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플로리아.”
곤히 잠든 플로리아의 곁을 지키던 하드엘이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가슴이 아리고, 벅차고, 울렁였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는 어찌할 바 없이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게 좋아 하드엘은 감미로운 여운으로 남은 그녀의 이름을 다시 또 속살거렸다.
플로리아, 플로리아.
맑고 고운 이름이 고요한 방 안을 맴돌 때면 어둠이 깃든 공간에 봄 햇살이 비껴드는 것만 같았다.
비까지 내리는 이 밤에, 더군다나 봄이 오려면 두 계절이 지나야 하는데.
하드엘은 터무니없는 상상에 피식거리며 자신이 잡고 있는 작고 하얀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보드라운 숨을 고르게 내쉬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이렇게 제 곁에 있어 주시는 거죠?’
왜 그런 당연한 질문을 했을까.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어쩌면 묻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자신의 대답에 그토록 환한 미소를 보여주는 플로리아를 앞에 두고 늘 그렇듯 하드엘 그는 할 말을 잃었다.
‘폐하?’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나지막이 불러주는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는 봄꽃 같은 얼굴을 가만히 내려 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매번 그랬듯이.
플로리아 당신의 존재가 꼭 봄의 전부 같아서.
사뿐한 발걸음도, 손짓도, 말투와 행동 전부가 그 아름다운 계절을 닮아 있어서 그래서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의 봄은 곧 당신이기에.
나의 세상에서만큼은 여름의 끝에 다다른 지금도 당신과 함께한 오늘은 봄이었다.
너무나 찬란해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런 봄.
“플로리아.”
입 안에 차오른 자신의 아름다운 봄을 차마 삼킬 수 없어 그는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플로리아는 그에 반응하듯 몸을 틀더니 잡고 있는 하드엘의 손을 당겨 베개처럼 베었다.
아무래도 날 종일 잡아 둘 모양이지.
낮게 웃은 하드엘은 자신의 한 손을 그녀에게 내주며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귓가에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게 속삭였다.
“사랑해.”
* * *
아침이 밝고, 또 밤이 찾아오고. 그렇게 몇 날이 흘렀다.
칸제로스가의 공녀가 옥에 갇혔다. 그 경악할 만한 이야기가 아벨리움 곳곳을 돌고 도는 동안 나뭇잎의 끝이 불그스름하게 물이 들었다.
소슬히 부는 건조한 바람은 계절의 변화를 알리고 있었다.
찬연한 빛을 머금은 하늘이 오늘따라 유독 높고 푸르렀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맑은 날이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죠?”
창가에서 시선을 떼고 거울에 비친 아델을 향해 물었다.
분주하게 나를 단장해 주는 루안의 옆에서 그는 미소 띤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날도 많이 선선해졌어요.”
“그러게요. 가을이네요.”
레이샤. 넌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곧 첫 재판일이 다가오는데.
좁은 감옥에 갇힌 게 고통스러울까? 그도 아님 절망스러운 처지를 비관하고 있으려나?
둘 다였으면 좋겠다. 부디.
이제 아벨리움에서 칸제로스가의 공녀 레이샤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황족 시해 사건으로 공녀가 옥에 갇혔다. 귀족들 사이에서 그 얘기가 처음 퍼지기 시작했을 땐 다들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끌려갔다는 이야기가 떠돌자 귀족들뿐만 아니라 제국민들 다수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고개를 내저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했다.
일전에 레이샤에 대한 소문이 안 좋게 퍼진 적이 있어도 그녀가 평생 가꾸어 온 이미지라는 게 있으니까.
아름답고 바르게 자란 숙녀.
지혜로운 데다가 약자들을 보살피는 착한 성품을 지닌 아가씨.
칸제로스 가의 공녀 레이샤는 뭇 귀족 영애들의 우상이었고 제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귀족이었다.
그게 레이샤가 쓰고 살아온 가면이었다.
초반에는 공녀가 모함에 빠진 거라 주장하는 이들도 몇 있었다. 하지만 레이샤가 무도회에도, 다과회에도 참석하지 하지 않고 그 외 중요 사교계 행사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그녀를 대변하는 목소리는 차츰 줄어 갔다.
칸제로스 공작마저 침묵한 채 칩거하니 믿을 수 없는 소문은 금세 사실이 되어 떠돌았다.
