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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29)화 (129/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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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끅끅거리는 웃음소리를 비집고 잘못 들었나 싶을 만큼 건방진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라고…….”

그때,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릎을 펴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자연스레 바라보았다.

“아델 경.”

“마부와 실랑이를 벌이느라… 죄송합니다. 궁으로 돌아가려 하신단 얘기를 듣고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이야기는 잘 마치셨습니까?”

“잘 마친 셈이죠. 생각한 대로 될 듯해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폐하, 혼자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혼자라니요?”

“네?”

아델과 나, 그리고 옆에 있던 릭스까지 서로를 마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소리예요. 여기 아이가 있잖아요. 이 애를 여기서 내보내려고…….”

손으로 아이가 있던 자리를 가리켰지만 그들은 당황해했다.

한발 늦게 손끝이 텅 빈 허공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디로 간 거지? 그 잠깐 사이에 어떻게…….

“이 자리에 아이가 있었단 말씀이신가요?”

“있었어요. 방금까지도 대화를 나눴고요. 릭스 경, 그대도 아까 봐서 누구인지 알죠?”

“저도 아델 경께 가기 전 보긴 했습니다, 그 갈색 머리 꼬마. 폐하께서 내보내신다고 하셔서 저는 아델 경을 부르러 간 것이었어요.”

다행히 내가 환각을 본 것은 아닌 모양이다.

“방금은? 방금은 못 봤어요?”

“네. 그런데 어쩌면 폐하께 가려져 안 보였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폐하께서 저희를 등지고 계셨으니까요.”

그럼 정말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그렇게 소리도 없이 사라진 거라고?

잠깐 대화를 나누느라 한눈을 팔았어도 세 명 다 그 애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지 못한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사람이 몰려오니 내가 아델을 보는 동안 길 너머 숲으로 몸을 숨긴 건가?’

그래, 차라리 그편이 믿겼다.

“요즘 애들은 달리기가 엄청나게 빠른가 봐요.”

나무가 빼곡하게 늘어선 작은 숲을 흘긋 보며 나는 릭스의 추측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웠지만 어쨌거나 제 발로 사라진 아이이다. 그 이상의 관심은 거두는 편이 나을 테지.

아이의 얼굴에 난 상처를 매만지던 손을 내려 보자 나와 몇 발자국 간격을 두고 있던 아델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폐하.”

거리가 좁혀진 만큼 아델의 부름은 아주 선명히 귓가에 내리꽂혔다.

덕분에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는 유한 목소리에 근심이 배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그와 마주 보았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그냥 조금 놀랐어요. 그뿐이에요. 이만 가요, 우리.”

* * *

“아침에 연락을 받고 놀랐네. 자네들이 약속 시간을 다 바꾸다니.”

「공녀가 옥에 갇힌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지금은 완전 넋이 나간 채 강제로 칩거 중이다.」

거리에 떠도는 무성한 소문과 달리 귀족들 앞에 선 공작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선한 눈매도 여전했으며 잘난 얼굴까지 그대로였다.

지나친 충격을 이기지 못해 그의 일상이 망가졌다는데 지금의 공작에게서 그런 기색은 찾기 힘들었다.

오히려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낸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갑자기 마차 바퀴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저는 오는 길이 험해 예상보다 도착이 늦어져서요.”

“이런.”

탄식하는 목소리마저 단정하기 그지없었다.

이토록 완벽한 귀족이 무너질까? 공작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한 귀족은 문득 그런 의문을 품었다.

베르시트 남작과 함께 도박장 사건을 조작하려 들고 공녀의 죄를 묵과해 온 것은 중죄이다.

전자의 일만 있었다면 변명할 여지가 있었을 테지만 이젠 차라리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편이 나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공작의 죄를 밝혀줄 증인은 죄다 옥에 있다.

그러니 황후 폐하의 계획대로 공작가는 무너질 테고 이로 인해 공작을 따랐던 자신들에겐 괜한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그것을 피하려면 황후 폐하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공작을 속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공작을 마주하고 뻔뻔히 거짓을 뱉고 나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공작은 그토록 사랑하는 딸이 감옥에 갇혔는데도 흐트러지기는커녕 전보다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줄 정도로 침착하고 상냥했다.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그들이 알던 칸제로스 공작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지금마저도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무자비하게 궁지에 몰려도 그 끝이 죽음이 아닌 이상 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필요하다면 그동안 꾸며온 올바르고 진실한 칸제로스의 이미지를 버리고서라도.

하지만 걱정이 되어도 어쩌겠는가. 당장은 빌어야지. 그들은 폐하의 계획이 성공하길 누구보다 간절히 빌어야 했다.

“송구합니다, 공작님, 몇 명이 저러니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늦췄습니다.”

결론만 놓고 보자면 존경해왔던 칸제로스 공작은 이제 없고, 우러러봤던 공작가는 망하기 직전이다.

아무리 공작이 전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지금 닥친 상황이 그러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불명예스러운 낙인이 찍힐 가문을 편드는 것보다 신전의 주인이 될 에스타란토를 존경하는 것이 맞았다.

