀오셔야 하나요?”

에둘러 말하는 법 없이 루안은 예상한 말을 뱉었다.

“알죠, 루안? 난 말려도 갈 거예요.”

“네. 분명 그러실 테지만…….”

시무룩하게 말끝을 흐리는 루안은 누가 보아도 나를 만류하고 싶은 눈치였다. 감정이 고스란히 표정으로 드러나는 루안이었기에 그녀의 심리를 살피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거기에 가시면 틀림없이 안 좋은 소리를 들으실 테니까요.”

“상관없어요. 알고 가는 거니까. 내일이 첫 재판일인데 시시한 악담이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요. 그리고 나는 그런 공녀의 모습이 보고 싶어요.”

처절하게 망가지고 무너진 모습. 내가 바라왔던 레이샤의 모습을 이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러려고 가는 거니까.

“폐하께서 염려가 크십니다.”

“그럼에도 저를 믿어 주셨죠. 루안도 나를 믿어줘요.”

루안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꾸만 문을 힐끔거렸다. 영문 모를 행동이었지만 곧바로 그 이유가 밝혀졌다.

“폐하, 아델 경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마샤티아 백작 부인의 한 마디에 루안의 얼굴에 단숨에 화색이 돌았다.

다소 우울한 빛을 머금고 있던 눈이 창밖에 내리쬐는 가을 햇살보다 반짝거렸다.

“아델 경? 아델 경이라면 오늘 신전 근무일 텐데?”

혼자 의문을 섞어 중얼거리자 루안이 밝게 답했다.

“제가 아델 경께 호위를 부탁드렸습니다!”

“호위? 언제요?”

“오늘 새벽 눈을 뜨자마자 부리나케 신전에 다녀왔어요. 너무 걱정이 되어서… 헤헤.”

“황후궁 근무인 다른 신전 기사들도 있는데 왜 아델 경에게 갔어요? 신전 근무라 바쁠 텐데.”

“폐하께서 제일 믿으시는 분이시잖아요. 게다가 아델 경께서도 곧바로 알겠다고 하셨는걸요?”

“그래요?”

기사를 대동하지 않으려 했지만 아델이 함께 가준다면야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서서히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고 그 앞에 선 아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허리를 숙여 내게 인사를 건넨 후 이쪽으로 걸어왔다.

“아델 경, 루안의 부탁에 응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신전 기사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루안도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아델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루안은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안이 신경 쓰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언제 출발하실 생각이신가요?”

마주 보고 선 아델이 물었다.

원래 루안을 안심시키고 오후에나 갈 생각이었지만 아델까지 왔으니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는 걸치고 있던 숄을 벗어 의자 위에 걸쳐두며 답했다.

“지금 출발하죠.”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나는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감옥에 들어서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소 어두워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지상 감옥 안에서 복도를 여유롭게 거니는 내 발소리만이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아델도 묵묵히 곁을 지키니 주위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그래서인지 레이샤와 가까워질수록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천천히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금빛 테가 둘러진 구두굽이 반짝였다.

나는 텅 빈 독방을 수차례 지나쳐 복도의 가장 끝에 다다랐다.

레이샤. 그녀가 있는 곳이었다.

쇠창살 너머 독방의 구석에서 레이샤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투박한 회색 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칸제로스 가의 그 뻔뻔한 기개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두 눈은 곧게 내리감은 채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평소 같진 않았다. 식사를 거르지는 않는다고 들었지만 얼굴이 조금은 야위어 있었다. 또한 바깥보다 쌀쌀한 옥 안에서 입고 있는 상아색 드레스는 계절감이 맞지 않아 보였다.

구겨지고 거뭇해진 드레스는 보기에도 한없이 볼품없었다. 와인과 수프로 인해 남겨진 얼룩도 그대로였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아델을 세워두고 나는 쇠창살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럼에도 레이샤는 미동이 없었다.

-팅.

손가락을 튕겨 쇠창살을 두드리자 특유의 쇳소리가 가늘게 울려 퍼졌다.

“묻지 마세요.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

“오랜만이에요, 공녀.”

내 목소리가 들리자 엉뚱한 말을 하던 그녀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초연하던 태도는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나를 빤히 보던 그녀는 노기를 가득 품은 채 서서히 일어서 창살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낯으로 여길 와? 네가?”

물러나 있던 아델이 당장이라도 달려올 듯 굴어 나는 손을 아래로 내려 그를 막았다.

그리고 잠시 아델과 시선을 맞추며 괜찮다는 뜻을 전해 보이고 평온한 표정으로 레이샤를 마주 봤다.

“무슨 낯이라니. 아직도 반성하지 않은 모양이네. 이래서야 원, 형량이 줄기는 힘들겠어.”

레이샤가 허탈하게 웃었다. 힘이 빠진 웃음소리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고 이내 그녀는 인상을 확 구겼다.

다소 핼쑥해졌어도 날 경멸하는 눈빛만큼은 여전했다.

그런 그녀를 마주하자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녀를 지하 감옥에 가둬둘 수 없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아쉬워졌다.

그곳에 있었다면 지금 같은 태도는 보일 수 없었을 텐데.

“그 말투 표정 전부 역겨워. 어떻게 내게 그런 추잡한 누명을 씌우고 보란 듯 뻔뻔하게 살지? 두고 봐. 내가 나가면…….”

“나가? 무슨 수로?”

고개를 갸웃하며 짧게 비소하자 레이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믿는 구석이 하나이니 앞으로 할 말이야 뻔했지만 동정하는 마음으로 잠자코 그녀를 지켜만 보았다.

