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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28)화 (128/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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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아델 경.”

함께 이 마음을 공유하고픈 마음에 릭스는 줄곧 조용히 있던 아델을 불렀다.

“오늘 황후 폐하 정말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곧고 강한 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더… 저, 아델 경?”

“어…어. 미안, 뭐라고?”

아델은 뒤늦게 대답하면서도 릭스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안절부절못하며 건물 안쪽을 힐끔거렸다.

그곳에 두고 온 소중한 무언가라도 있는 듯 불안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발견하기 전부터 내내 저런 상태였는지도.

“아닙니다. 그냥 황후 폐하께서는 참 멋진 분이신 것 같다는, 그런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뭐?”

그제야 그가 고개를 돌려 릭스를 내려 봤다. 피식 입가에 지어 보인 웃음은 단숨에 만면에 번졌다.

“그야 당연한 걸 뭘. 릭스, 넌 그걸 이제야 알았냐?”

“?”

릭스는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아델의 표정을 보고 오늘 낮 황후궁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지. 분명 평소에도 잘 웃고, 능글맞은 분인데.’

가끔 이렇게 묘한 행동을 보였다.

한껏 올라간 그의 입매 끝에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것과 같은 수줍음이 묻어났다.

그에 릭스의 눈초리가 저절로 가늘어졌다.

“뭘 그렇게 봐?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빤한 시선에 눈썹을 치켜올린 아델이 제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저기, 아델 경.”

“왜?”

황후 폐하의 앞에서, 혹은 황후 폐하의 이야기만 나와도 저런 모습이라니.

‘설마 나도 저런 표정인가?’

아니. 아니었다. 다른 신전 기사들만 봐도 그렇지 않았다. 어쩐지 이건 다른 감정이 담긴…….

릭스는 더 이상의 생각을 이어 가지 못하고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자신이 어떤 상상을 했는지 감히 입 밖에 낼 수조차 없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지.

“불러놓고 답도 없더니 이젠 새로 만든 춤이라도 추는 거냐? 뭔데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싱겁긴.”

가을 햇살 같은 미소의 여운이 남은 얼굴은 부드러웠다.

입을 굳게 닫아 버린 릭스를 보던 아델은 굳이 말하고자 했던 게 무엇인지 캐묻지 않고 다시 건물 안을 살피려 아예 몸을 틀었다.

“어, 저기 사람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닫혀 있을 것 같던 입에서 별안간 다급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아델은 빠르게 릭스의 시선을 따라갔다. 마차 한 대가 한적한 길을 달려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칸제로스 공작일까요?”

아델이 미간을 찡그려가며 집중해 마차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거리가 있어 마차에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지는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여기 있어. 내가 확인하고 올 테니까.”

아델은 릭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폐하께는 네가 가서 미리 말씀드려. 확실하지 않지만 공작가의 마차일 수도 있다고.”

“네.”

아델이 빠르게 멀어지는 사이 릭스는 아델의 명을 따르기 위해 낮은 계단을 밟고 올라 건물 안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서서는 굳이 더 나아갈 필요가 없었다. 정갈하고 우아한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황후 폐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릭스 경, 거기서 뭐해요? 아델 경은요?”

* * *

귀족들과의 이야기는 모두 잘 마쳤다.

그들은 대체로 말이 없었지만 공작의 실체를 낱낱이 밝히는 내 얘기를 듣고 경악하는 표정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그런 표정들이 사그라지기 전에 나는 공작이 왔을 때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충격이 컸는지, 이후 대화를 하는 내내 그저 작게 고개만 끄덕이거나 그런 행동마저 없이 멍해 있는 이들이 다수였다.

그러나 아마 그들은 말귀를 아주 잘 알아들었고, 이제부터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도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멸문할 공작 가를 돕는 대신 지금이라도 나를 돕는 것이 자신들에게 득이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더군다나 공작이 재판에까지 가면 그를 존경해왔단 이유만으로 오명을 쓸 텐데 그들은 그게 죽기보다 싫어서라도 나를 도우려 할 것이다.

진심으로 공작을 존경해왔던 이들은 그에게 배신감을 느껴서라도 그럴 것이고.