에스타란토의 힘이 깨어난 후 도래할 새 시대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서도 그것이 합당한 결정이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 전부는 황후의 편에 서 공작이 돌아오지 못할 나락으로 떨어지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뭘 이런 일로 사과까지. 되었네.”

공작은 점잖게 웃어 보였다. 서로의 눈치를 보던 귀족들은 그런 공작을 보고 조용히 숨을 죽였다.

차라리 어서 그의 입에서 먼저 공녀의 이야기가 나와 주길 바랐다.

“내가 오늘 자네들을 부른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황실에 억울하게 빼앗긴 영지를 되찾기 위해서였네. 그런데 한 가지 이유가 더해졌지. 레이샤, 아무래도 그 애가 당치도 않은 누명을 쓴 듯해서 말이야.”

“아.”

기다렸던 한 마디에 귀족들은 기계적으로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영애의 일에 마음이 많이 상하셨겠습니다.”

“저희도 믿기지 않는 일이라서 무척 놀랐는데 공작님께서는 얼마나 상심이 크셨을지.”

“레이샤, 그 애의 성정을 알지 않는가. 그런 무서운 짓을 꾸밀 아이가 못 돼.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아이가 독약을 사서 사람을 죽이려 했다니 뭔가 대단한 착각 혹은 뭇사람들의 말처럼 모함인 것이지.”

“공녀님의 성품이야 제국에서 어느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자네들이 이번에 나를 위해 힘을 모아줬으면 하네. 바람만 불어도 감기가 드는 아이인데 아비가 되어 옥에 갇힌 채 재판을 받게 둘 순 없지 않겠나. 재판은 성실히 받을 것이고 진실은 훗날에 드러날 테니 나를 돕는다고 해서 자네들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걸세.”

“피해라니요. 저희는 당연히 공작님의 뜻을 따라야지요.”

“맞습니다. 그런 섭섭한 말씀은 마세요.”

“고맙네.”

공작의 눈가가 휘어졌다. 제 딸과 똑 닮은 미소였다.

마른침을 삼키는 귀족 몇의 목울대가 크게 꿈틀거렸다.

공작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미넬 백작은 건조한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공작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이제 저희가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첫 번째 재판이 열리는 날, 자네들이 딸아이의 불구속 재판을 주장해 주면 되네. 베르토반 영지에 대해서는 그 후 항의서를 모으는 것으로 하지.”

귀족들과의 대화는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들이 보낸 침묵은 대부분의 동의였다. 여러모로 말이 잘 통하는 자들이었다.

푸르렀던 하늘이 어느덧 거무스름한 보랏빛으로 곱게 물들어 있었다.

어스레한 어둠이 번져가는 풍경을 훑으며 공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코트 자락이 가볍게 흩날렸다.

언제나처럼 오는 가을일 뿐인데, 오랜만에 외출이라서 그런지 유독 주위를 둘러싼 공기가 스산하게 느껴졌다.

그는 오싹한 기분을 떨쳐내려 가을을 살피던 눈을 거두고 정면을 응시했다.

이야기도 잘 마치고 나왔는데 왜 이리 기분은 더러운지.

쉬지 않고 걸은 공작은 금세 마차 앞에 다다랐다.

공작을 발견한 마부는 느슨히 턱을 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바짝 세웠다.

말고삐를 쥐자 풀을 뜯던 말들도 스르르 고개를 들었다.

“공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작이 마차에 오르기 전 집사가 갑작스럽게 그의 앞에 다가와 섰다. 연신 주위를 살피는 게 심상치 않았다.

공작은 높낮이 없이 일관된 어조로 집사를 향해 물었다.

“왜 그런가?”

“그게……. 마르누스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낯설지 않은 이름에 공작의 눈에 순간 날카로운 섬광이 지나갔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마르누스라면 흑마법사 하나뿐이었다.

공작은 곧바로 집사에게 바짝 다가섰다.

“어디 있다지?”

“지금 제국의 수도에 있다고 합니다.”

“뭐? 수도?”

“네.”

소리 죽여 속삭이는 대화소리가 뚝 끊겼다.

최대한 만나지 않길 바라지만 어쨌든 아벨리움의 수도에 있다니, 혹시 모를 상황을 생각한다면 여러모로 잘된 일이었다.

“그래, 수고했네.”

꾸벅 고개를 숙인 집사가 옆으로 비켜나자 공작은 마차에 오르기 위해 다시 발을 내디뎠다.

그런 공작의 시야 앞에 대뜸 마른 나뭇잎 한 장이 떨어졌다.

바싹 마른 갈색 잎은 천천히 공중에서 추락해 공작의 발등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직 가을의 초입이었다. 그러니 잎이 떨어질 때는 아니었다.

공작은 잠시 의아하게 발등 위 나뭇잎을 바라봤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그것을 지려 밟고 마차에 올랐다.

잘 마른 나뭇잎은 그의 발아래서 버석하고 바스러지고 또다시 선들거리며 불어오는 초저녁의 가을바람에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마차가 멀어질수록 말발굽 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공작이 떠난 자리에선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이의 것이었다가 어느 순간 다 큰 성인 남자의 것이 된 웃음소리는 꽤 오래도록 허공에 남아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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