“배움이 짧으니 역시나 주변을 보는 눈이 어둡구나. 미련한 것. 칸제로스가를 따르는 귀족들이 수십이야. 그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가만히 있지 않겠지.”

“그래.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서 나가면 넌 끝이야.”

“무서워라. 그런데 공녀. 그 귀족들이 공작가를 끝까지 따를 거라 어떻게 확신하지?”

“뭐?”

“잘 들어. 죽는 날을 받아 네가 여기서 피를 쏟으며 바닥을 기지 않는 이상 넌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아니, 절대 아니야!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든 날 꺼낼 거야. 기다려. 내가 여기서 나가는 날 사람들 앞에 서서 네 실체를 낱낱이 까발릴 거야!”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 네 말대로 여기서 나갈 수 있다면 말이야.”

“헛소리 집어치워.”

“지금 내가 하는 말이 헛소리 같아?”

“나가!”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레이샤가 낮게 소리쳤다.

그럼에도 내가 물러나지 않자 그녀는 분을 이기지 못해 신고 있던 구두를 집어던졌다.

-탕!

창살에 부딪혀 튕겨나간 구두가 레이샤의 발밑에 떨어졌다.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리치며 제 구두를 마구 짓밟았다.

내 기대에 부응해 주는 그녀의 모습을 한동안 난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아깐 정말이지 실망할 뻔했어.

“나가! 당장 나가라고!”

바짝 다가와 쇠창살 틈으로 불쑥 손을 내민 그녀가 나를 밀치려 들었다.

가뿐히 이를 피하며 도리어 난 그녀의 머리를 휘감아 잡았다. 손에 한 움큼 쥔 검은 머리칼을 확 당기자 레이샤의 머리가 쇠창살에 맞부딪쳤다.

떨리는 입가와 그에 반해 단 한 번의 깜빡임도 없는 눈에서 치욕감과 수치심이 배어났다.

“놔!”

아직 승리감을 느끼긴 이르다. 마음 깊이 쌓아 둔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삭이며 난 순순히 손바닥을 펼쳤다.

며칠간 빗지 못해 엉킨 머리칼이 뻑뻑하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레이샤는 한동안 넋이 나간 듯 보였지만 곧 울분에 찬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눈빛으로 전해져오는 나에 대한 원망도 미움도 난 기쁘게 받아주었다. 레이샤 너의 절망과 시련이 자란 곳에 나의 행복이 있었으니까.

나는 미소를 머금고 눈물이 아롱거리는 그녀의 연갈색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끝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레이샤.”

* * *

아델은 돌아가는 길 내내 내 표정을 살폈다.

마차 안에서도, 마차에서 내려서도 자꾸 힐끗거리기에 아예 고개를 돌리면 그는 다급히 내 눈을 피했다.

연달아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고 나는 황후궁으로 향하는 산책로를 지나며 그 이유를 질문했다.

“왜 그래요, 아델 경?”

“네?”

“자꾸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아서.”

가만히 날 지켜보며 아델은 계속해 걸어 나갔다.

나는 한 걸음 물러나 걷던 그의 옆에 서며 빤히 눈을 마주 보는 것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그냥요. 기뻐 보이시는데 마냥 표정이 좋지는 않아 보이셔서. 그래서요.”

길에 떨어진 마른 나뭇잎이 파사삭 밟히는 소리 사이로 아델의 나직한 음성이 번졌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는 데도 여전히 마음 한편에서는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걸 아델이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었어요?”

나는 더욱 활짝 웃으며 그를 보았다.

“별거 아닌데. 그냥 내일이 재판이라 조금 심란했을 뿐이에요.”

“걱정 마세요. 잘 되실 겁니다. 그게 뭐든.”

“그래요. 잘 되겠죠, 뭐든.”

아델은 잔잔한 미소를 품은 눈을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요하고 편안한 공기의 흐름을 타고 산뜻한 바람이 불었다. 가지에서 떨어진 새붉은 나뭇잎 한 장이 마침 느릿하게 눈앞에서 나부꼈다.

“전 가을이 좋습니다.”

아늑한 정적 속에서 아델이 대뜸 힘을 실어 말을 전했다.

그는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불긋한 잎을 살피고 있었다.

“가을이요?”

“네. 하지만 특히 이번 해의 가을은 잊지 못할 거예요.”

이번 해의 가을이 지난해의 가을보다 아름다웠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바로 작년의 가을이라지만 내겐 아주 오래전 겪은 시절인 것처럼 흐릿했다.

그러나 아델의 말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하드엘과 함께하는 가을은 분명 내가 겪은 여느 가을보다 아름다웠다. 나는 그걸 확신했다.

“폐하께서는 어떤 계절을 좋아하십니까?”

“봄이요. 난 봄을 좋아해요.”

망설임 없이 그 계절을 말하고 나자 입가엔 환한 웃음이 번졌다.

하드엘과 처음 만난 날을 회상하면 늘 그랬다.

따스한 햇살과, 그와 나의 주변을 감싸던 보드라운 바람, 눈처럼 나부꼈던 꽃잎.

드넓게 펼쳐진 화원에서 하얀 물결처럼 일렁이는 에스트라의 꽃을 보며 나눴던 이야기.

그리고 함께 맞은 봄비.

내게 그날보다 생생한 날은 없었다.

그래서 봄이 좋았다. 그와 함께한 봄이라서.

“빨리 다시 봄이 왔으면 좋겠네요.”

“황후.”

갑작스럽게 하드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시선을 들어 멀리를 살피자 거짓말처럼 산책길 끝에 그가 서 있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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