하지만 결국 대다수는 자신들이 되고 싶은 청렴하고 올곧은 공작의 모습을, 실은 그로 비롯된 공작 가의 위상을 선망해온 것이었지 칸제로스 공작 그 자체를 신처럼 받든 것은 아니었다.

과거 저들이 사실 관계를 따지지 않고 나를 매도하며 선으로 무장한 레이샤를 황후로 추앙하는 집단을 꾸린 것도 그 일환이었다.

자신의 신념에 비춰보았을 때 그것이 옳은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마땅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랬을 확률이 컸다.

‘뭐 원래 귀족들 대부분이 그렇지.’

공작을 열렬히 사모해 왔던 것이든 칸제로스가의 고귀한 위상을 간절히 닮고자 했던 것이든 내겐 상관은 없다만.

어쨌든 내게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결말에 다다르고 있다는 사실, 그 하나였다.

앞으로 펼쳐질 앞날에 나름은 흡족한 얼굴로 천천히 복도를 걸어가는데 릭스가 보였다. 옆에는 아무도 없이 혼자였다.

아델과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델은 어디 갔지?

“릭스 경, 거기서 뭐 해요? 아델 경은요?”

나를 발견한 릭스가 잰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폐하. 방금 전 한 마차가 이 길 초입으로 들어섰습니다. 공작가의 마차일지도 모릅니다.”

침착하게 말을 꺼냈지만 조급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공작가의 마차요?”

“네. 하지만 확실치 않습니다. 지금 아델 경께서 확인하러 가셨어요.”

공작이 눈치라도 챈 건가?

그럴 리가.

마샤티아 백작 부인으로부터 별다른 기별이 오지 않았는데.

이상한 낌새가 있었다면 감시자들이 움직였을 것이고 부인이 내게 바로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나는 불필요한 말을 덧붙이는 대신 바로 나가 밖을 살폈다.

릭스의 염려는 다행히도 헛된 것이었다.

드문드문 불긋하게 물이 든 나무 아래에서 마부와 마주 보고 서 있는 아델을 보고 나서 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길을 지날 수 없다. 돌아서 가라. 그런 말을 하고 있기라도 한 건지 그는 마부를 향해 휘휘 손을 내저었다.

지금까지도 대치하는 걸 보면 마부는 이 길을 고집하고 있고 아델은 그런 그를 설득하는 중일 것이다. 사실 마부가 아니라 저 마차에 탄 귀족의 고집이겠지만.

공작가의 마차라는 걸 알았다면 아델이 마부와 나란히 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리가 없었다.

마차에 새긴 공작가의 표식을 보자마자 내게 돌아와 알렸을 테니까.

“공작이 아니에요.”

“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뻗어 아델을 가리켰다. 휙 시선을 돌린 릭스는 상황을 파악하고서야 크게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다행입니다. 어? 어?!”

그러나 안도의 끝은 놀라움이었다. 내 쪽으로 몸을 돌리던 릭스가 돌연 눈가를 확 찌푸리며 내 등 뒤를 응시했다.

“저 애는 도대체 언제 온 거지?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애라니? 나는 릭스의 혼잣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 작은 숲과의 경계를 가르듯 땅 아래 길게 드리워진 짙은 나무 그늘 밑에 조그마한 사람 한 명이 서 있었다.

그의 말처럼 분명 어린아이였다. 고작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빛이 그 아이의 얼굴 위에서 일렁였다.

그러자 옆얼굴의 선이 또렷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감고 있던 눈을 느리게 뜨자 아이의 머리색과 꼭 닮은 흑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팔짱까지 낀 채 두꺼운 나무줄기에 등을 기대고 꽤 거만히 서 있던 아이는 제 것이 아닌듯한 여유로움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공작이 올 때까지 저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곤란한데.”

“제가 내보내고 오겠습니다.”

“아니요. 내가 잘 이야기를 해 보낼게요. 그대는 아델 경에게 가서 이만 돌아가자는 말을 전해줘요.”

“네!”

릭스가 멀어지자 아이가 이쪽을 바라봤다.

릭스와 나 사이의 대화가 들렸던 걸까? 그가 떠나자마자 나를 보는 걸 보면 내가 자신에게 다가갈 것을 아는 눈치였다.