소리 죽여 웅성이던 사람들은 광장 번화가에 공녀의 공개 재판일 공지가 붙은 날을 기점으로 대놓고 공작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중적인 위선자, 살인자, 천사의 탈을 쓴 악마. 이 모든 단어가 이제 레이샤, 그녀의 이름을 뒤따라다녔다.
또한 그동안 애써 공들여 만들어 낸 나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새파랗게 벼린 칼날이 되어 공작가를 공격했다.
손쓰지 않아도 각종 신문사와 가십지가 본 적 없는 나의 심성을 추켜세우며 레이샤의 위선적인 행동을 대놓고 지탄하고 나서줬다.
워낙에 충격적인 사건이다 보니 재판일이 다가올수록 사건에 대한 관심은 연일 뜨거워졌는데 덩달아 그를 계기로 나를 옹호하는 이들이 늘었다.
여러모로 내겐 득이 되는 싸움이었다.
“폐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브로치를 달아주던 루안이 이맛살을 구기며 물어왔다. 염려란 염려가 가득 묻은 얼굴이었다.
“내게 해가 될 일은 없을 거예요, 루안.”
“그래도…….”
가택에 연금된 공작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영지의 일로 관리인들을 만나야 한다며 외출을 단 하루 허가받았다.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혹한의 겨울날 영지민 모두가 난처해지는 상황까지 다다랐다나?
기발하다 못해 참 그다운 이유였다. 이를 두고 고민하던 대법관에게 난 그의 외출을 허가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물론 이는 나를 위한 제안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공작이 불러낸 귀족 전부가 수도에 도착했단 소식이 전해졌다. 그에 공작을 따돌리고 내가 먼저 그들을 만나겠다고 선언한 뒤로 루안은 내내 저런 상태였다.
“도박장에 몰래 들어갔다가 나온 적도 있는걸요.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예요. 그렇죠, 아델 경?”
“네, 그땐 장정들에게 쫓기기도 하였…….”
“장정들에게 쫓기셨어요?!”
몰랐던 사실을 접한 루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가는 눈으로 아델을 흘기며 입으로는 하하 소리 내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 지난 일이에요. 그리고 오늘은 신전 기사들이 나를 호위할 텐데 무슨 걱정인가요.”
“옳은 말씀입니다. 걱정 마세요 루안 양. 제가 보필하는 한 폐하께선 손끝 하나 다치시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실수를 깨달은 아델이 아까보다 적극적으로 내 말에 동의하고 나서주었다. 그러자 조금은 안심한 루안이 표정을 폈다.
그녀는 다시 내 단장을 돕는 일에 집중하는가 싶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도로 허리를 폈다.
“그런데 두 분만 동행하시나요? 그럼 황제 폐하께서 붙이신 다른 기사들은요?”
“곳곳에 숨어 있을 거라 하시던데 나도 그 기사들이 어디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하!”
“봐요, 걱정 없죠?”
따르는 기사들이 지나치게 많은 것 같지만 해맑게 긍정하는 루안을 보니 오늘 아침 하드엘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게 잘한 일이지 싶다.
외출 준비는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땋아 내린 머리를 루안이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그녀의 섬세한 손길에 조금 흐트러졌던 머리칼이 완벽히 정돈되었다.
긴 장갑을 끼고 루안이 건네주는 모자를 받아 드는 사이 릭스가 왔다.
나는 그의 인사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울 앞에서 망사로 장식된 모직 모자를 쓰는 것으로 긴긴 단장은 끝이 났다.
“이만 갈까요?”
“네, 폐하.”
릭스가 정갈하게 답했다. 하지만 반면 내내 대화를 나누던 아델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내 머리 위에 있는 모자를 어느새 깊어진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모자가 지금 차림과 안 어울리나?’
그럴 리가. 안목 좋은 우리 루안이 골라준 건데.
잠시 모자를 매만지던 나는 그를 향해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이상한가요?”
“…….”
“경?”
내 부름에 그의 눈동자가 빛을 되찾았다. 아델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죠?”
“이 모자 안 어울리냐고요.”
아델은 다시 모자를 보고 또다시 내 눈을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그렇담 뭐. 고마워요.”
‘뭘요.’ 예상한 그 대답을 대신한 옅은 웃음에 그의 두 볼에 희미하게 보조개가 피었다.
조용히 미소 짓는 아델을 릭스가 흘긋 쳐다보았다.