얼굴의 반을 덮은 검은색 가면 탓에 내가 볼 수 있는 건 아이의 얼굴 반쪽이 전부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무표정하게 날 바라보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주변에 하드엘이 보낸 기사들도 있었을 텐데 저렇게 대놓고 있었어도 아무도 눈치를 못 챘단 말이야? 어린아이여서 경계가 느슨했나?

“얘야.”

놀라지 않게 친절히 부르며 다가갔지만 이런 내 노력이 무안하게 아이는 동요조차 하지 않았다.

초연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할 뿐이었다. 어린아이의 천진함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까워지고 나니 설명하기 힘든 묘한 괴리감은 더욱 분명해졌다.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노는 게 어떨까?”

아이의 코앞까지 다가선 나는 우선 그런 감정들은 뒤로하고 시선을 낮추며 물었다.

가만히 날 주시하는 오른쪽 눈이 곧 가늘게 휘어졌다.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조소였다.

“놀아요? 내가?”

비딱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마치 날 비꼬는 듯했다.

대개는 아이가 이러면 밉기보다 귀여울 텐데 어쩐지 상당한 불쾌감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고작 아이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우스워 나는 다시 꿋꿋이 말을 이어 갔다.

“오면서 보니 공원이 있던데. 그곳에 데려다줄까? 여기보다 훨씬 좋아.”

내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짙은 갈색 눈동자는 황량하고 적막한 어느 계절을 닮아 있었다.

차라리 몇백 년을 살아온 선신 같다고 말하는 게 이 아이에겐 더 어울릴지도.

“놀러 온 게 아니라 사람을 찾아왔고 그쪽은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고. 그러니 이만 가 주시겠어요?”

“그쪽……. 그래, 누구를 찾아왔니?”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은데.”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는데 길을 잘못 들었나? 그나저나 말버릇이 참 공손하기도 하지.

“이곳에 네가 찾는 사람은 안 올 거야.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 어디로 가려 했는지 말해볼래? 데려다줄게.”

“가달라니까.”

낮게 읊조린 말에도 내가 비켜서지 않자 짧게 코웃음을 치며 아이가 손을 올렸다.

그 애는 곧 제 얼굴의 반쪽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철 가면을 벗었다.

온전히 드러난 아이의 얼굴을 보고 나는 숨을 들이켰다.

슬쩍 올라간 입매 끝에서 눈 밑에까지 이어진 커다란 상처가 보였다.

칼로 베인 듯한 상처는 아주 오래된 듯 흉이 졌는데 그 주위가 깊숙이 곪아 있었다.

피고름을 보니 손가락 끝이 저릿해져 나도 모르게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시선을 내린 아이는 꽉 쥔 주먹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나무에 기댄 몸을 바로 세우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게 그냥 갔으면 이런 더러운 꼴을 안 봐도 됐잖아요.”

아이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다. 내가 겁을 먹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 애는 너무도 당연하게 내가 도망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세상과 동떨어진 듯 굴었던 저 태도와 눈빛이 이해가 되었다. 불손했던 말투도.

다들 저 상처를 보고 도망갔었구나.

누군가를 겁주는 데 이용할 만큼 제 상처에 사람들이 질겁했던 거지. 그러니 내가 가까이 다가오는 게 싫었던 거야.

전혀 몰랐다. 상처 때문에 저리 날카롭게 구는 것일 줄은 정말 꿈에도…….

진작 눈치챘더라면 조금 더 배려하며 다가설 수 있었을 텐데.

“?”

내가 물러나지 않고 가만히 자신을 지켜보자 아이는 그제야 인상을 구겼다.

“아팠겠다.”

오늘 처음 본 이 아이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오래된 상처에 대해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도 주제넘다고 생각해 그저 그 한 마디를 뱉었다.

-휘잉.

건조한 바람이 불어왔다.

무릎을 굽혀 나는 그 애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려 얼굴에 난 상처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보이는 것보다 더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을 마음의 상처가 부디 곪지 않기를 바라며.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얼마나 오래가는지, 또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는 내가 잘 아니까.

“네 상처 하나도 안 무서워.”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어 보이자 그 애가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웃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내 말이 웃길 리도 없었고.

‘그런데 웃는다고? 왜?’

차츰 그 웃음은 폭소에 가까워졌다.

“재밌는 여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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