뭔가가 이상하기라도 한 건지 릭스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자세를 바로 했지만.
“그런데, 폐하. 백작 부인께서는 어딜 가셨나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루안이 의아한 듯 물었다. 내가 궁 밖을 나서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그게 이상한 모양이었다.
마샤티아 백작 부인은 아마 내가 떠나고 나서야 궁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공작에게 약속시간을 바꾸는 편지를 꾸며 보내야 할 테니까.
“부인에게 따로 시킨 일이 있어서요. 곧 올 거예요.”
“아, 그래서 안 계셨군요. 앗! 이제 출발하셔야지요!”
루안은 번득 생각난 사실에 놀랐는지 빠르게 한 걸음 물러나 길을 터주었다.
내 뒤를 따를 아델과 릭스도 당장은 루안의 옆에 서서 내가 앞서 나아 가기를 기다렸다.
“그럼 루안 다녀올게요.”
짧은 인사를 마치고 나는 가볍게 걸음을 뗐다.
또각거리는 규칙적인 구두 굽 소리에 곧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더해져 섞여들었다.
햇빛이 부서지는 한낮. 눈앞에 펼쳐진 기다란 복도 끝 출구 그 너머의 풍경은 다가올 일에 관계없이 한가롭기만 했다.
창을 통해 소르르 불어오는 바람에 긴 드레스 자락이 너울거렸다.
* * *
그들의 모임 장소는 수도의 번화가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가기는 편하되, 정작 다니는 사람은 드물었다.
‘공작이 선택한 장소니 어련하겠지.’
조금 일찍 도착한 게 아닐까 했건만 괜한 걱정이었다.
나는 한 건물의 입구 앞에 줄지어 세워져 있는 사륜마차들을 보았다.
다들 목이 빠지게 공작을 기다리고 있겠어.
“바로 들어가시겠습니까?”
“그래야죠.”
그리 높지 않은 계단을 오르고 긴긴 복도를 걸었다. 그들이 모여 있을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희미하게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말소리는 내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땐 아예 선명해졌다.
칸제로스 공작. 장소를 고를 때 방음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나 보네.
“공작님께서는 그리 다급한 전갈을 보내시고는 왜 이렇게 늦으시는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원래 이렇게 약속에 늦으실 분이 아닌데.”
“공녀의 일로 상심이 크시니 평소 같진 않으시겠지요. 그런데 공녀가 황후 폐하를 시해하려 했다니, 진짜일까요?”
“현장에서 포박되어 끌려가고 재판 일까지 떡하니 공고된 마당에 설마 가짜일까요. 데보니안가의 영애도 함께 끌려갔다죠, 아마?”
나는 문고리를 잡고 그대로 멈춰 섰다.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았다.
뭔 얘기를 하는지 잠시 들어 볼까?
“황후 폐…….”
나를 부르려던 릭스에게 아델이 무언의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릭스는 별말 없이 알아서 입을 닫았다.
덕분에 문을 넘어 들려오는 여귀족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이게 무슨 난린지 원. 그 흠결 없이 완벽하던 공녀께서 도대체 왜 그런 짓을…….”
“공작님께서 우릴 모이게 하신 이유, 베르토반 영지 때문만은 아니겠죠? 처음은 그랬어도 이젠 아마 공녀에 관한 일이 주된 이유 같은데. 다들 어떻게 하실 건가요?”
“무엇을 부탁하시든 공작님을 봐서 도와드려야지요. 그간 그분께 은혜를 입은 적이 한두 번입니까.”
“글쎄요. 난 솔직히 반대입니다.”
“네?”
“황후 폐하의 입지가 전과는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분을 등진다는 건 황실과 신전을 적으로 두겠다고 선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다들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흠. 솔직히 그 부분이 염려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또한 우리는 공작님의 고결한 성품을 존경해 그분을 따랐던 것이잖아요. 그런데 황족 시해 혐의를 받는 이를 도울지 말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니. 이 무슨 우습고 해괴한 일입니까.”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신 분이니 누명을 썼다고 생각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려 하시는 걸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어차피 칸제로스가가 건재한 이상 우리가 그분의 부탁을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머리가 아프네요.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어요.”
혼란에 찬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대놓고 앓는 소리를 내며 난처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때, 누군가 돌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누명……. 누명이라. 공작님께서는 과연 이번 일을 모르고 계셨을까요?”